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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만 힘든가? 선생도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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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만 힘든가? 선생도 '노예'다!

[프레시안 books] 엄기호의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1.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엄기호 지음, 따비 펴냄). 처음 책을 훑다가 제목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아, 끝내 교사도!'라는 탄식과 함께 말이다. 어떤 장소가 두렵다는 것은, 그곳에 어떤 강력한 자장이 작동하고 있어, 갈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로움이나 고통이 엄습함을 뜻한다. 어릴 적 놀림을 당한 장소나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했던 장소, 박해나 사살이 이루어졌던 장소는 분명 두렵다. 그러니 학교가 두렵다는 말은, 공포와 고통의 낙인이 찍혀지는 장소가 다름 아닌 학교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아이들이 왕따를 당하거나 그런 아이들을 둔 학부모의 상처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교사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교사는 그래도 교육 현장의 가장 힘센 주체 아닌가. 교사가 학교를 두려워 한다는 건 교육이 끝났다는 말 아닐까. 물론 몇몇 뉴스만 떠올려보아도 교사의 일상이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학생들이 늘어져있거나 딴 짓을 하는 수업 붕괴에, 교사가 학부모나 학생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과중한 행정적 업무에 치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학교가 두렵다는 건 거기서 좀 더 나아가는 일이다. 우리는 어떨 때 직장생활이 두려운가? 상급자나 동료에게 지속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하는 일의 미래가 불투명하거나, 이 일을 계속하면 나의 자존감이 송두리째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아니었나.

그렇다. 이 책은 정확히 그런 세 가지 상황이 교사에게, 그것도 심각한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교사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막막한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근본적인 두려움이다. 메시지는 강력하다. 이대로 가서는, 이 사회의 소중한 가치들은 아이들에게 건네지기도 전에 매끄러운 교탁 아래로 미끄러져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경고다.

2.

▲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엄기호 지음, 따비 펴냄). ⓒ따비
저자는 교사가 겪는 두려움의 자장을 교실 상황-학교 조직-교사 문화라는 세 차원으로 구분한다.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교실 상황-학교 조직의 내용을 보자. 교사들은 교실에서는 아이들과의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고, 시험이나 갈등이 생길 때마다 학부모들에게 시달리며, 일상적으로 공문에 시달리거나 교장에게 일방적으로 야단까지 맞아가며 살아간다. 몇 가지 단편적인 예들만 보아도 교사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공문과 잡무. "공문은 학교마다 매년 5000에서 7000건에 이르며, 이 가운데 60퍼센트는 당일에 처리해야"(157쪽) 한다. 시급한 일에 쫓겨 중요한 일을 못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교사는 누가 보더라도 '교사로서 학생을 대하는 노하우'를 필요로 할 터인데, "교사 간의 협의가 필요한 일은 거의 다 근무 시간 이후에 진행"된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시험 문제로 낼라 치면, "공평하게 내기위해 앞뒷반 선생님이 안 가르치는 것으로 내기로 하"는 이상한 협상에 응해야 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갈수록 답답해지는데, 이는 구조적이기까지 하다. 즉, 교사 개인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은 수업에서 "널브러져 있"고, 시키는 일에 "내가 한 것 아닌데요"로 답하며, "그냥요"로 쟁점을 피해간다. 문제는 아이들이 학교이기 때문에 말을 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진단한다. "학생들은 개별 교사를 학교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 속에서 만난다. (…) 그러니 개별 교사가 아무리 친근하게 접근한다 해도, 그 교사의 진심을 학생들이 알고 마음을 열기는 그리 쉽지 않다."(98쪽) 아이들은 이미 학교에 대해 강한 선입견-반감-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교사가 그저 맑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열심히 만나는 것만으로는 교육적 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미 드리워진 강력한 불신의 막. 이것이 구조다.

3.

하지만 교사는, 아이들과 씨름하고 학부모들에게 된서리를 당해도, 거기에 더해 교장에게 비난을 받아도, 사실 '동료 교사'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 힘들거나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선배 교사에게 묻고 동료 교사와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버티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교사로서의 발달'이다. 그렇게 '좋은 교사'들이 커왔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교사 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다른 책과 '완전히' 다른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차례만 보더라도 교사 문화가 갖는 문제들은 쉽게 알 수 있다. '혼자 바쁜 교사들', '토론이 사라진 교무실' '교사, 교무실의 외로운 섬들, '벌떡 교사의 멸종', '무한책임과 무책임으로 나뉜 교무실', '꼴통편인 선배 교사 대 범생이 후배 교사', '같은 교사, 다른 신분', '침묵, 자신과 타인을 지키는 방법' 등등. 교사가 내부에서 균열되고 있고, 교사의 고립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가? 교육적으로 '옳다'라고 여겨지던 가치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때는 전교조가 하는 말이나 주장이 참교육을 위해 하는 옳은 말이었다. 이들은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아이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아이들에게 이름표를 달라는 지시를 하면, 아이들의 인권의 차원에서 고민하고, 그것이 교육적으로는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저절로 그렇게" 고민이 흘러갔다.

그런데, 이제는 전교조 교사가 "벌떡" 일어나 하는 말들을, 후배 교사들은 "평등주의를 내세우면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추구하는"(267쪽) 것으로 받아들인다. 학교에서 제시하는 교육 평가나 수업 평가에 사사건건 비판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아이들의 인권을 들먹이며 수업준비를 덜 하는 모습은 위선인 것이다. 20대 교사들은 '초초엘리트'로서, "의대가려다가, 법대가려다가 여기 왔다"는 과거에 대한 인정을 필요로 한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불만"도 가지고 산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교조 교사가 보기에 후배 교사는 지시가 떨어지면 "기계적으로 빨리빨리 만들어" 내는 효율 중심의 성과주의적 인간이고, 후배 교사가 보기에 전교조 교사는 "잘난 척은 지들이 다 하면서, 이름은 다 가져가"는 이기적인 집단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세대적-이념적 분열 속에서 교장을 중심으로 하는 리더십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기간제나 초빙 교사 등 다양한 교사군이 등장하면서 공동의 논의는 어려워지고 있고, 혁신학교 차원에서 도입된 초빙 교사제는 일반 학교로 일반화되면서 교장의 권력을 강화하고 자발적 순응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SNS를 통한 소통은 '아고라로서의 교무실'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통제는 한층 매끄럽고, 개인적이 되어가는 반면, 교사 간의 소통과 노하우의 공유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교육은 고도의 협력 활동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노동 과정이 결국 자발적으로 관료주의에 종속하게 되고, 노예 교육에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158쪽)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4시 30분만 되면 탁 페르소나가 바뀌"(284쪽)어 뮤지컬이나 공연을 다니는 '초초엘리트' 교사들은 '범생이' 외에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중견 교사들은 "컴퓨터도 일도 더 잘 못하는 내가 후임 교사 같다"는 자괴감 속에서 성과 평가의 틀을 버거워한다. 아이들은 누구와 어떻게 교육적 관계를 맺고 성장해 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답은 다시 고전적으로 '타자성을 수용하기' 정도로 제시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에 남학생들이 군대에서 실질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이유를 타자성의 체험으로 제시한다. 상당수의 아이들이 계급적으로 '다른 아이들'을 처음 만난 곳이 학교가 아니라 군대였고, 그것이 성장의 거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학습자의 이질성은 가르침과 배움의 패러다임으로 확장된다. 가르침과 배움은 '말함-들음'의 동일성 패러다임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타자성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만한다. 그것은 상대가 모른다는 것을 수용하는 일,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이는 교사의 타자성 수용으로 나아간다. 교사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너와 나의 다름'을 이야기하고 수용하는 것, 그 '평등한 이들의 우정의 정치' 에 입각한 대화가 유일한 열쇠라는 생각이다.

▲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저자 엄기호. ⓒ프레시안(손문상)
이런 대안은 보고된 현장의 심각함에 비해 다소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교육이 본래 동일성과 타자성의 변증적 발달의 과정일 것인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교육을 하자는 환원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일제가 뿌린 학교의 씨는 강고해서, 꽤 오랜 세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학교는 억압의 상징이었고 군대적 질서를 내면화하는 공간이었다. 교사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처음으로 교사의 자성과 전문성 발달을 제대로 논의했지만, 그 역시 '일방향적 가르침'이라는 동일성의 틀을 넘어서지는 못했던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면, 현재는, 지배가 극도로 노련하고 세련되어 가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이기는 하지만, '자아에 충실하고 자아가 건강한' 교사가 집단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최초의 시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기대한다. 책을 쓰는 '젊은 교사 집단'이 생겨나기를. 이 책의 제목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앞에는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 현장의 이야기'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 책은 '교사들을 인터뷰해서 저자가 쓴' 이야기이다. 교사가 아닌 저자의 지적 지배력이 여전하다는 말이다. 현장의 교사가 연구자와 함께 집필하고, 집필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는 제대로 된 현장 연구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날, 학교에는 드디어 교육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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