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정치 토론을 하다 보면 저마다 '선진국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호출하는 꼴을 흔히 보게 된다.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를 시작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한 나라들의 '상식'을 보편성으로 간주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들기 마련이다.
지금은 상당 부분 무력화되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 담론의 일각을 점유했던 진보 담론은 이 문제를 '미국적 상식'과 '유럽적 상식'의 대립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는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고 쇠퇴했던 그 시기에 온전히 포개진다. 비록 진보정당 운동과 뉴라이트 운동의 주체들은 '유럽적 상식'에 비해 훨씬 좌익적이었고 '미국적 상식'에 비해 훨씬 우익적이었지만 그 담론의 향유자들은 그 정도 영역에서 논의를 한다고 믿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선진국의 기준'이란 것조차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야"라는 식의 발언은 (한국 사회의 징병제) 군대에 대해서도, 선진국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통제의 양상이 다를 뿐 '이상한 사람들의 해괴한 주장'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선진국들의 현실태가 아니라 그 이상태에 대한 파악과 전망에서 우리는 '선진국의 기준'이란 것을 공유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조차 흔들리는 시대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됐을 때,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칼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前) 통진당 잔존 세력이 발악하는 것은 예상했던 대로다. 자유가 어떻다느니, 독재가 어떻다느니 하지만 대한민국만큼 늘어질 정도로 방만하고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미국도 나라의 안보를 해치는 일이면 고문도 하고, 도청도 하고, 추방도 한다. 그것을 국민이 용납한다. 우리는 분단된 채 이념적 대치 상황에 있는데도 관련자를 고문했다 하면 정권이 넘어가고, 도청했다 하면 정치가 마비되는 나라다."
<조선일보> 극우 논객들이 '선진국의 기준'을 '왜곡'하는 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제 이 현기증 나는 서술은 '거짓말'로 치부하기에도 찜찜하다. 김대중 주필이 말하는 미국도 미국임이 분명하다. 유럽은 다르다고 자위해 볼 수도 있겠으나 최근 진행된 우경화가 IS 발흥 및 잇따른 테러와 맞물려 역시 상황이 심상치 않다.
세계에 해악을 끼친 머독 '미디어 제국'…2015년 한국을 비추는 거울
불편한 부분은 더 있다. 옮긴이 안성용은 이 책을 "단순히 한 명의 부도덕한 기업가가 권력과 부를 축적해온 과정에 관한 이야기"(344쪽)로 보기 어렵다면서, "이 책이 동시대 한국인들에게 미세하지만 강력한 울림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도 진행 중인 포퓰리즘의 글로벌 트렌드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344쪽)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즉,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종편 방송에 대한 우려와 별개로 이해하기 어렵다.
'머독 제국'에 관한 서술은 이 영어권 국가들과 한국 사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듯하다. 저자는 저술 곳곳에서 루퍼트 머독 개인이 어떻게 자신이 소유한 많은 언론사의 논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한국 사회에서라면 언론사주가 언론사의 논조를 결정한다는 일쯤은 '상식'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또, 언론사주 2세인 루퍼트 머독의 자녀들 중 몇몇은 머독과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라면 물려줄 것이 많은 부모가 제 자녀의 정치 성향을 훨씬 쉽게 통제했을 것이다.
좀 더 의미 있는 차이도 있다.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사업은 엄청난 이윤을 내고 있다. 이 책의 서술에 따르면, 머독은 그 이윤의 상당 부분을 신보수주의 성향(우리는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쓰지만 레이건을 추종하고 대처를 지지한 이 언론사주는 '자유주의자'들을 혐오하기 때문에 '신보수주의'라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린다)의 정치인과 싱크탱크와 이윤이 나지 않는 종류의 언론 매체에 기부한다.
아마도 언어권의 크기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현재 한국에선 신문 산업뿐 아니라 방송 산업의 신규 진입자들 역시 제대로 된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종편 방송은 시청률의 측면에선 착근했다고 보이지만 이 역시 광고 수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보수 언론의 구성원들조차 "60대 이상이 많이 봐서야 구매력이 없으니 돈이 안 된다. 빚내서 거대한 경로잔치를 여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시장에서 이윤을 얻지 못하는 대신 그들은 정치권력을 압박하여 특혜를 챙기려는 경향이 있다. 저자인 맥나이트는 시장 지상주의자인 머독이 자신의 기업을 자녀들에게 상속하려는 것이 '모순'이라고 꼬집지만, 그런 차원에서라면 한국의 족벌 언론사주들은 매 순간 모순을 범한다.
이러한 '차이'는 머독의 미디어 제국이 영향을 끼치는 영어권 사회가 한국 사회의 과거인지 아니면 미래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신문 산업의 사양 기조에서 시작된 종편 방송이란 프로젝트가 지속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현재의 언론사주들이 철수하고 다른 자본이 진입한다 해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머독이 만들고 유포한 신보수주의자들의 논리를 듣다 보면 심지어는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을 범죄자 취급하고("머리는 좌익 인사와 지식인들은 줄곧 범죄가 중요한 사회문제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마거릿 대처가 물러나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굴었다고 말했다." 180쪽), 화석연료와 지구온난화의 상관성을 별다른 근거 없이 부인하고("폭스 뉴스는 기후 변화 문제를 대등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과학자 집단 사이의 문제로 규정하기도 했다." 287쪽), 심지어는 에이즈와 HIV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동성애 성향에 에이즈의 책임을 떠넘긴다("<선>은 오직 마약중독자와 게이, 양성애자, 오염된 혈액을 수혈받은 자들만 에이즈에 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89년 <선>의 한 기사는 '이를 제외한 모든 가능성은 다만 동성애자의 선전일 뿐'이라고 말했다." 164쪽). 호주에서 머독의 매체는 개척자들이 원주민에게 폭력적이었다는 역사 인식이 그릇된 통념이라는 견해를 유포했다("키스 윈드셔틀의 이 책은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에게 폭력적이었다는 기존의 역사 인식은 좌익 역사가에 의해 광범위하게 왜곡된 것이며 대부분 거짓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31쪽). 신보수주의자들은 1980년대 내내 소련이 더 강해진다고 믿고 있었고 고르바초프의 개혁도 사기라 생각했다는 서술("머독과 마찬가지로 <타임즈>도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어떻게 전체주의 시스템에서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150쪽)에선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 저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답답해지기도 한다. 머독과 그의 신임을 받은 논평가들은 자신들을 통념에 저항하고 기득권층과 싸우는 아웃사이더라고 믿었다. 한국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은 실제론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을 기득권 세력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모든 이가 '피해자연'하는 것이 일탈적 현상이 아닌 민주주의 사회의 담론 투쟁의 한 모습이라면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사회 개혁의 방법론이 심각하게 고민된다.
하지만 기득권층과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 혐오를 에너지로 삼는 이러한 포퓰리즘적 선동은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위험하다. 이러한 선동이 지속된다면 중간 지대에 있어야 할 '상식'의 영역이 사라지고 언론 지형도나 담론 지형도가 양극화될 수밖에 없다. 대중의 증오가 지속되고 생활은 개선되지 않을 때 자연히 그들은 진짜 기득권층에 대해서 분개하기 시작할 텐데, 그때에도 극좌들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우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통치'에 안주하고 있는 건 한국이나 세계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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