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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열풍에 담긴 꿈, 707명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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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열풍에 담긴 꿈, 707명이면 족하다

[프레시안 books] 주요섭 <전환 이야기>

막장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TV 프로그램 '삼시세끼'가 시청자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 프로그램의 위대함은, 흔히 얘기되듯이, PD의 능력도, 출연자의 요리 솜씨도, 강아지의 재롱도 아니다. 그 방송을 시청한 사람들이 위대한 것이다. 대중은 과거처럼 권력이나 매스미디어에 의해 무기력하게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자신만의 방법(민중도, 시민도 아닌 대중적 방법)으로 체제에 저항한다. 그중 하나가 '소비'이다. 특정 소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그것을 통해 문화를 어느 방향으로 유도하여 체제를 변화시킨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대중이 아니라 민중이나 시민이다.) 무의식과 욕구로 인해, 즉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 때문에 현재 한국에선 시장이 국가보다 더 진보적이다. 현 한국 정부는 최악의 상태라, 달리 그 어느 것과 비교해도 바닥이지만, 어찌됐든 이익 추구 집단인 기업이 국가보다 오히려 더 진보적일 정도가 되었다. 예컨대 공영방송보다 상업방송이 더 공정하고 유익하다. 시장은 사람들의 욕구를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수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JTBC가 손석희를 앵커로 쓰고, tvN이 자급자족 농어촌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지금 '공정함'과 '소박함'에 목말라 있다.

자급자족의 시대

ⓒ모시는사람들
이를 볼 때 바야흐로 이제는 '자급자족'이 답이다. 이것이, 전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이자 현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인 주요섭의 저서, <전환 이야기>(모시는사람들, 2015년 3월 펴냄)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삼시세끼'의 인기가 말해주듯, 지금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삶을 꿈꾼다. 그것은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멀리서 오는 상품은 그 거리만큼 화석연료를 태우고 그 시간만큼 방부 처리를 한다. 제빵사들이 거의 모두 알레르기로 고생하는데 그것은 농약 범벅에 방부 처리한 수입 밀을 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프던 제빵사가 유기농 국산 밀 가게로 옮기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만지기만 해도 병에 걸리는 그런 빵을 우리는 수시로 먹고 있다. 따라서 해답은 근거리 식품을 이용하는 것이다. 각 지역이 주변에서 먹거리와 생활용품을 공급받는 작은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농촌을 배후에 끼고 있는 소도시'가 이상적이라 했다. 간디의 꿈이 70만 개의 마을 공화국이라고 한다. 작은 공동체여야 직접민주주의도 가능하다. 생태주의자들은 분권화를 주장한다. 한 마을의 독특한 자연, 사회,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져 최적의 지속 가능한 상태를 낳는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과거 우리는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저자도 언급했듯이, 이는 중국 농민과 필리핀 농민이 비교 우위에 따라 서로 목줄을 누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돈이 된다고 해서 하나의 상품을 집중 생산하는 것은 그 지역에도 위험하다. 가난이 시작되는 지름길이다. 흉작이 되거나, 가격이 떨어지거나, 판로가 막히면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식량 안보'란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커피만 생산하던 마을이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커피 외에 곡물, 채소, 과일을 심자 삶의 질이 나아졌다는 보고가 있다. 자급을 위한 곡물 심기가 가난 극복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 주민의 기본 생존은 보장되고 여러 작물의 재배로 땅도 다시 비옥해진다. 기후 변동에 따라 농작물이 각기 다른 반응을 하므로 흉작의 피해도 덜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사람들은 벌써 '전환'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저자는 그 징후를 협동조합, 귀농·귀촌, 힐링 열풍으로 잡았다. 실제로 그 변화는 심상치 않다. 협동조합의 수가 현재 6251개라고 한다. 소비자생협의 조합원 수는 2013년에 이미 60만을 넘어섰다. 한살림만 해도 2013년 말에 소비자조합원이 41만 세대, 농민생산자 회원이 2000세대이다. 이용액이 3000억 원이며 실무자와 활동가가 2000여 명이다. 또한 사회적 경제가 확대되고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을 정부와 시민사회가 돕겠다고 나서고 있다. 귀농·귀촌인의 수가 이촌·이농 인구를 넘어섰다. 힐링 열풍은 온갖 것에 '힐링'자가 붙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복지를 넘어 관계의 회복으로

자급자족은 잃어버렸던 공동체적 삶도 부활시킨다. 이제 우리는 '복지'를 넘어 '관계'를 생각할 때다. 관계 회복, 공동체 회복이야말로 진정한 복지다. 전 도봉시민회 대표 정보연에 의하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공동체 회복이 필요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로제토 마을의 주민은 다른 지역의 주민보다 훨씬 건강하고 장수했는데 이들은 건강한 음식을 섭취한 것도, 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으며, 담배도 많이 피우고 비만율도 높았다. 그들의 특징은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마치 마을 전체가 한 식구인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마을 구성원이 점차 다른 미국인들처럼 변해가자 그들의 건강은 미국인 평균치로 나빠졌다고 한다. 따라서 관계의 회복은 우리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이웃의 과도한 간섭이 두렵다.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의 공동체가 개인을 구속하고 개성을 억압했다면 새로운 공동체는 '개체성을 살리는 자유의 공동체,' '개체 안의 정체성과 신명을 길러주고 고양하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처럼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 확인하고 왜 시집·장가를 안 가는지 참견하고 괴롭히는 공동체라면 '노 땡큐'이다. 저자는 제시하는 대안적 모임인 '민회'처럼, 공동체는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경청하고, 배려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저자는 이제 '개인'을 중시해야 한다고 한다. 조직화도 옛날처럼 "뭉텅이 대중을 움직이는 20세기식 선동으로는 안 된다." '대동단결(大同團結)'이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게 자기실현하면서도" 서로 호혜의 그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그는 새로운 운동의 조직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면서 공동체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것이 아마도 앞으로 공동체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지난 호인 <모심과살림> 4호의 특집도 "'나'를 살리는 공동체"였다. 사적인 시공간이 보장되면서도 주민들 간에 즐겁게 친교를 맺는 공동체. 아마도 마포 성미산마을이 그러한 모델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미산마을의 한 주민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른 퇴근해서 '마을에 가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신성한 경제

관계의 회복은 마을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에 의하면 경제는 본래 생태의 일부이다. ecology(생태)와 economy(경제)는 모두 eco로 시작한다. 즉 경제는 삶의 일부, 생명의 일부로서, '신성한 것'이다. 최근 번역된 아이젠슈타인의 책 제목도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이다. 물품은 신성한 것이며(동학은 일찍이 이를 주장했다) 시장도 신성한 곳이다. 저자에 의하면 '시장(市場)'의 '장(場)'은 본래 '신을 모시는 곳'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신성함을 몰아냈다. 따라서 이제 시장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사고파는 관계에서 주고받는 관계로, 경쟁에서 협력으로, 경쟁적 관계에서 호혜적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책임지는 상호부조여야 한다.

협동조합 내에서 이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가격은 수요·공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럼에도 분쟁의 발생 소지는 거의 없다. 왜냐면 생산자, 소비자, 두 집단은 사실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사과 생산자이며 동시에 쌀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사과의 가격을 결정하는 조건이 쌀의 가격을 결정하는 조건과 같다. 교환 행위의 원리는 상업적인 것이 아니며 호혜적이다. 자급자족적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쌀을 생산하는 농부는 동시에 옷을 구매하는 사람이며, 옷을 만드는 사람은 동시에 쌀을 사는 사람이다. 이 둘은 상대방을 살려야 각자 자신이 잘 살 수가 있다.

자급자족 공동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환이 아닌 호혜적 경제활동을 많이 한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지어 식구를 먹이고 청소를 한다. 이메일이나 문자를 통해 지인의 안부를 묻는다. 안 입는 옷을 재활용함에 넣는다. 친구를 만나 밥을 산다.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을 낸다. 우리의 생활을 보면 사실상 실제로 순수 교환이 목적인 행위는 극히 일부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기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다. 돈을 벌기 위해 식당을 운영한다고 하지만 음식이 맛있다는 손님의 말에 보람을 느낀다. 다들 '이 맛에 장사한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시장을 통한 교환은 보편적인 경제 형태가 아니며 인류에게는 시장과 더불어 재분배와 호혜라는 경제 형태가 존재했다고 한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기 위해 최소한도로 일해야' 한다. 저자는 '반(半) 백수'로 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물론 정규직 확대를 주장해야겠지만 그와 동시에 대기업 취직을 이상시해서도 안 되겠다. 이제 자본주의는 한계에 다다랐다. 유효 수요는 더 이상 없으며 저성장의 길만이 남았다. 개혁(죽어가는 자의 연명에 불과), 전쟁(공멸), 전환(재탄생)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통일 대박'도 연명의 방법에 불과하다. 어차피 '무한 소비 - 무한 생산 - 무한 축적'은 비정상의 암적인 성장 경제였다. 저자는, 이제 '정상계의 경제(steady state economy)'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적은 노동과 적은 소비가 답이다. 케인스와 마르크스의 꿈도 적은 노동과 많은 휴식이었다. 저자는 한 사람이 하루에 3시간만 일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모든 이가 일해야 한다. 즉 놀고먹어도 되는 무임승차자와 일자리가 없는 실업자가 없어져야 하므로 동시에 공평한 사회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덜 벌고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노는 것이 필요하다. 최신 첨단 기기와 명품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죽어라고 일을 한다. 이는 과시욕 충족에 불과하다.

음식은 직접 농사지어 요리해서 먹고, 옷도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아이와 노인을 직접 돌보고, 병과 죽음에 대해 수용적 태도를 가진다면,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 인터넷을 보면 이미 많은 이들이 직접 농사짓고, 요리하고, 집과 가구를 손수 고치고 만들어 자랑스럽게 보여주고자 한다. 'DIY 시대'인 것이다. 이때의 노동은 오락이고 창작이며 예술이고 사랑이다. 저자는 노동시간 단축이 지구촌 복합 위기를 '한 방에 해결'하는 비법이라고 말한다. 이는 또한 최근 유럽의 대안적 경제 연구소의 해법이라고 한다. 일자리를 나눠 실업 문제도 해결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며, 충분한 여가를 즐긴다. 이제 우리는 노동은 그만하고 마실 다니면서 놀아야 한다. 노동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 신성한 것이다. 왜냐면 놀면 '신'나기 때문이다. 신나게 놀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나중에 일베 회원이 되고 사이코패스가 되고 존속살인을 하고도 태연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일베 회원을 조사해보니 모범생들이 많다고 한다.) 어릴 때 놀지 못해서 신나보지 못하면 마음속 영성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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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전환을 이룰 것인가. 분명한 것은 권력 교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1인 1표, 다수결, 의회 민주주의는 얕은 민주주의라고 본다. 이것을 통해서는 사회 변화를 이룰 수 없다. 저자는, 본래 모든 존재가 하나였음을 강조하는 생명운동과 결합된 생명 민주주의, '모심의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관심을 주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치에서도 관계성의 회복이 중요하다. '남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민주주의,' 무위당(장일순)의 말대로 '그대가 바로 나'임을 아는 민주주의, 수운(최제우)의 깨달음대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민주주의다. 자유, 평등에 이어 박애가 강조된 민주주의다.

정권 교체를 통한 전환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서 혁명이 대안으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혁명이나 개량과 다른, '진화적 재구성'을 주장한다. 전복이 아니라 중심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천이(遷移)'로 전환을 설명한다. 천이란 새로운 종이 나타나고 그것이 확산되어 결국 전체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소나무 숲이 자연적으로 참나무 숲으로 바뀌는 이치다. 과학자 그렉 브레이든에 의하면 인구의 1퍼센트의 제곱근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깨어나도 변화의 시초가 될 수 있다고 한다. 5000만 인구라면 707명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이 '이매지널 셀(imaginal cell)'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매지널 셀은 직역하면 상상 세포인데, 이는 고치에서 나비로 되는 성충 세포를 의미한다. 즉 나비의 형상을 기억하는 세포다. 이 말은 고치가 나비가 되는 것은 상상을 통해서라는 것을 의미한다. 707명이 상상 세포가 되어 새 시대를 열 수 있다. 과거의 모든 혁명도 처음에는 소수의 몽상가들이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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