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15일 '공화국 정부 성명'을 통해 "당국 간 대화와 협상을 개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같은 날 북한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15주년 기념 중앙보고회에서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은 "남한 당국이 남북관계를 회복할 의지가 있다면 공화국 정부 성명에 호응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의중을 대변해 온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16일 '공화국 정부 성명'이 남측 당국에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은 또 15일 북·중 국경으로 불법 입국했다는 우리 국민 2명을 송환하겠다고 통보하고, 17일 판문점을 통해 이들을 돌려보냈다. 이들을 돌려보낸 직후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돌려보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선중앙TV를 통해서도 이런 내용을 방송했다. 북한이 남한과의 대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정부는 '공화국 정부 성명'이 나온 15일 '통일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부당한 전제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당국간 대화의 장에 나오라"고 촉구했다. '공화국 정부 성명'을 보면, △ 대북 국제공조 중지 △ 체제통일(흡수통일) 추구 중지 △ 한미연합훈련 중단 △ 비방·중상 중단(전단살포 중지) △ 남북 간 접촉 막는 장치 철폐(5.24 조치 해제) △ 6․15, 10․4 선언 이행 실천적 조치 실행 등을 열거한 뒤 "북남 사이에 신뢰하고 화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아 '당국 간 대화'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북한이 열거한 항목들을 '전제조건'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공화국 정부 성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북한은 앞부분에서 열거한 항목들을 당국 간 대화가 이뤄지기 위한 조건이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북한이 당국 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북남 사이에 신뢰하고 화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이라는 문구인데, 이 문구는 상당히 추상적인 내용이다. 정부가 해석한 것처럼 한미연합훈련 중단 등 북한이 열거한 항목들을 포괄하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국 간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달라는 단순한 촉구성 언급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북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 정부가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나 대북 국제공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남한과의 대화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기선을 제압하고 우리 정부의 대화 의지를 가늠해보는 차원에서 다소 모호하게 해석할 수 있는 언급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해석했다. 정부가 북한의 열거항목들을 확실하게 '전제조건'화시키면 대화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다.
물론, 북한이 순수한 의미에서 대화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대화의 가능성을 흘리면서 전단 문제나 한미훈련과 관련해 남남갈등을 유도하고 8월이 되면 을지훈련을 이유로 대화를 걷어차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대화를 시도해보다 대화가 잘 안 되면 대화 파탄의 책임을 남쪽에 돌리면서 하반기 강공의 명분을 쌓겠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북한의 그런 여러 가지 계산을 짐작하면서도 이번 기회에 대화를 시도해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일단 시도를 해야
대화를 추진한다고 해도 과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면 일단 시도를 해보긴 해야 한다. 아예 손 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 북한이 대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은 대화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부분도 계산에 넣고 있다는 뜻이므로, 북한의 그런 의도를 활용해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풀어갈 부분이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때마침 울릉도 근처에서 표류하던 북한 선박을 우리 해경이 구조해 송환하면서, 북한의 우리 국민 송환에 이어 인도적 차원의 조치들이 상호 이뤄지게 됐다. 단발성 사건들일 수 있지만,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활용해서라도 정부가 보다 적극적일 수는 없을까?
남북이 대화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8월 하반기가 되면 한미연합 을지훈련이 시작된다. 남북관계 개선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8월이 지나가면 10월 10일 노동당 창당 기념 70주년을 맞아 북한이 장거리로켓 발사 같은 대형 이벤트를 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올해가 지나가면 내년에는 총선, 내후년에는 대선으로 가면서 정권 말이 된다. 남북관계의 기반이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 말로 가면 관계개선의 전기를 찾기는 더욱 어렵다.
핵 문제가 걸려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은 어렵더라도, 5․24 조치와 일부 교류협력의 확대 등 남북이 지금 상황에서 풀어갈 수 있는 영역은 분명히 있다. 남북은 과연 대화의 끈을 잡을 수 있을까?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 포커스(http://www.e-nkfocus.co.kr)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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