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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적다' 재벌 앓는 소리에 담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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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현금 적다' 재벌 앓는 소리에 담긴 비밀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을 해부한다 <2>

누가 돈을 좀 빌려달라 하면 본능적으로 방어형이 된다. "내가 가진 돈이 어디 있어? 가진 현금도 없지만 적금 붓는 것도 없고, 하다못해 보험 깰 것도 없어…." 물론 은행에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카드 결제도 해야 하고, 경조사 때마다 현금을 좀 찾아야 하니까. 하지만 누구에게 돈을 빌려줄 만한 처지는 못 된다. 아마 이게 대부분의 서민들 생활이 아닐까?

그런데 만일 재벌 2세나 3세가 와서 "내가 무슨 현금이 있어? 가진 돈 없어!"라고 말한다면 뭐라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 말은 맞는 얘기이다. 재벌 후손이 왜 현금을 들고 다니겠나? 그의 지갑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골드 카드들과 함께 각종 클럽과 골프장 회원권이 들어 있을 테니 말이다.

실제로 그들의 자산에는 은행 예금이 얼마 없을 것이다. 이자도 안 붙는 은행 예금에 왜 돈을 넣어두겠는가? 수익성을 찾아서 각종 펀드와 주식, 파생상품에 투자하고 있을 게 뻔하다. 하다못해 부동산에 투자해서 월세를 받는 게 은행 이자보다 몇 십 배는 더 받을 테니 말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현금이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사실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놀리려 한다는 점에서 분노하곤 한다.

10대 재벌 사내 유보금을 해부한다
<1> 500조 쟁여둔 10대 재벌 금고 안을 보면...
현금 별로 없다? 서민들 분노하게 만드는 재벌의 뻔한 강변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상장 기업(금융사 제외)의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 보유 비율이 9.3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는 △미국(23.7퍼센트) △일본(21.4퍼센트) △대만(22.3퍼센트) △유럽(14.8퍼센트)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

지난해 7월 17일, 한국경제연구원은 '사내 유보금 과세 제도 도입의 문제점과 정책 방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우리 기업의 현금성 자산 보유 비중은 주요 경쟁국에 비해 오히려 낮은 수준"이라며 이같이 주장한 바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는, 뻔한 거짓말과 꼭 닮지 않았는가?

'인사이드 경제'는 한국경제연구원의 주장을 반박할 생각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주장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줄 용의도 있다. 상장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 비율이 9.3퍼센트라니? 재벌 대기업들의 현금성 자산 비율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인사이드 경제'가 대신 입증해주련?

ⓒ오민규


한국을 대표하는 4개 대기업들의 2014년 감사보고서에 드러난 수치들이 위와 같다. (편의상 100억 이하는 반올림했음.)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의 비율은 1~5퍼센트대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주장하려는 바를 더 확실히 하려면 이렇게 대기업들만 보여줘도 현금성 자산 비율이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왜 무리하게 더 많은 상장사들 데이터를 합해서 더 불리한 수치를 거론한 것일까?

간단하다. 몇 개의 대기업만 가지고 수치를 구성할 경우, 어떤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가 너무 뻔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재벌 2세가 자기 지갑을 내보이며 "나는 현금이 없다니까~"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걸 누가 모르냐? 재벌 2세가 왜 현금을 갖고 다녀? 너 지금 우리 놀리는 거지?" 평범한 시민들조차 분노할 정도로 너무 뻔한 속임수가 되어 버린다.

친절한 '인사이드 경제'가 대신 설명?

은행에서 인출할 돈 100만 원 안팎으로만 가지고 사는 우리 서민들이야 고민할 게 없지만, 엄청난 자산을 가진 재벌 후손들은 걱정거리가 많다. "아, 이 많은 돈을 다 어디에 투자하지? 은행 예금에 넣어봐야 이자도 거의 안 붙는데 말이야. 음, 이건 저쪽 펀드에 넣고 저건 이쪽 파생상품에 투자하고, 음 그래 요즘 신도시 부동산 매물이 좀 있던데?"

개인이 이럴 정도인데 수십∼수백 조의 자산을 갖고 있는 대기업들은 오죽하겠는가? 당연히 이쪽저쪽 수많은 금융 상품들에 자산을 투입하는 게 정상이다. 위에 예시한 4개 대기업들의 감사보고서에는 '범주별 금융자산(금융 상품)' 목록이 함께 나와 있는데, 아래 표로 정리해 보았다. (앞의 표와 마찬가지로 100억 이하의 수치는 반올림했음.)

ⓒ오민규


각 기업별로 10∼24조 원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는데, 이 중에서 현금성 자산은 1조 원 안팎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수십∼수백 조대의 자산을 가진 대기업이 금융자산 전체를 현찰로 바꿔서 금고에 쌓아두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당연히 극히 일부만 현금성 자산(예금)으로 갖고 있고, 나머지는 다양한 금융 상품에 넣어두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상식 아닌가?

따라서 한국경제연구원이 주장하는 내용, 즉 한국 기업들 총자산에서 현금성 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적인 일이라 해야 한다. 오히려 금융자산을 현금으로 갖고 있는 게 이상한 현상 아닌가?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특히 대기업들은 '단기 금융 상품'이란 형태의 금융 상품 상당액을 보유하고 있다. 단기 금융 상품이란 1년 안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금융 상품을 의미한다. 사실상 현금이라고 주장해도 무방한 금융자산이라 할 수 있다. 회계 용어상 '현금성 자산'은 3개월 이내, '단기 금융 상품'은 1년 이내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금융자산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상 두 개념 모두 현금에 가까운 금융자산이다.

10대 재벌 자산 변화를 추적해보면?

독자들은 '인사이드 경제'가 도대체 왜 이렇게 현금성 자산, 단기 금융 상품 문제에 대해 말이 많은지 궁금할 것이다. '그래, 재벌들이 현금성 자산이 얼마 안 된다는 얘기는 엄살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알 것 같아. 하지만 도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사실은 '금융자산'이라는 항목을 미리 설명해두기 위해서 현금성 자산과 금융 상품 등에 대해 지루하게 설명을 했던 것이다. 사내 유보금이 논란될 때마다 재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내 유보금은 다양한 형태로 재투자되는 것이지, 은행에 쌓아두는 현금이 아니다."

'인사이드 경제'는 재벌들의 저런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직접 검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0대 재벌 상장사들의 회계장부 분석을 토대로 해서 검증을 시도해 보겠다. 우선 지난번 글에서 얘기했던 사내 유보금 액수부터 떠올려보자. 10대 재벌 97개 상장사 중에서 금융 계열사를 제외한 87개 기업들의 감사보고서에서 뽑아낸 사내 유보금 액수는 아래 표와 같다.

ⓒ오민규


요약하자면 2012년 10대 재벌 비금융 상장사들의 사내 유보금 총액은 407조 원 가량이었는데, 2년 뒤인 2014년 말 현재 사내 유보금 총액은 477조 원대로 70조 원 가량 늘어난 것이다. 사내 유보금 증가는 재무제표상 자본의 증가로 표시되며, 당연히 총자산의 증가에 기여하게 된다.

그럼 이번에는 총자산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도록 하자. 우선 재벌들이 '투자'라고 하는 항목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도록 하겠다. 만일 작년에 이윤이 많이 남아서 그 금액 중 일부를 올해 새롭게 투자한다고 하면, 그 투자분은 재무제표상에 '유형자산' 또는 '무형자산'의 증가로 반영된다. 그래서 '인사이드 경제'는 87개 기업들의 감사보고서에서 일일이 유형자산과 무형자산만을 합산해 이를 '투자자산'이라는 이름으로 종합해 보았다(아래 표).

ⓒ오민규


다음으로,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금융자산'만을 따로 떼어 합계를 내보았다. 아울러 '관계기업/종속기업 투자'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 자산도 별도로 떼어 합계를 냈다. 이 항목은 계열사들에 대한 주식 투자 지분을 뜻하는 것으로, 재벌 기업들끼리 서로 지분을 교차 소유하면서 총수 일가가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는 토대가 되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이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주식 투자 지분'이라 할 수 있다.

자, 그러면 2012년 이후 10대 재벌 비금융 상장사 87개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70조 늘어나는 동안, 이들 기업들의 총자산과 핵심 자산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아래 그림).

ⓒ오민규


87개 기업의 총자산은 2012년(759.15조) 대비 2014년(841.86조)에 82조가량 늘어났다. 같은 기간 사내 유보금이 70조 증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총자산 증가 대부분이 사내 유보금 증가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증가분은 일부 부채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번에는 총자산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산들이 늘어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실질적인 투자를 의미하는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을 합산한 '투자자산'은 지난 2년 동안 21조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 금융자산의 경우 무려 36조가량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열사들에 대한 주식 투자 지분 또한 같은 기간 동안 12조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투자자산과 금융자산, 계열사 투자 지분을 제외한 나머지 항목은 지난 2년간 13조 증가에 그쳤다. (기타 항목 역시 부채 증가에 따른 효과인 것으로 추정됨.)

재벌과 서민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이제 종합해보자. 10여 조에 달하는 부채 증가를 제외하면 사내 유보금 증가분 70조가 어디로 흘러갔는지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투자'에는 21조 원이, 금융자산에는 36조 원이, 그리고 계열사 투자 주식으로 12조 원이 늘어났다(21조 + 36조 + 12조 ≒ 70조).

'인사이드 경제'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실제 투자에는 30퍼센트만 쓰였을 뿐 나머지 사내 유보금은 대부분 금융상품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재벌들은 왜 저토록 일관되게 "사내 유보금은 대부분 재투자된다"고 주장하는 걸까?

그 이유는 '현금성 자산' 얘기를 했던 것과 똑같다. 그냥 말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현금성 자산은 3개월 내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산을 의미할 뿐이며, 1년 이내에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단기 금융 상품'과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금리가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재벌들은 '현금성 자산'을 늘리기보다 펀드나 파생상품 등 수익률이 높은 단기 금융 상품에 돈을 많이 넣어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회계 용어상 '현금성 자산'과 '단기 금융 상품'을 구분해서 부르게 되어 있다는 점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기업들이 현금을 얼마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투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벌들은 공장을 새로 짓거나 유지·보수하고, 새로운 특허와 상품을 개발하는 것만을 투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남는 돈으로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혹은 각종 파생상품과 주식을 사들이는 것도 '투자'라고 부른다. 즉, 단기 금융 상품에 수십 조를 쌓아두는 것조차 그들은 '투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앞에서 얘기한 '금융자산'이나 '계열사 주식 지분'이 늘어나는 것 역시, 재벌들의 입장에서는 모조리 '투자'가 된다. 그러니 재벌들은 "사내 유보금 100퍼센트를 재투자하고 있다"며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 '현금' 이제 이런 말에 더 이상 속지 말자. 사내 유보금 전체가 은행에 쌓이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액이 금융자산으로 쌓이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인사이드 경제'는 앞으로도 저들의 말장난의 본질을 파헤칠 것이다. 다음에는 금융자산이 어떤 방식으로 쌓여가는지에 대해, 개별 기업들에 대한 분석을 근거로 살펴볼 예정이다. 앞선 글에서도 당부드렸듯이, 다양한 의견 제시와 소통을 해주시라. 아차, 이번 감기 정말 오래가는 듯…. 독자 여러분도 각별히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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