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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음을 줘야 교육이다"

[민들레] 교육·② 격려와 처벌

더 많은 교육철학자가 필요하다

"신은 태초에 바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습용이었다. 보다 진화한 신은 본격적으로 학교와 교육청을 창조했다." 19세기 말 미국의 교육 문제를 지적한 마크 트웨인의 뼈 있는 농담이다. 학교 제도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한 마크 트웨인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같은 소설에서 문명화된 죽음의 해독제로서 야생의 자연이라는 처방전을 제시한 점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정처 없이 유랑하는 소년 주인공 허크와 톰의 여정을 통해 위대한 야생의 자유를 예찬했다. "내가 이 섬의 대장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나 다름없었다"라는 허크의 진술에서 저 최초의 아이 아담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구하고 면면한 미시시피 강줄기를 따라 여행하는 허크와 톰의 이야기는 인생에 관한 유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교육의 본질에 관한 환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nature'라는 점을 자주 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저 허크와 톰이 그러했듯이, 인생도 교육도 깊은 고독과 한밤의 위험을 경험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모험의 여정인 것이 아닐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때의 모험은 소위 관광객의 여행과는 다른 고독한 산책자의 내면여행 같은 것이지 않을까. 어느 눈 밝은 현자가 "걷기는 내게 지식, 창조성, 에너지, 그리고 기쁨의 원천이었다"(비노바 바베)라고 말한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는 더 많은 교육철학자가 필요하다. 함석헌, 장일순, 이오덕 같은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답이 안 나오는 지금의 교육 현실을 돌아볼 때, 학교 담장 안과 밖을 동시에 사유하고 실천하며 철학과 방법론을 고민하는 교육철학자의 존재는 너무나 귀하다. 우크라이나 교육철학자 수호믈린스키(1918~1970)가 쓴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수호믈린스키 사상연구회 옮김, 고인돌 펴냄)을 보며 이런 생각이 더 든다. 자신의 조국 우크라이나의 한 초등학교에서 1948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교장으로 헌신한 수호믈린스키의 교육철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주어야 마음에 남는 교육이 된다.'

온정, 진심, 친절함을 강조하는 수호믈린스키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자연수업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교실 안과 밖에서 음악, 상상, 공상, 이야기, 창조성을 실천하는 교육을 온 마음을 다해 실천했다. 실천을 통한 배움을 강조한 미국 교육자 존 듀이와 비슷하지만, 처한 상황이 퍽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는 전쟁을 몸소 겪었고, 소비에트의 위성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살지 않았던가.

▲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의 근본을 묻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은 이제 교실에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진정한 교육에 필요한 것은 한 그루 나무


수호믈린스키는 톨스토이를 비롯한 슬라브의 교육 전통에 빚을 지고 있다. 폴란드 교육자 야누스 코르착(1878~1942)의 삶과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 게토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던 코르착은 전쟁 중 나치에게 잡혀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했다. 의사였던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수용소 측에서 혼자 살 수 있는 방도를 여러 차례 종용했으나, 그는 끝내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 죽기 직전 코르착은 "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코르착의 '거룩한 바보'(리 호이나키의 책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김병순 옮김, 달팽이 펴냄)에서 차용) 같은 행동이 젊은 교육자 수호믈린스키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밑바탕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의 오랜 동무이고, 동료이고, 동지일 때, 즐거운 배움의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교육철학을 자연수업에서 생생히 구현했다. 이 책의 진정한 재미와 묘미는 이 자연수업에 얽힌 무수한 에피소드라고 확언할 수 있다.

이 자연수업 또한 코르착의 흔적이 역력하다. 코르착은 말한다. "아이가 칠판을 바라볼 때 더 많이 배우는지 창밖을 바라볼 때 더 많이 배우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실제 자연수업 사례는 온전히 수호믈린스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면 사정상 자연수업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진정한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한 그루 나무이며, 교육의 목적은 한 그루 나무를 기르는 행위와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의 첫 수업은 교실 안에서 이루어져서도 안 되고, 칠판 앞에서 이루어져서도 안 되고, 반드시 자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지식에 대한 사랑(철학)은 경이로움에서 시작된다고 했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훌륭한 감정이 훌륭한 행동을 낳는다는 점에 대해 참조해야 마땅하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생각할 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바로 '평가' 부분이었다. 수호믈린스키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낙제점수를 주지 않았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관심을 두고 같은 과제를 여러 번 하도록 한 점이 퍽 인상적이다. 아이들이 처음보다 더 잘할 때 즐겁고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도록 한 것이다. 맙소사, 이 어머 어마한 인내심이라니! 평가 자체가 하나의 의례(ritual)가 되는 진짜 교육예술을 추구한 셈이다. 실제 단 한 명도 낙오되는 아이들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교육예술의 차원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교사들 사이에서 격려와 처벌에 대한 논의가 자주 벌어지고 있다. 이런 그럴싸한 이론들은 하루살이처럼 금세 생겼다가 또 금세 사라진다. 그 가운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격려와 가장 강한-그러나 늘 효과가 있지는 않은-처벌은 바로 점수이다. 점수는 능숙한 기술과 실력이 필요한 가장 날카로운 도구이다. 이 도구를 제대로 쓰려면, 무엇보다도 교사는 아이들을 좋아해야 한다. 말로만 좋아한다고 해선 안된다.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 수호믈린스키<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중에서

우리나라 공교육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때 미국 교육자 제시카 호프만 데이비스가 쓴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백경미 옮김, 열린책들 펴냄)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핵심은 '예술(교육)이 교육의 전면과 중심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이 주도하는 학교에서 예술이 더 이상 자기변호에서 벗어나, 교육의 전면과 중심에 등장하여 인간적인 가치를 배우는 따뜻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교육 내 예술(arts in education)의 아홉 가지 사례를 검토한다. 이 가운데 아츠 쿨투라(arts cultura) 사례는 학교와 지역을 잇는 차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처럼 학교가 지역 사회와 단절되는 현상은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학교와 지역을 잇는 아츠 쿨투라 교육과정을 사유하게 된 계기가 9·11 테러 이후 문화적 공동성의 필요성을 느낀 점이 퍽 인상적이다. 뉴욕의 몇몇 교사와 아이들이 구술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마다 문화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민족과 종교, 지역사회, 개별자에 따라 분리·수용하는 현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분리 수용은 문화적 분단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저자는 이러한 문화들을 보편적 인간성 측면에 연결하는 데 예술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확신했다. 10개의 특별하고도 유용한 학습결과 측면에서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10개의 학습결과는 상상력-작용 주체, 표현-공감, 해석-존중, 탐구-반성, 참여-책임 같은 짝패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이 표방하는 예술교육 옹호론이 우리나라 교육 관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갖게 될까. 제시카 데이비스의 예술교육 옹호론은 분명 설득력이 없지 않다. "시험, 사실, 양적인 측정, 그것은 과학이다. 교육이 시험, 사실, 양적인 측정을 넘어서는 길, 그것은 예술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교육 관료들이 목숨처럼 사수하려는 이른바 '평가'라는 항목을 돌파하지 못하는 한, 이 책이 표방하는 예술교육 옹호론은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리라는 점이다. 실제 우리는 예술교육 따위는 무시하는 학교 교육을 용인하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는 결코 교육 문제로만 해결될 수 없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된 점을 직시하려면 용기가 더없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냉소의 신화 앞에서

그런 점에서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펴냄)를 '아픈' 마음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엄기호는 이 책에서 교육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교육 불가능을 성찰하며, 이 폐허를 응시하려는 힘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 책을 보며, 나 또한 몹시 아팠다. 일반고 1학년인 아들이 처한 지금의 학교 상황이 답답해서 아팠고, 갈수록 '생활보수파'가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아팠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더 아픈 이유는 따로 있다.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서 무엇인가 해보려 해도 동료들이 같이 나서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그런다고 되겠어요?" 이 어쩔 수 없음의 냉소의 신화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 현장의 교사들이 다시 쓰는 우리 시대 교사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시청하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의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성급한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다. 토론과 숙의 과정을 통해 서로가 우정을 회복하고 새로운 정치의 차원을 획득해야 한다. 소위 모범생의 상처를 안고 있는 젊은 교사들과 선배교사들이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며, 소통 공동체를 형성하자고 한 엄기호의 제안에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그것이 바로 동료효과(peer effect)가 아닐까 싶다. 엄기호의 책을 보며, 찰스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마지막 문장을 나는 떠올렸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과 나의 인생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는 여러분과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무관심과 무감동이 난무하는 학교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시민성의 회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 안과 밖의 아이들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아이들을 위하여!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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