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국가 부도를 막은 건, 오바마였다. 짧은 설명이 필요하다. 1980년대 중남미 국가에서 채무불이행 사태가 잇따랐다. 미국 입장에서도 곤란한 일. 1989년, 니콜라스 브래디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은 이들 국가의 채무를 일부 탕감하는 계획을 내놨다. 이른바 '브래디 플랜'이다. 결과적으로 중남미 국가들에게 도움이 됐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유심히 지켜봤다. '벌처 펀드(vulture fund)'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펀드다. 죽은 고기를 먹는 독수리(vulture, 벌처)처럼, 재정 위기를 겪는 중남미 국가에 다가갔다. 그리고 헐값에 국채를 사들인 뒤,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미국이 '브래디 플랜' 집행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브래디 플랜'에 목을 맨 남미 국가 입장에선 엘리엇이 해달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엘리엇이 폭리를 취한 방법이다.
아르헨티나 정부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미국 대법원은 엘리엇의 손을 들어줬다. 채권자의 권리를 극대화한 엘리엇 측 주장을 깰 논리가 궁했던 탓이다. 판결대로라면, 아르헨티나는 지난해 국가 부도를 겪어야 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나섰다. 헌법에 조예가 깊던 그는 "권력 분리 조항에 있는 대통령의 특수 헌법적 권리"라는 개념을 꺼내 들었다. 이런 논리를 밀어 붙여서, 법원 판결이 그대로 집행되는 걸 막았다. 정치적 결단이었다. 엘리엇의 폭리를 위해 다수 시민이 불이익을 겪어선 안 된다.
오바마의 '정치'와 '벌처 펀드' 엘리엇
정치란 이런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기계가 아니다. 시장 원리, 법률 개념만으로 이해한 세상은 깔끔하다. 생산자와 소비자,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채권자의 입장이 꼭 보편적인 정의는 아니다. 시장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손해 보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예전엔 그래서 종교가 필요했다. '희년'이라는 기독교 전통이 있다. 50년마다 한 번씩 빚을 탕감하고 자산을 재분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했다. 지금은 그 역할을 정치가 한다. 오바마가 했던, 바로 그 역할이다. 가끔은 기계적인 채권-채무 관계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 시장이 풀 수 없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본이 정치를 혐오하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정치 없는 세상이 그들에게 편하다. 생산자와 소비자, 채권자와 채무자로만 이뤄진 세상이라면, 엘리엇과 같은 '벌처 펀드'는 영원히 승승장구 할 게다.
엘리엇? 맞다. 지금 삼성과 분쟁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엘리엇이다. 엘리엇과 삼성 가운데 누가 더 나쁜지를 따지는 건 부질없다. 엘리엇이 더 나쁘니 삼성 편을 들어야 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여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은, 전제부터 잘못됐다.
둘 다 탐욕의 주체다. 누군들 탐욕이 없겠나. 다만 엘리엇과 삼성은, 탐욕을 끝까지 밀어붙일 힘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네 보통사람과 다르다. 중요한 건 이들의 힘을 각각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경계를 정하는 일이다. 그게 법과 제도이며, 그걸 정치가 만든다. 요컨대 지금 필요한 논쟁은,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이다.
전면에 나선 이재용, 다시 '경제 민주화'다
자본의 편을 든 법원 판결에 제동을 건 오바마의 사례를 마냥 부러워 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이익균점'과 '노동자 경영 참여'를 보장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이런 전통을 깼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만들어진 현행 헌법에는 '경제 민주화' 조항이 있다. 군사정부가 지워 버렸던 제헌헌법의 정신을 일부 계승한 내용이다. 지난 대선 당시 주목받았던 조항이다.
삼성과 싸우는 엘리엇은 '주주의 권리'를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주장이 지닌 위험 역시 지난 대선 당시 달아올랐던 '경제 민주화' 논쟁에서 충분히 다뤄졌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는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에 대해 여러 번 경고했다. 미국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어간 과정을 돌아보면, 일리가 있다. 주주에게 최대 이익을 배당한다는 목표에 너무 치중하면, 기업 수명은 짧아진다. 결국 노동자와 서민이 피해를 본다.
이는 대안적인 기업 지배구조 논의와도 맞물린다. 정승일 <사민저널> 기획위원장은 <굿바이 근혜노믹스>라는 책에서 주주보다는 은행이 재벌을 지배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또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을 현물 주식으로 거둬서 '국영 지주회사'를 세우는 방안도 거론했다. 요컨대 그는 주주보다는 은행이, 그보다는 국가가 대기업을 지배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맞은편엔 소액 주주운동을 했던 이들이 있다. 한국 재벌 기업은 그동안 너무 불투명하게 운영됐다. 그래서 생겨난 사회적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이를 해결하는 데는 주주 자본주의가 일정한 도움이 된다.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은 이제 마무리 수순이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공개 사과는, 그의 생애 첫 기자회견이었다. 경영 전면에 나선다는 신호다.
그런데 삼성에 대한 투기 자본의 공격에 대해, 공식화된 3세 승계에 대해, 적은 지분으로 거대 재벌을 지배하는 기이한 지배구조에 대해, 우리 사회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 그래도 되는 걸까? 이런 논의를 제대로 해보자는 게 '경제 민주화' 논쟁이었다.
'보수의 품격' 보여준 유승민 연설
복지 논쟁도 마찬가지다. '경제 민주화' 논쟁과 맞물려 있다. 대기업에게 세금을 제대로 거둬야 복지국가가 가능하다. 그러자면 경영이 투명해져야 한다. 아울러 다수 중소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복지에 필요한 세수가 적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수 노동자의 소득이 면세점 이하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괜찮은 급여를 받을 수 있으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래가 공정해야 한다. 거래가 불공정한 한 이유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값 싼 노동력으로만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자면,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고 비정규직을 줄여야 한다. 하지만 인건비 인상을 감당할 수 없는 기업도 많다. 값 싼 인건비에만 기대서 연명하는 기업이 다른 길을 찾도록 이끄는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아울러 시장에서 도태된 기업 임직원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강화돼야 한다. 결국 다시 돌아간다. 복지 증세가 필요하다. 재벌 개혁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공개적으로 질타했다. 유 원내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26일 공개 사과했다. 유 원내대표의 지난 4월 국회 연설을 다시 꺼내 읽는다. '보수의 품격'을 잘 보여준 연설이었다. 그는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자유시장경제와 한국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치겠다고 했고, "나누면서 커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말했다. 다른 자리에선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도 했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곁들였다.
3년 전 박근혜 공약, 이제 누가 기억하나
유승민은 시장을 강조한 주류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따뜻한 공동체"를 거론했다. '정치의 역할'에 눈을 떴기에 한 말이었을 게다. 그의 날개가 꺾이면서, 정부와 여당 안에서 '경제 민주화' '복지' 등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사라졌다. 이제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불과 3년 전, 박근혜 후보의 공약이었는데 말이다. '기억 투쟁'은 세월호 참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글 도입부에 있는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대한 설명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교수의 블로그 및 신 교수가 소개한 외신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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