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한 번도 아빠가 어떤 존재인지 배워본 적이 없다. 내가 경험한 아버지란 존재는 가부장과 보수, 억압의 상징이니, 아버지와 정반대로 아이를 대하면 될까? 그러다 후배가 빌려준 <예비 아빠의 철학>(티에리 타옹 지음, 고아침 옮김, 개마고원 펴냄)을 조금 읽다가, 이런 건 도움이 안 돼 하며 던져 버렸다.
나보다 더 갑갑한 이는 같이 사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도움이 될 만한 걸 같이 찾기 시작했다. <베이비 위스퍼>(트레이시 호그 지음, 노혜숙 옮김, 세종서적 펴냄)를 비롯한 각종 육아책도 뒤적거렸지만, 우리가 원하는 '실제' 정보는 거기에 없었다. 그 유명한 <삐뽀삐뽀 119>(하정훈 지음, 그린비 펴냄)도 언제나 "의사와 상담하세요"로 끝이 났다.
이렇게 키우면 잘 된다, 좋다, 이런 거 말고 한여름에 태어나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아이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책은 없었다. '아, 이 아이는 하늘이 내 마음의 바닥을 보라고 보낸 아이구나'라는 체념 끝에, 안고 있던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터지는 울음소리에 화가 폭발했다. 육신의 고단함은 정신의 위기를 불렀다.
엄마의 가슴을 후비는 절절한 이야기
남자인 내 몸과 마음이 그랬으니, 엄마로 살아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깊은 심연을 헤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엄마의 탄생 :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김보성· 김향수·안미선 지음, 오월의봄 펴냄)은 왜 이제 나왔을까 싶은 책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사회가 정형화시켜 놓은 엄마라는 존재가 어떤 상황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이 책은 알려 준다.
목차의 각 장 제목보다 그 장의 부제목들이 책의 내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1장 산후조리원, '엄마'를 찍어내다 : 엄마 노릇의 첫 교육장", "2장 '나'와 '엄마' 사이에 가로놓인 산후 우울 : 여성 스스로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할 때", "3장 육아 : 유아용품 광고가 만드는 '완벽한 아이' 신화", "4장 도시에서 아이 키우기 : 모성을 틀 짓는 공간의 문제", "5장 엄마가 깐깐할수록 아이는 건강해진다? : 엄마 혼자 짊어진 가족 건강의 책임", "6장 아기는 언제나 이벤트 중 : 상업적 프로젝트가 된 아기 의례들", "7장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늦어요! : 유아기까지 드리운 조기 교육 경쟁", "8장 일하는 엄마와 살림하는 엄마의 끙끙앓이 : '이상적 어머니'와 '이상적 노동자' 신화에 갇힌 엄마들"이라는 부제목만 봐도 지은이들의 의도가 전해진다.
그리고 책 중간마다 들어간 인터뷰는 지금 이 서평을 읽는 엄마들 누구라도 겪었을 법한, 가슴을 후비는 절절한 이야기다. 다른 어떤 책에서도 듣기 어려운 생생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여성은 사라지고 엄마가 된다.
"자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 이 1순위 목표가 되며, 여성은 '엄마'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 자녀를 위해 최적화된 상태로 몸과 마음을 조절해야 한다."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들었다. 모유 수유를 하다 보면 아이에게 우유를 공급하는 소가 된 느낌이라고. 처음에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걱정했고, 젖이 잘 나오도록 음식을 먹고, 젖이 나온 뒤에는 때에 맞춰 젖을 먹이느라 고생했다. 아이는 생리적인 리듬에 맞춰 반응하는데, 우리는 인공적인 시간에 맞춰 살아야 했기에 아이와 함께 자라는 건 아주 가끔(그렇지만 큰!) 기쁨을 얻는 고된 일상이었다.
지난해에 발표된 <한국의 사회 동향 2014 보고서>(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가사 부담률은 12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모성과 어머니를 강조하는 '한살림 정신'은 이렇게 만들어진 '엄마'를 거부한다고 하겠지만, 앞서 내가 아버지를 거부했던 방식과 다를까? '소비적 모성'이 등장한 시대에 한살림은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대안 없이 "사회 구성원이 맞닥뜨린 역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본질적인 어머니상만 강조"해서 "시대에 맞지 않는 가족주의를 공고히 하고 성별 분업의 가부장주의를 강화"하는 건 아닐까? 책이 엄마와 가족의 선택을 수동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다른 가능성을 서술하지 않는 면은 있지만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최저 임금이 곧 최고 임금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는 건 여성만이 아니다. 어렵게 함께 자라는 아이들도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일상은 누군가의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청소년들도 이런 노동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옛날처럼 '자수성가' 이런 말과는 거리가 먼,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또는 독립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아이들'이라는 말로 예쁘게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성인보다 더 가혹하게 일하는 세계가 청소년들의 노동 현장이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기획한 <십 대 밑바닥 노동 : 야/너로 불리는 이들의 수상한 노동세계>(이수정·배경내·림보·김성호·권혁태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를 보면, 수면 밑에 잠긴 또 다른 세계가 드러난다. 이미 뷔페, 택배, 배달, 편의점, 주유소, 식당 곳곳에서 청소년들이 일하고 있으니 노동을 성인의 몫이라 얘기할 근거는 없다.
제목이 이미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밑바닥 노동'이라니.
"청소년에게는 최저 임금이 곧 '최고 임금'인데다 그 적은 돈마저 벌금이나 위약금 같은 갖은 명목으로 떼이곤 한다. 다짜고짜 반말은 기본이고 막말과 고성이 쏟아지는 일도 잦다. 쉬는 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일하다 다쳐도 산업재해 보상은 하늘의 별 따기다. 오토바이 배달처럼 목숨 걸고 일하는 자리라도 감지덕지해야 하고, 느닷없는 해고를 당해도 조용히 접고 물러서야 한다."
노동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청소년 노동의 민낯이다.
사실 청소년들이 일하러 나섰을 때 누구도 어떤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지 알려주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법도, 노동권을 보호받을 방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은 언제나 '미래'로 유보된 존재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순간 '엄마'로 규정되듯이, 학교를 다닐 연령이 되는 순간 청소년은 '미래'로 규정된다. 이래서는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새누리당 식의 발상을 벗어날 수 없다.
청소년은 '미래'가 아니다
책이 말하듯이 "청소년을 '미래의 노동자'가 아닌 '지금, 여기, 바로 우리 곁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로 바라볼 때, 청소년이 실제 경험하고 있는 노동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청소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 우리 성인들이 나서자, 이런 관점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보시킬 뿐이다. 사실 성인들 역시 힘의 관계에 들어가면 다른 누구에겐 청소년과 같은 지위 아니던가. 그러니 청소년들을 동등한 주체로, 연대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에만 청소년들의 노동 시장이 아니라 전체 노동 시장이 바뀔 수 있다.
노동절이다. 엄마와 청소년들은 누구의 손을 잡고 연대할 수 있을까?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진정한 총파업이려면 이들과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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