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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 딜레마…개죽음이냐, 승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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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연평해전 딜레마…개죽음이냐, 승전이냐"

[박인규의 Inter-View]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①

제2연평해전 발발 13주년이었던 6월 29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평택 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추모사를 통해 "우리 장병들이 북한의 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승리의 해전"이라면서 공식적으로 제2연평해전을 승전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연평해전>이 주목을 받으면서 제2연평해전에 대한 재평가와 당시 정부였던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과 교전수칙이 장병들을 '개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대해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수도통합병원에도 가지 않고 영결식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지금 정서로 볼 때 납득되지 않는다. 사실 이건 매우 잘못된 처사"였다며 "당시 청와대는 국가 위기관리의 원칙에 맞게 엄정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여기에 김대중 정부의 중요한 과오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 사안과 관련된 비판의 화살이 김대중 대통령에게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 당시 지휘책임이 있었던 당시 국방부 장관, 합동참모본부 의장, 해군 작전사령관, 해군 2함대 사령부, 해당 전단에 편대장까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할 이상희 당시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은 이명박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하기까지 했다.


승전이라는 개념을 갖다 붙인 것도 비합리적이라는 지적이다. 김 편집장은 "군은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었다고 하면서 일선 전투원의 죽음은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한다"면서 "승전이면서도 아무런 영광도, 환호도 없는 이 전투의 비극성은 감성적으로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딜레마"라고 꼬집었다.


그럼 대체 왜 군은 제2연평해전에 모순적인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있는 것일까? 김 편집장은 이를 두고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연평해전에 이어 천안함 사건이라는 비극을 겪고 이제는 각종 방산비리로 몸살을 앓는 해군은 자존감이 심각하게 훼손돼 있다"면서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외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이 영화 <연평해전>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러한 갈망이 비단 해군에만 국한돼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공군 역시 방산비리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육군은 잇따른 사고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위기의 장군들>이라는 신간을 펴낸 김 편집장은 "지금 장군들을 포함해 군 전체는 상당한 수준의 자존감과 정체성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했다.


한국군이 처해있는 위기의 실태,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과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기 위해 지난 3일 김 편집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김 편집장과 인터뷰를 두 편에 걸쳐 소개한다.

▲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2013년 <서해전쟁> 이후 얼마 전 <위기의 장군들>이라는 책을 펴내셨다. 김영삼 정부 이후부터 현 정부인 박근혜 정부까지, 시대를 움직였던 장군들이 많이 거론되던데 책의 제목처럼 장군뿐만 아니라 군 전체가 위기인 것 같다.

김종대 : 지금 장군들이 처해있는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거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행동과 의사 결정, 문제의식 등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들여다봤다. 지금 장군들을 포함해 군 전체는 상당한 수준의 자존감과 정체성 위기에 처해있다.

해군이 팔 걷어붙이고 <연평해전>이라는 영화를 만든 것도 이런 것의 연장선이다. 연평해전에 이어 천안함 사건이라는 비극을 겪고 이제는 각종 방산비리로 몸살을 앓는 해군은 자존감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다.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외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이 영화 <연평해전>을 탄생시킨 것이다. 적어도 이 점 자체는 인정하고 우리가 포용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제1연평해전은 1999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교전이다. 99년 6월 15일 당시 군은 10척의 북한 함정들 중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대형 경비정을 대파했으며, 중형 경비정 2척은 기동이 불가능해졌고 소형 경비정 2척은 파손됐다. 반면 남한은 함정과 인원 모두 경미한 피해를 입는데 그쳤다.

이후 3년이 지난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 긴급 출동한 고속정 253편대 중 참수리 357호가 북한의 포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공격으로 남한군은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포함, 모두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남한군의 대응사격으로 북한 경비정 역시 예인선에 이끌려 되돌아갈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사건 이후 '서해교전'이라 불리다가 2008년 4월부터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됐다. 편집자)

그러려면 무엇보다 진실에 입각한 진정성 있는 자기주장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승전이라고 말하는 이 '연평해전'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일단 '해전', '승전' 이런 용어는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이 된 전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해교전인 제2연평해전은 우리 고속정과 북한 함정이 1대1로 붙다가 나중에 초계함이 도발자를 응징한 사건이다. 이런 전투는 '교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라고 연설했지만, 사실 이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예비역 장성들도 많다.

그런데 군은 제2연평해전이 승전이었다고 하면서 일선 전투원의 죽음은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한다. 축하해야 할 승전이지만 축하할 수 없는 전투라는 이 교전의 모순성이 문제다. 이긴 전투지만 분하고 슬픈 죽음이라는 결론은 우리에게 정서적 딜레마다. 승전이면서도 아무런 영광도, 환호도 없는 이 전투의 비극성은 감성적으로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딜레마다.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 죽지 않아도 될 죽음이 발생했다면서, 잘못된 교전수칙과 대북 정책 때문에 6명의 목숨이 사라졌다고 비난한다.

만약 이 논리대로라면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개죽음'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인들이 '개죽음'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교전이 가치를 떨어뜨려 놓고, 같은 입으로 이걸 승전이니 해전이니 하면서 의미를 격상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평택의 제2함대사령부에 있는 제1연평해전 기념비는 승전비다. 그런데 제2연평해전 기념비는 전적비다. 그간 해군도 제2연평해전을 승전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제1연평해전의 영웅인 박정성 2함대 사령관조차 예전에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제2연평해전 승전 논리는 억지스럽다"고 비판한 적 있다.

만일 그들이 '개죽음'을 당한 것이라면, 그들을 그렇게 사지로 몰고 갔던 당시 군 주요수뇌부들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런데 보수는 군 수뇌부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고 오직 김대중 대통령이 잘못했다는 사실만 부각한다. 그리고 당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할 이상희 당시 합동참보본부 작전본부장은 이명박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당시 이 교전에 대해 조사한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해군이 기강이 무너져 발생한 사건"이라고 진술했던 남재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장으로 영전했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오직 대통령 탓만 하면 맺혔던 한이 풀리는 것인가? 여기서 한국군이 처한 역설적 상황이 드러난다.

프레시안 : 올해 들어서 승전이라는 평가가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 같은데,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김종대 : 군 내부의 교전수칙이나 작전지침, 정부의 대북정책과 무관하게 현장에 이미 무너진 지휘체계와 기강문란이라는 현상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참수리 357호를 포함한 우리 고속정 편대는 시속 6노트라는 최저속도로 북한 경비정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는 함정의 최고 속도인 돌격기동, 그리고 적함에 피해를 주기 위한 근접 차단기동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기동이었다.

▲ 영화 <연평해전>ⓒNEW
당시 해군 작전사령관이었던 문정일 전 해군참모총장은 "도대체 왜 그런 기동이 있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작전 교리, 지침, 예규, 교전수칙에도 접적수역에서 최저 속도로 적 함정에 근접기동하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더 황당한 일은 지금은 작고한 정병칠 당시 2함대 사령관이 나에게 증언하기를 자신은 "적 함정과 3km 거리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불과 150m 앞이라는 섬뜩한 거리까지, 그것도 최저 속도로 기동했는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이 궁금증을 풀지 않고서 어떻게 연평해전을 말할 수 있나?

사실 전력상으로 보면 우리 함정은 북한함정으로부터 피해를 당하기 굉장히 어렵다. 참수리 고속정의 최고 속도가 30노트 (시속 약 55km)인데, 이 속력으로 북한 함정 옆을 지나가면 그 물결에 북한 함정은 출렁거려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게다가 북한 함정의 기관 성능이 낮기 때문에 우리 함정을 추적할 수 없다. 구식 지상 장비를 배에 그대로 얹혀 놓은 북한 함정은 흔들리는 배에서 사격을 정확하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의문이 꼬리를 문다. 우리가 접적수역에서 얼마든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인데 왜 그렇게 무력하게 기습공격을 당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이 교전은 왜 발생한 것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당시 우리 쪽이 전투대형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위험한 수역에서는 앞쪽에 고속정이 기동하고 뒤에서는 초계함이 호위하게 돼 있는데 당시 초계함이 고속정 편대의 13km 뒤에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작전의 직위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당시 교신기록과 전투 상보가 공개될 필요가 있다. 당시 사건 관련해서 교신기록이나 전투 상보 어느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도 공개하는 나라가 왜 이런 것은 공개하지 못하나? 진실을 묻어두고 감성에 치우칠 문제가 아니다.

초계함이 와서 대응하기 전까지 20분이 넘도록 고속정 편대는 주포와 부포 모두 응사하지 못했다. 결국 1999년 제1연평해전 때 승전한 이후 3년 동안 해군이 자만감에 도취돼서 현장 기강이 무너져 내렸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부당하게 지휘계통에 간섭하여 "적 함정에 근접하라"는 부당한 지시를 했을 것이다. 이 역시 진상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당시 합참의 해상작전과장을 역임한 예비역 해군 심동보 제독은 나에게 "교전이 끝나고 비통한 심정으로 교훈을 분석하고 합참의장 지휘서신을 작성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처벌을 받아야 할 현장 지휘관까지 표창장을 준 것은 심했다는 의견이었다.

이런 궁금증을 놔두고 이제 와서 교전 수칙 때문에 아까운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세상에 어느 국가에 적이 쏘고 있는데 그냥 얻어맞으라는 교전 수칙이 있겠나? 그런 교전수칙이 있다면 그건 범죄다.

선체끼리 충돌하는 근접차단은 1999년의 제1연평해전에서만 있었던 장면이었다. 그 당시는 사정이 달랐다. 어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 경비정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포하기가 쉽지 않은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제1연평해전이 끝나고 박정성 해군 2함대 사령관은 "더 이상 근접전투는 없다"고 부대원들에게 선언을 했다. 그렇다면 교전수칙 때문에 전투원이 희생되었다는 단순논리 말고 우리는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제2연평해전의 밝혀지지 않은 진실, 사람들이 묻지도 않고 군이 답변하지도 않은 중요한 진실이 숨어 있다.

한편 이에 대한 보수언론의 관점은 해군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따질 필요가 없이 오직 정치논리, 그들의 색깔론으로만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수도통합병원에도 가지 않고 영결식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지금 정서로 볼 때 납득되지 않는다. 사실 이건 매우 잘못된 처사였다.

당시 청와대는 국가 위기관리의 원칙에 맞게 엄정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여기에 김대중 정부의 중요한 과오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선한 해군, 악한 대통령이라는 이분법으로 밀어붙이려는 정치적 의도가 나온다면 곤란하다. 모든 걸 상부의 잘못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태도이자 또 하나의 색깔론이다.

프레시안 : 전투대형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기강 해이로 6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군 책임자들을 강력히 처벌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왜 김대중 정부는 당시 책임자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인가?

김종대 : 우선 월드컵이라는 축제 분위기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것에 대해 청와대가 상당히 심각함을 느낀 것 같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에서도 이 문제를 조사했고 사태를 규명했던 일인데도 이 문제가 정국의 변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북한이 관련한 사과도 했고. 그러다 보니 일단은 유가족과 현장 지휘 책임자들을 두루 위로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다.

그러나 사건 경과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사실 제2연평해전은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해군 작전사령관, 2함대 사령관, 해당 전단장까지 모두 보직해임 됐어야 할 정도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사후처리를 하고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했어야 했다. 위기관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대중 정부에게도 상당한 과오가 있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철저하게 책임자를 색출해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청와대 군 인사개입, 시작은 노무현 정부였다

프레시안 : 남재준 국정원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했을 때 청와대와 군 인사개입을 놓고 상당한 갈등을 보였다. 군 인사에 청와대가 개입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 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 같은데?

김종대 : 그 이전 정부는 정권 차원에서 인사진급을 시켜야 할 대상자가 있다면 참모총장과 협의해서 가능한 선에서 배려해줬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 참모총장은 다른 불이익이 없도록 조정하고, 그것마저 안되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도 잘못된 인사 관행임엔 분명하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국방부에 대놓고 장성 진급 심사를 다시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황당하고 노골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K 행정관은 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찾아와 민정수석의 서명이 들어간 '대통령의 지침'을 들고 와서 육군이 추천한 장군 진급 대상자를 검증해본 결과 상당수 문제가 발견됐으니 그중 3분의 1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윤 장관은 이에 대통령 지시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고 K 행정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윤 장관은 즉시 대통령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김승렬 차관보를 육군에 급파했다. 하지만 남재준 총장과 윤일영 인사참모부장은 인사를 바꿀 수 없다며 맞서고 있었다.

▲ 남재준 전 국정원장 ⓒ연합뉴스

양측이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국정상황실에 파견 나가 있던 J 중령이 윤 장관을 찾아와 대통령은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면서 김우식 비서실장이나 청와대 부속실장에게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실장과 통화 후 뭔가 사태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윤 장관은 김 차관보에게 지시를 철회하라고 했다.

이는 청와대 일부 야심가들이 자신의 사적인 판단만 가지고 국정을 농단한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모른 채 민정수석실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닌, 괴담을 듣고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이 군 인사 전체의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겨졌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해놓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청와대가 군 인사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가 화두가 됐고, 이명박 정부 때는 급기야 청와대가 군 인사를 직접 검증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윤 장관의 왔다 갔다 하는 지시에 남 총장은 청와대와 국방부가 육군을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인사 문제를 둘러싼 청와대와 육군의 갈등이 시작됐다. 그런데 당시 육군 내부에서도 인사 문제를 가지고 많은 잡음이 들렸다. 남재준 총장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만 챙긴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소장 진급에서 탈락한 K 장군이 남 총장이 자기 사람만 챙긴다는 괴문서를 뿌렸을 정도였다.

또 진급 대상 장교 중에 일부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기무사의 신원 자료가 검증 없이 활용되면서 인사의 공정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무사가 11명의 대령에 대해서만 음해성 검증자료를 만들어 남 총장에게 제공했고, 그는 이를 검증절차 없이 인사위원회에서 활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11명 모두가 장군 심사에서 탈락했다. 군 내부에서는 이를 남재준의 '자기 사람 챙기기'로 받아들였다. 이후 군 검찰단은 2004년 말, 인사비리 협의로 육군본부를 압수수색 하기에 이르렀고 군 내부에서는 인사비리 수사에 힘을 실어줬다.

이 인사비리 수사에서 비록 남 총장 본인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주요 인사 실무자들이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으면서 육군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정권이 끝난 지 한참 지난 이후에도 회자됐다. 이명박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인 이상희 전 장관은 2013년 3월 한 논평에서 당시 육군 인사 사건을 지목하면서 "당시 육군 최고 책임자는 밑에서 한 일이라 자신은 모른다며 책임을 회피했다"며 남 총장에게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때 자주국방 의지도 있었고 군 예산을 늘리는 등 군에 대한 상당한 배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장군들이 여당으로 갔다. 그 이전에는 군인이 정치논리에 움직이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많아진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우리 군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반북의식때문은 아닌가 싶다.

김종대 : 군사의 본질은 '나눌 수 없는 이익'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정략보다는 전략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군인들의 입장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북한을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 내지는 통합, 접근의 논리로 대했다. 군이 이러한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정부는 군인들이 느끼는 혼란을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이냐에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때 제2연평해전 군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분하지 못한 것과 노무현 정부 때 인사 개입 문제는 이른바 '진보 정권'의 실책인 것 같다.

김종대 : 진보 정권에서 두고두고 참고해야 할 사건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의 인사 개입이 뒤에 오는 보수정권에 준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러다 보니 군이 정치권력에 대해 굴욕적이고 모멸감을 느끼는 것을 감수해야 할 처지가 된 측면도 있다.

▲ <위기의 장군들> (김종대 지음, 메디치 펴냄) ⓒ메디치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많은 군인들은 고뇌했다. <위기의 장군들>에도 나오지만 한평생 군인의 길만 생각한 장교도 있다. 군대와 군인의 본질만큼은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인데 고위직으로 진출하지 못하니까 눈에 띄는 인물이 많지는 않았다. 김병관 대장도 이런 부류의 인사인데 본인의 처신 잘못으로 장관직에서 낙마했다.

특히 주목할만한 인물로 장경욱 기무사령관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 군 유력자들이 인사를 전횡하는 것에 대한 보고서를 김기춘 비서실장한테 올렸다가 사령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보고서는 일선 육군 사단장들의 여론을 종합해서 사단장들의 불만이 사실인지를 검증해서 써서 올린 보고서였는데, 제대로 된 정보를 올렸다가 되레 경질당한 것이다.

그런데 김기춘 실장이 이걸 당시 국방부 장관과 국가안보실장에게 누설했다. 군 인사에는 5개의 머리, 즉 안보실장과 경호실장, 국정원장,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이 있다고 하는 와중에 그걸 2명에게 보여준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은 청와대에서 보호해줘야 하지 않나?

책을 통해 누가 선하다 악하다는 것보다는 군인이 자기 본분을 잘 지켰는지를 보셨으면 좋겠다. 어느 정부든 군대와 군인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고뇌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군대가 자긍심이 넘치는 곳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군 내에 있는데 이런 사람들과 우리가 언젠가는 손을 잡아야 한다. 군대의 주권자인 시민들은 이런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군의 모습을 그려가야 한다.

군 인사로 점철된 박근혜 정부, 국가 재난 부른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유독 군 출신 인사가 주요 공직에 많이 진출했다. 군 출신들이 사실상 외교 안보 정책을 쥐락펴락하면서 2년 반이 지났다.

김종대 : 군사는 절대로 상대와 나눌 수 없는 이익을 다루는 영역이다. 국가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익을 다루는 것이다. 반면 외교는 상대방과 나눌 수 있는 영역을 다룬다.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전략이고, 싸우지 않고도 유리해질 수 있는 것은 정략이다. 그런 면에서 군사는 전략적으로, 외교는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눌 수 있는 국익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서 군사와 외교가 각기 제자리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걸 제대로 못하면 지정학적 어려움이 상존하고 있는 우리는 더욱 재난이 커질 수 있다.

지금까지 대외정책, 특히 남북관계에서 군을 앞세웠다는 것은 정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사안마저도 전략적으로 접근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보면 그런 부류의 몇몇 장군이 존재한다. 남재준 국정원장, 프랭크스 연합사 작전참모, 맥도널드 연합사 작전참모부장 등이 대표적인데 이 사람들은 전쟁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들에게는 모든 인간의 역사는 이기는 역사와 지는 역사,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 굴복시키지 않으면 굴복당하는 이분법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모든 불행은 여기서 출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과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외교를 통해 일본을 '관찰'할 것인가, 아니면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같은 군사적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냐를 놓고 조선 조정이 큰 혼란에 빠진 바 있다. 결국 당시 조선은 '자중지란'으로 무너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0여 년 전에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통해 일본과 '실화'(失和, 화친을 잃어버림)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는 전혀 위협이 아니었던 일본이 어느 순간에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유성룡의 <징비록>은 신숙주가 경고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는 신숙주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은 것이 임진년 전란의 이유가 됐다며, 아주 통탄할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발발 이후 300년이 지난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때 한국에 들어온 일본 지도층들이 전부 <징비록> 애독자들이었다. 조선은 300년 전 유성룡의 고언을 무시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징비록이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300년 전에 자신들이 왜 실패했는지 교훈을 찾고, 대외적으로 확장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필독서가 됐다.

▲ 임진왜란을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명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던 선조. 드라마 <징비록>의 선조(김태우). ⓒ한국방송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임진왜란과 유성룡의 <징비록>-청일전쟁의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일본과 관계에서 외교와 군사를 각기 어떻게 조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조선 500년은 이 과제 하나만으로도 외교와 군사의 본질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시대다.

조선이 평시에는 외교를, 비상시에는 군사 영역이 그 존재 목적에 충시하면서 맡은 바 본분을 다하도록 했다면 국가적 파국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 500년이 불행에 빠진 이유는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해동제국기>와 <징비록>을 모두 무시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책을 쓰는 이유는, 제 책이 그런 책들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지만, 현대에도 <징비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와 군사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제 책은 군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자기의 치부나 은밀한 것들은 묻어두자는 습성은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데 역사를 고민하고, 군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뇌하는 장교가 존재한다면 제 책에 대해 그렇게만 받아들일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인지 제 책은 지적욕구과 왕성한 영관급 장교들이 집이나 화장실같이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개인적 공간에서 많이 읽힌다고 하더라. 실제로 어떤 소령 한 명은 <위기의 장군들>이전에 출간했던 <서해전쟁>을 합참 사무실에서 펴놨다가 부서장한테 세게 혼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웃음)

프레시안 : 한 나라의 외교와 군사가 적절하게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건데, 문민 지도자들이 외교적 문제를 군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 아닌가?

김종대 : 외교를 정략이 아닌 전략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외교도 이기느냐, 지느냐의 이분법적인 문제로 접근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를 보면 이런 경향이 아주 극명히 드러난다. 한일관계의 경우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일본을 굴복시킬 것이냐 아니면 굴복당할 것이냐 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남북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완전히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 굴욕감을 주거나 굴욕을 당하는 것 이런 식의 선택지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남한의 태도에 북한은 징벌하겠다는 자세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북한식의 굴욕감이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극명한 이분법적 사고를 탑재하고 있는 한국의 안보 담당자들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자존감의 큰 상처를 입는다. 그러면서 우리도 북한에 무언가의 공포를 줘야 한다는, 징벌자로서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걸 하지 않으면 무너진 자존감을 견딜 수가 없는 거다.

'공포의 균형'이라는 말이 있다. 냉전 시대 때는 핵 균형을 의미했는데,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공포가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한 쪽이 상대방을 공격했는데 상대방은 줄 수 있는 공포가 없을 때 세력 균형은 무너진다. 이를 맞추는 것이 최상의 안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이른바 '북핵'의 위협을 막기 위해 한국에서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킬체인, 핵 무장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사실 안보를 중시하는 사람들도 이 세 가지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상처 입은 자존감을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적극적, 능동적 억제의 실현 가능성은 둘째 문제다.

이게 군사적 담론으로 북한을 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고 습관이 다른 외교적 사안에도 적용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방문 할때도 우리 대통령이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았느냐에 집중한다. 외교마저도 상대를 이기거나 상대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전략적 사고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자기과신, 위신 세우기, 상대방에 대한 나의 존재감 과시, 이런 것들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외교에 있어서는 사실 굉장히 불합리한 사고다.

프레시안 : 그런데 책에서 보면 지난해 무인기 사건과 관련해 당시 남재준 국정원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비교적 순수하게 안보적인 차원에서 접근한 것 같다. 사건 초기 국군 정보사, 기무사, 국정원, 경찰이 참여하는 합동심문조가 조직돼서 '대공 용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국내 정치적인 요인으로 이같은 결론이 조정됐고, 결국 남 원장과 김 실장의 경질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군 보다도 문민 지도자가 더 군사화된 사고 방식을 가진 것 같다.

김종대 : 무인기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상황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유우성 씨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가져왔다. 정권과 국정원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무인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에 정권은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무인기 사건을 이용해 안보 정국을 구성하려고 했다.

이후 남 원장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인기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했다. 4월 14일 간첩사건 증거 조작 의혹과 관련해 수사 중간 발표가 나온 날, 국정원 2차장이 경질됐고 남 원장은 3분에 걸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 때 남 원장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무인기로 조성된 엄중한 안보 국면'이라는 표현을 썼다. 간첩조작 사건을 반전시키기 위한 카드로 핵실험과 무인기를 사용하기 위한 정권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다.

모든 사안에 대해 전략적인 사고를 우선시하는 군인임에도 무인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공용의점을 찾기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는 군인으로서는 당연한 절차를 따라 사건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무인기가 정말 위협이 되는지 파악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위협이 되지도 않는데 섣불리 국방 재원을 낭비하면 다른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정치권력의 의도와는 다른 결론이었다. 그래서 김장수 실장이 경질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간첩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마당에 북한의 4차 핵실험이든 무인기든 안보 위기를 부각시켜야 했는데, 안보실이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타이밍'을 제때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김 실장의 '비정무적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같은 안보 세력 내에서도 갈등은 있을 수 있다. 군이라고 해도 육해공군 간에도 시각이 다르고, 심지어 합동참모본부 내에서도 합참의장실과 실무 본부의 입장이 다르다. 지난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에도 합참의장실과 실무 본부가 대립했다.

당시 의장실에는 4명의 대령이 의장을 가까이서 보좌했고 합참 정보본부와 작전본부, 전략본부가 상황을 대응했다. 여기서 전투기로 북한을 응징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의장 주변에 있던 4명의 대령은 이미 교전은 끝났지만 지금이라도 전투기로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때 합참 정보본부장이 대령한테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을 치면서 의장한테 공식 계통을 우선시해달라고 정식으로 이야기할 정도였다.

관료 조직은 각자가 갖고 있는 전문성, 책임, 권한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킨다. 마지막에 세상에 나오는 정책은 이러한 갈등의 산물이다. 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 조직, 상황이냐에 따라 군인들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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