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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정보기관 5.18 문서에 북한 개입 내용 없어"

[언론 네크워크] 팀 샤록 "5.18 미공개 기록 더 있을 수도"

5·18 기념재단은 이날 오후 3시 재단 사무실 내 영상실에서 재단 자문위원 및 교수, 부산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오월민주여성회 등 시민사회 관계자들을 초청해 '팀 샤록과의 대화'를 가졌다.

'팀 샤록'은 미국 유력 일간지 '저널 오브 커머스'(Journal of Commerce) 기자로 활동하던 지난 1996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을 주시하며 논의했던 정보와 미 최고위직들의 대화내용 등이 담긴 일명 '체로키 문서' 등 미 정부기관의 극비문서 2000여건을 정보공개법에 따라 최초 입수·공개한 저널리스트다.

1979년 박정희 죽음 뒤,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한국사태를 주시하기 위해 극소수 고위관리들로 구성한 비상대책반을 행정부 내에 꾸려 체로키(Cherokee) 팀이라고 명명하고, 이 팀이 인가된 사람 외에는 열람권이 없다는 뜻의 'NODIS'라는 특별 암호명으로 서울주재 미국대사관과 비밀교신을 했다.

체로키 팀에는 카터 대통령,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80년 5월초 취임), 크리스토퍼 국무부 차관,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보좌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스탠즈필드 터너 중앙정보국 국장, 도널드 그레그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책임자,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등이 소속되었다. 이 팀은 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뒤에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시민들이 무장한 것에 대한 후속조치를 논의했다.

'팀 샤록'은 이때 생성된 비밀문서 2000여 건을 정보공개법에 따라 입수, 12·12 이후 5·18에 이르는 행정부 최고 관리들의 생생한 대화 내용을 폭로했다.

▲ 5·18 기념재단은 20일 재단 사무실 내 영상실에서 재단 자문위원 및 교수, 부산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오월민주여성회 등 시민사회 관계자들을 초청해 '팀 샤록과의 대화'를 가졌다. 5·18 당시 미 국무부와 미 국방성 등의 극비문서를 입수해 최초 공개했던 팀 샤록(Tim Shorrock·63)이 20일 광주를 찾아 "5.18에 관한 공개되지 않은 기록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시민의소리

▲ 저널리스트 팀 샤록. ⓒ시민의소리


미국, 광주 민주화운동 때 군 동원 승인


이를 통해 미국정부가 전두환 정권의 12·12 군사반란을 묵인·방조했던 사실과 광주 민주화운동 때 군 동원을 승인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 1989년 미국 정부가 5·18광주 민주화운동 조사특별위원회에 '5·18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부대의 광주 동원에 대해 사전에 몰랐고 20사단의 이동사실을 승인한 적이 없다'며 보낸 공식답변이 거짓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팀 샤록이 공개한 광주관련 문건은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역판'(Kwangju Diary :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의 권말에 'Kwangju Diary : The view from Washington'이란 소논문으로 정리되었으며, 이 내용이 1996년 3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에 번역 소개됨으로써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민사회 관계자들과의 대화에 앞서 환하게 웃고 있는 팀 샤록. 그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 미 정부의 극비문서를 최초 입수·공개했던 미국의 저널리스트다. 팀 샤록은 이날 인사말에서 "초대에 감사하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광주는 수년 동안 가슴깊이 남아있는 도시다"면서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선교사로 재직한 서울에서 생활했다. 이 때 비록 9살이었지만 4.19를 목격했고, 이것이 기자로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팀 샤록은 이후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오리건 대학에서 한국경제에 관한 석사논문을 썼으며, 80년대 초반 한국의 노동·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리랜서로서 활동했다.

이후 85년 프로그레시브(Proressive)라는 잡지에 광주문제를 취급한 장문의 기사를 기고했고, 91년 '저널 오브 커머스'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있으면서 미국 국무부가 내놓은 광주사태 백서(White Paper)에 의문점을 가지고 추적하던 끝에 '체로키 문서'를 확보하게 되었다.

미 국방정보국에서 문서 대부분 수집

자료수집 과정을 묻는 질문에 팀 샤록은 "오랜 기간에 걸쳐 5·18 자료를 수집했고, 13년 동안은 자료를 받지 못해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면서 "특히 CIA문서는 가장 오래 걸렸고, 대부분의 문서는 미 국방정보국에서 수집했다. 미 국방정보국이 한국 군사정보와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자료 확보와 관련 그는 "5·18 관련 문서는 CIA, DIA(미 국방정보국), 미 국무부, NSC(미 안전보장회의) 등에 각각 따로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4개 기관에 개별청구를 했다. CIA가 가장 어려웠고, DIA도 꽤 민감했다"면서 "아직 확보하지 못한 백안관의 정책적 결정이 담긴 1980년 5월 21일 회의 자료가 주된 관심사다"고 말했다.

미확인 자료는 어느 정도인지,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5·18 관련 문서는 4개 기관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기 때문에 몇 %를 확보했다고 말하기 곤란하다"면서 "새로운 자료를 얻고 싶다면 정보공개를 요청하는 활동을 하면 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자료가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면서 "1961년 미국의 쿠바침공과 관련한 문서도 이제야 분류가 되기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5.18에 관한 공개되지 않은 기록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군 개입 내용 없어"

5.18 당시 북한군의 잠입과 활동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문서를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아울러 그는 "5.18과 관련 보고 싶고, 보지 못한 자료들이 많다. 미국 4개 기관에 더 있을 수도 있고, 여기(광주)에 있을지도 모른다"며 "현재 20박스 정도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고, 웹사이트에 PDF파일로 올려놨기 때문에 누구나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팀 샤록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문서를 입수·공개한 공로를 인정받아 21일 광주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는다.

프레시안=시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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