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구경은 화장실에서 했다.
명품 매장이 텅 비었다. 눈에 띄는 사람은 시무룩한 표정의 점원들이다. 8일 낮,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명품관. 평소엔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곳이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혼자 밟고 다니기가 민망해서 화장실에 들렀다. 그제야 손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마스크를 쓴 사내.
"중국에서 오셨나요?"
영어와 한국어로 물었는데, 답이 없다. 사내는 비누로 손을 박박 씻고 나갔다
'메르스 이후'엔 '유커' 지갑 다시 열릴까?
발길을 명동성당 근처로 돌렸다. 확실히 한산했다. 노점상들은 "메르스 때문에"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른바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도 자리가 많이 비었다.
중국인 관광객, 이른바 '유커(遊客)'들의 쇼핑 패턴은 대충 정해져 있다. '옷은 동대문, 액세서리는 홍대, 화장품은 명동'이라는 공식이다. 상권 자체가 이렇게 재편되고 있다. 명동에서 옷 장사를 하면, 재미를 못 본다. 명동엔 화장품 가게만 늘어난다. 2008년 21곳이던 화장품 가게가 올해 1월에는 134곳으로 집계됐다.
누군가는 '패션 1번지'로, 다른 누군가는 '(명동성당이 있는) 민주화의 성지'로 기억하는 명동은, 이제 '유커가 화장품 사는 동네'다.
그런데 화장품 매장에 손님이 적었다. 앞서 방문한 명품 매장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한산했다. 매장 점원은 "'메르스 사태'가 진정되면 곧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가게 주인의 전망은 달랐다. 화장품 매출은 '메르스 유행' 전에 이미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메르스 유행'은 하강을 가속화하는 악재다. 그렇다면, 메르스가 지나간 뒤에도 상권의 회복세는 더딜 수 있다.
메르스에 감염돼 고생하다 완치된 사례가 나오고 있다. 그처럼, 메르스로 시들해진 명동 상권이 살아나면 좋겠다. 그래서 명동 상인들이 다시 웃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희망 사항이다. 중국 내 혐한 분위기는 확대일로다. 메르스에 감염된 채로 중국 출장을 갔던 한국인은 중국 누리꾼들에게 신상이 털렸다.
'유커 착시 효과' 사라지면…
'메르스 이후'에 대한 걱정은 일리가 있다. 그간, 한국 경제의 성공 방정식은 '몰아주기'였다. 잘 되는 게 있으면, 정부가 지원을 몰아준다. 사람과 자금이 확 쏠린다. 그렇게 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 수출을 주도하는 재벌이 그렇게 생겨났다. 명동 거리를 메운 화장품 가게 역시 마찬가지다. '한류'가 뜨고 '유커'가 돈을 뿌리자, 지자체와 중앙 정부는 '중국인 맞춤형'으로 거리를 꾸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다양성 없는 생태계는 전염병에 약하다. 면역력을 기르기 힘들어서다. 장남 하나 잘 키워서, 나머지 식구들이 덕을 보자는 방식은 오래 갈 수 없다. 장남이 실직하면 줄줄이 무너진다. '유커'의 지갑만 바라보는 내수 경제는 그래서 걱정스럽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한 게 1995년이었다. 윈도즈 95 출시 이후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고 믿을만 했다. 이 회장의 발언은 이런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당시 반도체를 제외한 품목은 수출 실적이 나빴다는 점이다. 그래도 전체 수출 실적은 괜찮았다. 반도체수출이 워낙 두드러져서 생긴 '착시 효과'였다. 경제 관료들도 이런 맹점을 알았을 게다. 하지만 덮어 뒀다. 당장은 경제지표가 좋으니까. 전 세계 PC 이용자들이 윈도즈 95 업그레이드를 마치자, 반도체 수요도 주춤했다. '착시 효과'가 사라졌고, 한국 경제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경제정책 당국자들에게 손님 뜸한 명동 화장품 거리를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유커 착시 효과'가 지나간 뒤엔, 우린 뭐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