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수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거라는 연초의 예측은, 불행하게도 현실이 되었습니다. 올 들어 1월 –1%, 2월 –3.3%, 3월 –4.3%, 4월 –8.2%로 감소율마저 높아지고 있는데, 관세청이 5월 1일부터 20일까지 수출 실적을 집계한 결과 역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6% 줄었다는군요. 더구나 이 달엔 연휴가 많아서 –10%대까지 떨어질 지도 모릅니다. 바야흐로 두자릿수 감소세를 보이는 거죠. 수출 감소 대상도 전방위적이어서 나 홀로 증가하고 있던 대미 수출도 마이너스로 돌아섰습니다.
"과소투자의 세계(World of Underinvestment)"
수출 감소를 정부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래도 대기업의 수출과 투자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규제완화와 FTA에서 살 길을 찾는다면 그게 문제겠죠. 더구나 구조개혁한다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욱 낮추면 경제는 더 깊숙이 침체의 늪에 빠질 겁니다.
어쨌든 문제는 세계경제가 단기간에 회복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요즘 많은 경제학자들이 '장기침체'를 입에 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 1930년대에 미국의 경제학자 한센이 처음 입에 올린 이 '장기침체'는 실패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전후 30년은 '자본주의 황금기'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경제성장의 시대였으니까요.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을 빼곤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어마어마한 국가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 뉴욕대 교수가 그 답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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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전세계적 투자가 일어난 반면 지금은 제목 그대로 "과소투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전후 각국의 리더는 장기 전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자신의 국가부채를 제약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서 투자를 주도함으로써 민간투자를 끌어들였죠. 지금처럼 국가부채를 줄여야 한다며 서로 긴축정책을 강요하지 않은 겁니다. 현재의 긴축경쟁과 환율전쟁은 말 그대로 "이웃 가난하게 만들기"이며 세계 전체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인 게 분명합니다.
현재가 당시와 다른 점도 있습니다. 첫째는 소득분배의 동학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 둘째는 인구 고령화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추가적인 수요를 만들어 내고 공공투자를 부추기기 위해선 예산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선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경제성장의 영감(Inspriring Economic Growth)"
역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5월 18일 칼럼에서, 지금처럼 초저금리라면 장기 국채를 발행해서(안전자산도 부족하니까요) 정부가 장기 공공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워낙 금리가 낮다면 매년 그 정도의 수익율만 거둬도 남는 장사일테니까요. 그는 1950~60년대 미국의 주간(interstate) 대륙횡단 고속도로, 그리고 우주탐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진취적인 프로젝트가 무엇일까, 묻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든 나라의 수요를 축소시키는 긴축 요구와 수출을 위한 환율전쟁을 그만두고 서로의 수요를 부추기는 대규모 정부 투자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짧은 칼럼이라 그렇겠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도 있습니다. 첫째는 그런 희망을 위해서는 불평등을 먼저 줄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피케티의 장기 통계가 보여주었듯이 1, 2차 세계대전과 세계대공황은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했죠. 한국에서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 그런 역할을 했고 평등이라는 기초 위에서 국가의 투자가 모두에게 과실을 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녹색투자야 말로, 실러 교수가 얘기하는 진취적인 프로젝트일 겁니다. 대륙간 고속도로보다 훨씬 더 규모도 크고 장기에 걸친 투자를 요구하는 생태 하부구조를 갖추는 일이니까요. 현실에서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실러교수가 말하는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에 해당할 겁니다.
어쨌든 어느 나라가 먼저 자산과 소득의 재분배, 그리고 생태 투자를 과감히 하느냐가, 스펜스 교수가 강조하는 세계의 리더십을 결정할 겁니다. 대체로 이런 방향의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중국 옆에 있다는 건 우리도 합세하여 동아시아에서부터 이런 정책기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정반대로 TPP 가입을 요청하고 그 반대급부로 사드까지 도입한다면 이런 기회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일일 겁니다.
유동성 시한폭탄
하지만 현실은 두 노벨상 수상자의 염원과는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각국 정부는 오로지 양적 완화라는 비전통적 금융정책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 정책은 2008년 금융위기가 파국으로 치닫는 걸 막는 역할을 했지만 이젠 자국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이용되고 있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교수는 현재의 상황을 "유동성 시한폭탄(The Liquidity Time Bomb)"이라고 부릅니다(5월 21일자 칼럼). 양적 완화로 형성된 거시적 유동성이 심각한 시장의 유동성 부족(illiquidity)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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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의 "섬광의 폭락(flash crash)", 2013년 봄의 "축소 짜증(taper tantrum, 양적완화 축소 발표에 따른 금융불안정을 말함)", 2014년 10월의 미국채 수익률 급전직하, 2015년 4월의 독일 10년채 수익률 저하가 모두 그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중앙은행의 거시 유동성 창조가 채권 수익률을 낮추고 불안정성을 줄였지만 동시에 떼거리 행동을 일으키는 거래와, 유동성이 낮은 채권 펀드에 대한 더 많은 투자를 불러 일으켰고 동시에 규제강화는 은행의 역할(많은 자산 보유에 의한 가격안정화 역할)을 축소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거시 유동성과 시장 유동성 부족의 결합은 바로 시한폭탄이라는 거죠.
쉽게 말해서 단기 불안정성을 막기 위한 유동성 창조가 주식, 채권, 기타 자산시장의 거품을 일으키고, 투자자가 이런 자산에 몰리면 결국 장기 폭락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물론 위의 두 칼럼처럼, 또는 우리의 제안처럼 투자와 소비를 늘릴 수 있다면 이런 금융의 자립적 버블 형성과 붕괴를 막을 수 있겠지만 현재와 같은 침체가 지속된다면 유동성 증가가 결국은 또 한 번의 금융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구나 한국은 유동성이 지극히 낮은 부동산 버블을 일으키고 있으니 더 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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