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보아온 김장 풍경의 주인공은 늘 여자다. 남자들은 여자들 곁에서 힘쓰는 일이나 거들다가 완성된 김치에 수육을 곁들여 술잔을 기울이는 게 고작이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도 김장을 진두지휘하는 건 여자고 남자는 여전히 심부름꾼 내지는 보조에 머물러 있다. 물론 남녀차별이 많이 줄어들면서 남자의 역할이 좀 더 늘긴 했지만, 김장을 주도하는 건 어디까지나 여자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김장을 하면 어떨까? 근사한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예감에 형제나 다름없는 남자 네 명이 뭉쳤다. 우리들의 엉뚱한 결정에 여자들은 킥킥 웃어가며, 어디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고 선선히 물러섰다. 여자들이 반대할까 봐 내심 걱정했던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우리가 김장 준비를 함께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년 전 우보농장에 모여서 함께 배추를 절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녁에 배추를 소금물에 담가 놓고 여관방에 둘러앉아 권커니 잡거니 이야기꽃을 피우다 아침에 각자의 집으로 절임배추를 날랐다. 배추가 제대로 절여지질 않아서 집마다 배추가 벌떡 일어나 따귀를 때렸다느니, 밭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느니, 여자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추를 다시 절이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우리에게는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됐다.
우리는 철학 강사이자 작가인 김경윤 형이 운영하는 청소년도서관 '자유'에서 김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진 술자리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정하고 준비물도 배분했다. 김장이 어쩌고저쩌고 여자들이나 나눌 법한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하며, 다들 설레는 표정이었다.
김장을 하기로 한 날이 가까워지면서 우리의 기대감은 더욱 부풀었다. 얼마나 재미난 이야기가 만들어질지 살짝 흥분도 됐다. 이윽고 김장 날, 우리는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들떴다.
봉일천중학교 아이들과 함께 김장 농사를 지었던 나는 학교 일정에 맞추느라, 배추를 미리 수확해 집에서 배추를 절여 놓은 뒤 도서관으로 넘어갔다. 배추를 수확할 때 김장 봉투에 배추를 차곡차곡 쌓고 소금을 켜켜이 뿌려둔 덕에, 배추를 절이는 게 여간 수월하지 않았다. 예년까지는 배추를 수확한 그대로 집에 가지고 와 배추를 자르고 절이는 바람에 거실이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소금물만 부어주면 끝이라 깔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형들이 김장 채소를 부려 놓고 있었다.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경윤 형이랑 배추를 절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배추를 절이는 동안 북디자이너인 이원우 형과 소설가 정화진 형은 쪽파를 다듬고 양파 껍질을 벗겼다. 다음날 도서관에 다시 모였다. 김경윤 형과 나는 잘 절여진 배추를 씻는 일을 도맡았고, 이원우 형과 정화진 형은 양념 만들 재료를 손질했다.
남자들끼리 김장을 하는 진풍경에, 이웃 노인들이 하나 둘 구경을 나왔다.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잘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라는 등 돌아가며 추임새를 넣었다. 지나가는 행인도 발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인가?' 하고 기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두 어깨에 힘을 팍 주고 일손을 재우쳤다. 구경꾼이 몰리건 말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가정을 둔 남자들이 여자들은 빼고 김장을 하는 건, 아마 우리가 전국 최초일 것이다. 이 얼마나 독특하고 발칙한 발상인가. 이런 일을 계획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김장 재료를 씻고 다듬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보람을 느꼈다. 배추·무·쪽파·갓은 말할 것도 없고 마늘·양파·생강·고춧가루까지 모두 우리 밭에서 나왔다. 돈을 주고 산 재료는 소금·젓갈·설탕 대용으로 쓴 과일이 전부다. 해마다 고춧가루는 사서 썼는데, 올해는 고추농사가 잘돼서 1년 먹을 양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김장 때 쓰려고 홍고추를 한 상자 따다가 믹서기로 갈아 냉동실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재료로만 따진다면, 늘 자급자족을 꿈꿔온 우리에겐 완벽하게 갖춰진 셈이다.
형들이 쪽파와 갓을 잘게 써는 동안 나는 다시마·고추씨·파뿌리로 육수를 내고, 방앗간에서 무·사과·배·마늘·생강을 갈아왔다. 무는 채를 써는 게 일반적이지만, 갈아서 쓰면 속을 바를 때도 편하고 양념도 아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방앗간에 다녀오면 재료 손질이 다 끝나 있을 줄 알았는데, 워낙 양이 많다 보니 형들은 칼질에 여념이 없다.
오후에 들어서야, 재료 손질이 모두 끝났다. 이제 소를 만들 차례다. 식힌 육수에 준비한 재료를 쏟고 까나리액젓과 새우육젓으로 간을 맞췄다. 완성된 소를 배춧잎에 싸먹었더니, 다들 엄지를 한껏 추켜세운다. 과일·양파·무를 갈아 넣은 덕에, 설탕 없이도 은은한 단맛이 혀에 감겼고 갈아 넣은 홍고추가 뒷맛을 시원하게 잡아줬다. 흡족한 맛이었다.
때맞춰 김경윤 형의 수업을 듣는 제자가 손수 만든 수육과 굴을 싸들고 응원을 왔다. 수육을 절임배추에 싸서 소주와 곁들이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하루의 피로가 단박에 가셨다.
우리는 수육으로 든든히 배를 채운 뒤, 포기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소를 바르는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손발이 척척 맞으니, 그야말로 일사천리다. 80포기 배추에 소를 바르고 통에 담기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뒷정리도 호흡을 맞추니 순식간에 끝났다.
우리는 각자의 몫에서 4포기씩 덜어 새로 한 통을 만들었다. 남자들끼리 김장을 하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우리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는 팽목항에 김치를 보내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차에 김치와 고무통 등속을 옮겨 싣고 나니, 전신이 뻐근한 와중에도 기분만은 최고였다. 이틀 동안 강행군하느라 수척해진 몰골에도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우리는 우르르 술집으로 몰려가 신바람을 내가며 술잔을 부딪쳤다. 우리 힘으로 김장을 무사히 끝냈다는 성취감에, 다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서로의 역할을 무용담처럼 주워섬기느라 시끌시끌했다. 옆자리에 손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행여 누가 우리 얘기를 들었다면, 꼴이 아주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우리는 밤늦도록 김장 얘기에 심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날 차에 실어 놨던 김치통을 베란다에 부려 놓으니, 한겨울이 다 든든했다. 배추김치 5통에 파김치·채김치·갓김치·깍두기까지 그야말로 김치 풍년이다. 거기다가 50리터 크기의 항아리에 담근 동치미를 생각하면, 겨우내 반찬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을 듯했다.
뚜껑을 열고 맛을 본 아내는 꽤나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남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도대체 뭔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피식거렸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우리는 왜 이런 짓을 돈 버는 것보다 좋아할까? 사실 주변에서 우리더러 푼수에 팔불출이라고 놀려대도 딱히 대꾸할 말은 없다. 더러는 이런 우리를 괴짜로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모습이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고 사는 게 즐겁다.
우리에게는 공통의 꿈이 있다. 5년쯤 뒤에 시골로 내려가 마을을 이룬 뒤, 서로를 보살피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 젊어서는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줄 알고 많은 날을 아등바등 죽살이쳤다. 그런데 먼 길을 돌아온 지금, 사람은 원래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서로를 더 많이 보살필 때 더 큰 힘이 나오고 그 힘으로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상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지난 이야기지만, 나를 포함한 김경우·이원우·정화진 네 사람은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여서 잘 헤쳐 올 수 있었다.
조금 엉뚱해 보이지만, 남자들끼리 모여 김장을 한 독특한 경험은 우리들에겐 마을을 이루기 위한 예행연습이자 그 힘을 비축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년에도 남자들끼리 김장을 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쌓아나갈 것이다.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4년 9월 현재 71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 바로가기 : 전국귀농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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