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10년 만에 사표…근데 이 자기 검열은 뭘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10년 만에 사표…근데 이 자기 검열은 뭘까

[프레시안 books] 강수돌 <여유롭게 살 권리>

지난 10년간 가장 잘한 선택은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회사에 사표를 낸 일이요."

지난 2014년 12월 31일 자로 회사에 사표를 냈다. 10년을 꼬박 다닌 회사였다. 2015년 1월 1일부터 백수가 됐다. 신세계가 펼쳐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꼭 가야 할 곳은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다. 할 일은 없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니, 놀라운 세상이 펼쳐졌다.

마약 같은, 어쩌면 마약보다 중독이 강한 월급을 끊는 게 왜 두렵지 않았겠나. 하지만 끊어야만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회사 나가는 게 행복하지 않았다. 월급 대신 행복을 선택하기로 했다. 강수돌이 <여유롭게 살 권리>(다시봄, 2015년 4월 펴냄)에서 말한 대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제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속은 죽은 거나 다름없이 살 것인가."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꿈꾼 대로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연세 400만 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마당과 텃밭이 딸린 집을 구했다. 지리산에서 고사리를 뜯고, 민박을 시작했다. 그 수입은 회사에서 받았던 월급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하지만 가슴속 행복감은 직장인 시절에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고사리 등 '산나물 시즌'이 마무리된 요즘은 산책하거나 가만히 사색하는 게 일이다. 고요하고, 고독하고, 종종 쓸쓸하다. 얼마 만에 누리는 평화로운 시간인지, 스스로 중독을 치유하는 중이라 여긴다.

ⓒ다시봄
"대부분의 한국 기업이나 공공 기관, 학교에서는 사실상의 일중독자를 '대단히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표창장'을 주며 칭찬한다. 물론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일중독은 모든 중독 증상 가운데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적극 권장하는 유일한 중독이다. 그래서 일중독을 치유하기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환자는 '내게 질병이 있다'고 인정하고 '정말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5월의 햇볕 아래에서 <여유롭게 살 권리>의 이 부분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중독이라니. 대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한 선배는 작년 직장에서 '우수 사원상'을 받았다. 그 선배는 올해 봄에 일하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직장에는 병가를 냈다. 언제 직장에 복귀할지 결정하지 않았다.

누가 그 선배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쓰러질 때까지 일하고, 그렇게 일해야만 '좋은 노동자'로 칭송받는 사회를 만들었을까. 강수돌은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세계 여러 석학들의 연구 결과도 폭넓게 인용하면서 일중독은 치유해야 할 질병이자 자본의 요구를 주체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분석한다.

"독일 브레멘대학의 홀거 하이데(Holger Heide) 명예교수는 좀 더 심층적으로, '일중독이란 자본주의적 폭력 이후에 나타나는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 규정했다.

즉, 일중독은 역사적으로 초기 자본주의 1세대 노동자들의 자본주의 국가 권력 및 기억 권력이 휘두른 폭력에 상처받고 또 그 모든 저항의 시도들이 패배로 돌아간 뒤, 그 이후 세대 노동자들이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체제와의 동일시와 공격자와의 동일시를 한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일중독은 사회적으로 가정과 학교를 거치면서 체계적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경쟁 지상주의와 성과주의는 일중독을 온 사회로, 전 세계로 확장하는 추동력이 된다."

일중독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파이낸셜뉴스>가 2014년 5월 4일에 '영유아의 생활시간 조사'를 인용해 보도한 대로 "한국 초등학생이 하루에 학습하는 평균 시간은 대학생의 227분보다 훨씬 긴 374분으로 6시간이 넘는다."

노년의 삶은 또 어떤가. 저자 강수돌의 지적한 것처럼, 유럽의 노동자는 정년을 단축하라고 요구하는데, 한국은 아예 정년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사표를 내고 지리산으로 내려온 나도 지금까지 '정년이 길면 좋은 거 아니야'라고만 생각했으니, 스스로 내면화한 '체제와의 동일시'가 정말 무섭다.

한국의 긴 노동시간과 높은 산업재해 비율, 세계 1위권인 청소년 자살률은 더는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많이 열심히 일하고, 죽어라 공부하는데 행복하지 않다니. 무언가 크게 어긋났다. 강수돌이 책에서 인용한 대로 케인스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기술이 진보하면 시간당 생산량이 증가하므로 생계를 위한 필요 노동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테고, 마침내 거의 일할 필요가 없어지는 단계(하루 3시간 노동)에 이르게 된다." (케인스가 1930년에 쓴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하루 3시간 노동. 일중독에 걸리고 병원에 실려 가야 '우수 사원상'을 받는 현실을 고려하면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얼마만큼 생산량을 늘리고 부를 쌓아야 노동시간을 줄이고 줄여 거의 일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될까?

강수돌을 비롯해 여러 대안적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문제의 핵심은 '생산량'과 '성장'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지속적인 성장은 가능하지도 않고, 인간을 비롯한 자연에 끊임없는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풍부한) 부를 좀 더 공평하게 나누고, 경쟁적으로 소비하는 생활방식과 중독적인 삶의 양식을 과감히 떨쳐내는 것이다."

추상적인 구호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것만큼 확실한 대안도 없다. 결국 "노동 중독과 소비 중독이라는 쌍두마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인 세상을 고려하면, 중독에서 벗어나는 그 자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니 말이다. 강수돌은 개인 스스로 여유를 찾으려 노력하면서, 이웃과 함께하는 운동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종종 집 마루에 앉아 한가하게 지리산을 바라본다. 평화롭고 편안한 시간이다. 여전히 가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행복해 하는 자신을 스스로 검열할 때면, 끝없는 불안과 노동을 강요한 이 세상이 정말 강력하다는 걸 느낀다.

천천히 이웃과 함께하는 일을 찾아볼 계획이다. 마을신문을 만들어 볼까, 아이들 글쓰기 학교를 열어볼까 등등 생각은 많다. 아, 그리고 내가 사는 지리산 피아골에 댐 건설 이야기가 솔솔 퍼진다.

좋은 삶은 그냥 주어지지 않을 터. 여유롭게 살 권리 확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2010년 7월 31일 첫 호를 내고서 5년간 이어온 '프레시안 books'가 새 단장을 위해서 한두 달의 휴식 기간을 가집니다. 그간 '프레시안 books'는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좋은 책을 공들여 쓴 서평으로 독자에게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프레시안 books'는 더 적극적으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에 나설 예정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