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뒤에 선 IMF
언젠가 소개해 드렸죠? 제가 요즘 어떤 강연을 하든 맨 처음에 보여 드리는 그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 <복음의 기쁨>에서 트리클다운 경제학은 작동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때 세계의 언론과 경제학자들이 난리를 쳤습니다. 만화에서는 상위 1%의 부자가 누구한테 그런 좌파 경제학을 배웠냐고 묻자 교황은 엄지 손가락으로 뒷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죠.
이제 이 만화는 보완되어야 합니다. 예수 뒤에 IMF가 섰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IMF의 전략, 정책, 검토 분과의 연구진 토론 보고서(Strategy, Policy, and Review Department의 Staff Discussion Note)인 <소득불평등의 원인과 결과- 세계의 시야>(Causes and Consequences of Income Inequality: A Global Perspective)를 쓴 사람들이 서야 합니다. 보고서 첫 머리에 "이 보고서는 연구진의 견해이고 반드시 IMF의 견해나 IMF의 정책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소개해 드린 것처럼 ILO와 UN에 이어 OECD와 IMF 등 국제기구에서도 불평등이 문제이며, 나아가서 성장을 저해한다는 보고서는 줄줄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장을 하면 불평등도 해소된다", "섣부른 평등 정책은 혁신과 근로의 유인을 낮춰서 성장을 저해한다"는 '낙수경제학'은 여전히 주류경제학의 핵심 명제입니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의 90% 이상, 경제관료의 거의 100%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글로벌 스탠다드로 포장해 전 세계에 퍼뜨린 월스트리트-미국재무부-IMF 삼각 축 중 하나인 IMF에서 이런 보고서가 나왔으니 가히 상전벽해라고 할 만 합니다. (☞바로 가기)
이미 1년 전부터 오스트리(Ostry,J) 등 IMF 경제학자들이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이 보고서는 소득불평등뿐 아니라 소득분포 역시 성장에 문제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상위 20%의 소득 몫이 1% 증가할 때 이후 5년 동안 GDP는 0.08% 포인트 감소해서 수익은 밑으로 흐르지 않는다(the benefits do not trickle down)"고 명시했습니다. 반면 "하위 20%(가난한 사람들)의 소득 몫 1% 상승은 0.38% 포인트의 고성장으로 이어진다"(p7)는 겁니다. 즉 중하위 계층의 소득이 늘어나도록 하면 성장률이 높아진다는 거죠.
불평등이 높아지면 1) 저소득층 가계가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결과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고, 2) 세대간 이동성을 낮추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은 세습이 되며 3) 또한 고소득층의 소비성향이 낮으므로 총수요를 줄여서 성장을 잠식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서 보고서는 4) 불평등이 경제위기, 금융위기,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해서 투자를 저해하고 5) 불평등은 공공재 공급을 제한하는 등 공공정책의 왜곡을 가져오며 6) 결과적으로 빈곤을 줄이지도 못한다는 점도 덧붙였습니다.
불평등의 원인
보고서는 1988년에서 2008년까지 어느 분위의 소득이 가장 많이 증가했는지, 세계 각국을 검토한 뒤 선진국에서는 9분위와 10분위(즉 상위 20%)의 소득이 주로 증가했고, 신흥경제국가에서는 하위 두 분위와 상위 세 분위의 소득이 증가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p12의 <그림4>. 한국은 9분위의 소득이 제일 많이 증가했군요). 즉 중산층이 줄어든 결과 불평등이 심해졌다는 거죠.
보고서는 중산층의 축소는 첫째, 전 세계적으로 노동소득이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에 돌아갔고, 둘째 전체 소득 중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몫(노동소득분배비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두 번째 주장은 특히 포스트케인지언들의 소득주도성장론의 핵심 명제입니다.
<그림1> 노동생산성과 실질평균임금 지수 추이 (2005~2012)
<출처> IMF,2015, 위의 보고서, p14
<그림1>은 2005년을 100으로 했을 때, 이후 2012년까지 노동생산성과 실질평균임금 지수의 변화를 그려 놓은 건데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임금이 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의 몫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거죠. 한국의 격차가 가장 크고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최근 불평등 심화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이 보고서는 스티글리츠나 피케티, 라잔 등 주류경제학 내 이단아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IMF 일부에서 그 동안의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주류경제학의 핵심 논리를 고수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불평등의 원인으로 기술혁신을 들고 따라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겁니다. 아래 <그림2>를 보시죠.
<그림2> OECD 국가의 기술진보와 숙련프리미엄
<출처> IMF, 위 보고서, p19
왼쪽 그림은 정보통신기술 사용 지수의 추이를 보여주고 오른쪽 그림은 숙련 프리미엄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숙련프리미엄이란 쉽게 말해서 고졸 이하의 월급을 100으로 했을 때 대졸 이상의 월급이 얼마나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즉 학력별 임금 격차입니다.
한국은 정보통신기술 사용에서 선택된 국가 중에서는 가장 낮은 증가율을 보였지만 숙련 프리미엄에서는 헝가리와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 동안 국제기구(그리고 주류경제학)의 논지에 비춰 보면 한국의 불평등 심화는 기술혁신이 빨라서 고숙련 노동자와 저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죠. 불평등이 성장을 저해한다는 최근의 국제기구 보고서들이 이구동성 내리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한국에서 학력별 임금격차가 벌어진 게 기술혁신 때문이고 대학진학률을 더 높이고 기업의 수요에 맞춘 교육을 강화하면 불평등이 줄어들까요? 오히려 대학 졸업자를 수용할 고숙련 일자리가 부족한 것, 즉 기술혁신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닌가요?
어떤 이유로든(포스트케인지언이나 정치경제학자들은 사회적 역관계나 제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학력 간 임금격차가 벌어져서 대학진학률이 높아졌고 이들을 수용할 기업이 부족하다는 게, 적어도 한국에서는 더 정확할 겁니다. 또한 하청단가 등의 문제(이 역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역관계와 제도가 문제겠죠) 때문에 중소기업의 생산성 증가가 더딘 데다, 임금 증가율은 그보다도 낮아서 학력별 임금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졸자들의 실업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전체적으로 한국의 현실은 보고서의 주장과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는 만병통치약은 없다고 전제한 후 1) 평등과 효율을 조화시킬 수 있다 2) 재정정책은 불평등 완화의 중요한 정책수단이다 3) 교육정책이 핵심이다(중하위 계층의 교육기회를 늘려야 한다) 4) 안전한 금융 포용을 촉진해야 한다(금융위기를 불러 오지 않는 범위에서 중하위층에게 신용을 제공해야 한다) 5) 잘 설계된 노동시장정책과 제도는(최저임금인상,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이중노동시장의 해소) 불평등을 줄일 수 있고 동시에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국제기구가 고집해온 이른바 구조개혁과는 사뭇 결이 다른 정책 처방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렇듯 '글로벌 스탠다드'가 바뀌고 있는데도 계속 규제완화와 구조개혁, 즉 '줄푸세'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 정부는 메르스 방역보다 경제정책에서 훨씬 더 무능하다는 사실은 곧 증명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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