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력은 인식을 거부한다
천안함 사태가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후손에게 관련된 모든 비밀이 다 밝혀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월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월호의 기억을 후대에게 이어가야 하며,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을 누구나 다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주변 상황을 보건대 우리들이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 누군가는 많이 알고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차이는 권력의 소유와 깊게 연관한다. 권력 집단은 집단 구성원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비밀이 많은 권력일수록 그 권력은 독재 권력에 가깝다.
현대사에서 수많은 국민들의 실종 사건에 직접 연관한 1970∼1980년대 남아메리카의 독재 권력, 절대 황제를 꿈꾸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종교를 가장한 독재 정권, 한국의 1970∼1980년대 군사 정권이나, 음모론과 일급 국가 기밀 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미국의 정보 권력 등등 그들은 모두 국민들로 하여금 사실의 공유와 진실의 인식을 차단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 권력 집단 혹은 권력자는 사실 인식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거짓을 진실처럼 억지로 믿게 하려는 굴절된 통치술을 정착시키려 했다. 굴절된 통치술의 핵심은 사실 인식 대신에 허구의 믿음을 슬쩍 대체한다는 데 있다.
믿음의 대표적인 장르는 종교와 신화이다. 전지전능의 신을 최고의 권력자로 모시는 사람들은 오로지 신만이 전지(全知)하여 모든 인식과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신은 스스로 모든 지식을 소유하지만, 신 아래 모든 존재들은 그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은 신이 제공해준 종교적 도그마만을 믿어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믿음 체계가 현실 권력 집단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의 정치권력자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그들의 권력을 확충하기 위하여 종교나 신화의 믿음 체계를 정착시키려 한다. 욕망의 동반적 실현은 자연적이지만 특정 개인만의 욕망은 집단 전체의 존속을 위협한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권력자 개인이나 소수집단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다수를 희생시켰던 독재 정권, 무력 통치, 전제 권력 등의 권력 구조를 지녔던 사회는 모두 단명했었다. 개인 욕망과 축재의 수단이 된 권력, 그리고 사물의 언어와 삶의 문법을 지배하려는 통치는 앎의 공유를 배제하고 소통의 대화를 배격하는 특징을 지닌다.
2. 소통을 위한 인문학 : <테아이테토스>
앎의 공유와 소통의 대화를 실현하는 일은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첫째 조건이다. 그 첫째 조건을 실현하려는 최초의 문화적 변동은 2500여 년 전 신화의 시대를 헤쳐 나와 드디어 인식론의 철학을 잉태시켰다. 앎이 무엇인지를 묻는 최초의 철학이 바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이제이북스, 2013년 11월 펴냄)이다. 억측과 믿음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며, 제대로 된 인식을 찾는 진실의 길이 있음을 밝힌 그리스 고전이다.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된 <테아이테토스>가 나왔다. 나는 이 책이 막 출간되던 1년 전에 책을 구입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고전은 말 그대로 고전이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진 수많은 해석과 주석을 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해석과 주석들을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해석과 주석을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한 순우리말로 풀어주고 있다. 나아가 옮긴이 정준영은 기존의 해석들을 염두에 둘 필요 없이 자유롭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라고 권유한다. 기존의 선입관에 구애받지 말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읽어 가면 된다고 했다. 고전이라는 압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평자는 자유로운 독서를 통하여 오히려 인식과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이 책에서 읽게 되었고, 그런 인식과 믿음의 차이가 현실의 권력 사회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접하게 되었다. 고전은 지난 과거의 글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알아차리는 생각의 초석이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저기 동떨어진 지식의 향연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현실 한국 사회의 난국을 풀어갈 수 있는 토대라고 보면 좋다. 요즘 '인문학'이라는 구호가 무성하게 나도는데, 인문학의 이름을 걸고 변죽만 울리는 화려한 잔치 대신 차분히 앉아 고전을 읽는 게 더 낫겠다. 고전을 읽으면 개인의 행복한 삶에 더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체적 아픔을 줄이는 데에도 현실적으로 더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테아이테토스>는 플라톤 철학의 인식론을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서평자는 <테아이테토스>를 철학에 국한된 고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되는지를 보여주는 사유의 발생학으로 친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가서 서구 철학을 정착시킨 철학자로서 플라톤을 들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철학을 미리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철학 개론에 나오는 플라톤의 개념들을 미리 짐작하고 있으면 거꾸로 이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 책 <테아이테토스>는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문학적이라는 점을 옮긴이 정준영이 말한다. 그리고 드라마의 요소도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은 교조적이고 일방적인 강의를 실은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하여 비논리적이거나 문맥과 다르거나 거짓이거나 모르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자기-깨달음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적이고 문학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와 테아이테토스의 스승인 테오도로스이다. 소크라테스의 화법이 산파술로 많이 비유되는데, 그런 대화법은 바로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산파술이란 진실을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실을 찾아가게 해주는 생각의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말이 진리라고 떠들어댄다. 그런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남들을 가르치려 하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 진리의 기준을 결정한다. 이 책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그런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말들이 개인의 억측이고 남들에게 강요하는 믿음의 언어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우리는 이 책 가운데 인간척도설을 비판하는 이야기로부터 산파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이 비난한 인간척도설이란 인간의 생각이 곧 세계의 진리를 기준 짓는 척도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던진 인간척도설 비판은 오히려 더 포괄적이다. 사람마다 다른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 비판이 핵심이다. 플라톤이 당시 인간척도설을 비판했던 이유는 어떤 사람의 주장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획일적 기준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다. 즉 한 사람의 척도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인간척도설 비판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148쪽). 대통령부터 오로지 자기 말만이 세상의 척도라고 하는 소통 부재의 사회에서 우리들이 잘 새겨야 할 이야기인 듯하다.
3. 지각되지 않는 것도 보기
플라톤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각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어쩌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각과 감각은 운동하는 사물을 파악하도록 적응되어 있다. 움직이는 사물에 적응된 지각 능력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바로 기억 능력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다른 작품에서도 기억(anamnesis)을 자주 들먹였다. 플라톤은 감각 작용으로서 혹은 본능으로서 기억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단지 기억과 앎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앎은 기억을 기초로 하지만 기억에 갇혀 있으면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19쪽). 우리는 아주 먼 조상 때부터 기억을 통해 해와 달,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파악하고 어디에 사냥감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알곡이 잘 크는지의 지식을 획득하였다. 이런 지식의 획득으로 변화 운동하는 세상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일식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는 지식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그런 지식을 악용하여 권세를 확장하기도 했다. 홍수와 태풍이 계절에 따라 거의 같은 시기에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마을은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마을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여 더 풍요롭고 더 번창할 수 있었다. 여기서 두 가지 문화적 변화를 맞게 되었다. 하나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발생하며, 권력의 독점은 지식의 독점에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려면 지식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해와 달과 태풍과 홍수이며 일식과 알곡의 성장이지만, 해와 달이 변하고 태풍과 홍수가 일어나는 주기성과 반복성의 원리는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지각되는 것만을 보는 사람이 있고, 지각되지 않는 것까지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지각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발달되면서, 인간의 역사는 이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그런 시대를 연 것이 철학이며, 그런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 <테아이테토스>이다.
4. 인식론의 기초
감각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까지 지각(넓은 지각)하려면 우선 정지된 상태를 파악하고 포섭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만물은 유전하지만, 흐르는 것 속에서는 결코 진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바로 <테아이테토스>의 핵심이다. 플라톤은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설을 비판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만물이 유전(流轉)한다는 현상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유전하는 현상에서는 사물에 대한 진짜 인식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유전하는 것에서 인식이 어렵다'는 생각은 그 말이야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이해하기에 무척이나 어렵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그 말은 정지된 무엇에서만 진정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뜻과 같은데,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정지된 것'을 우리 주변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기서 보통 사람도 인식의 길로 접근할 수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움직임(kinesis), 변화(alloiosis), 운동(phora) 등 흐르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생각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같은 것에 디딜 수 없는 그런 흐르는 것에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세계의 진리를 영원히 놓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는다. 그런 생각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은 자연스런 생각의 발생 과정이다. 그 발생 과정으로서 정지성을 찾아내었다(38쪽).
감각 수단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감각 수단과 감각적 깨달음의 능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감각 수단을 통해 우리는 외부 자극을 지각한다. 마치 부드러운 밀랍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듯이 말이다. 서구 근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의 인식을 경험론이라고 표현했는데, 2000년 전 플라톤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이기도 한다(44쪽). 한편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새장 모델이라고 하여 인식의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는데(46쪽), 들새를 잡아서 새장에 가두는 단계가 있고 이미 새장에 있는 새를 나만의 새장으로 가두는 단계가 또 있다. 첫 단계를 근대 경험론에 비유할 수 있다면, 둘째 단계는 근대 합리론 철학에 비유할 수 있다.
5. 소통과 진실을 위한 인문학
플라톤의 논리학과 존재론도 <테아이테토스>에서 그 기반을 찾을 수 있다. 사물을 요소와 복합체로 나누어보면서 요소는 이름만 붙일 수 있을 뿐 그 자체는 설명될 수 없다고 했다(199쪽). 설명으로 앎이 가능하여, 결국 복합체가 인식 가능하다는 뜻이다(50쪽). "설명을 동반한 참된 판단이 앎이며, 설명이 없는 것은 앎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설명이 없는 것들은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설명을 지니고 있는 것들은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이다."(198쪽) 요소들로부터 합성된 것이 곧 설명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런 대상을 "형상"이라고 했다(202쪽). 형상은 요소들의 합성이지만, 그것 자체가 단일한 종(種)이라고 했다(203쪽). 종은 그 자체로 설명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단순히 부분들을 모아놓은 전체와 다르다.
옮긴이 정준영은 이 점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 다르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요소도 인식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53쪽). 여기까지 보면 <테아이테토스>에서 말하는 요소와 복합체의 관계가 환원론처럼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환원주의적인 생각을 일으키려고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요소들을 아무리 모은다 하여도 원래의 뜻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않고 잘 읽으면(50쪽, 204∼206쪽) 플라톤의 세계 인식이 환원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 곱하기 3, 3 곱하기 2, 4 더하기 2, 3 더하기 2 더하기 1 모두 6이지만 그것들 하나하나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 내용은 현대 언어분석철학 의미론의 원조격이다(205쪽). 의미란 결국 이름 그 자체보다는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에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 정준영은 그의 주석에서 이를 재미난 비유로 설명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달을 못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이름이 아닌 이름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325쪽, 주 528).
진정한 인식을 위하여 세계를 설명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이를 위하여 몇몇 인식의 조건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첫째, 앞서 말한 것처럼 이름과 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를 설명적 통찰이라고 부른다. 둘째, 무지의 무지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자신이 거짓된 판단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이네."(370쪽) 똑똑한 제자 테아이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을 잘 알아들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무지의 무지로서 한 사례는 자기기만이다. 창조 경제 개념처럼 불통 권력에 첨언하는 사이비 지식인의 각종 이론들도 마찬가지다. 2500여 년 전 <테아이테토스>의 이야기는 오늘에도 꼭 들어맞는다. 그래서 무지의 무지를 깨닫는 인식론 공부는 정말 중요하다. 그런 공부가 인문학의 기초이다. 셋째, 앎과 믿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에서 앎으로 바꾸려면 정당화를 거쳐야 하는데, 여기서 정당화는 믿음의 명제에서 인식의 명제로 도약하는 절대적 변화에 해당한다(264쪽). 절대적 변화가 가능하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놀라움(to thaumazein)과 호기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269쪽). 경이로워하는 태도로부터 우리는 변화하는 것들로부터 변화하지 않는 무엇을 비로소 볼 수 있다. 넷째, 대상에 대한 본질적이고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인식(epistēmē)이 삶의 기술(artē)과 다르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나아가 인식이란 여자의 덕, 군인의 덕, 정치가의 덕처럼 슬기로운 기술(technē)과도 다르다는 것을 수긍해야 한다. 아르테(artē)와 테크네(technē)가 다채로워도 그것을 통해서 인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테아이테토스>는 강조한다. 대상이 속한 문맥을 포괄해야만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여전히 대상 자체의 객관성의 지식을 인식의 첫째 조건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플라톤 철학의 근간이기도 하다.
옮긴이 정준영이 낸 책 <테아이테토스>는 그 본문보다 3배 이상의 상세한 주석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는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철학서라고 봐야 한다. 외국에서 나온 많은 고전들이 세밀하고 엄정한 논거를 가진 주석을 제공하는 것을 보고 부러웠는데, 정준영의 책은 그 이상의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정준영의 번역서 <테아이테토스>뿐만 아니라 그리스 고전 연구와 장기적인 번역 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정암학당의 고전 역서들 모두 고전 작품의 고전성과 현대성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정암학당에서 출간된 그리스 고전 작품들은 그 해석의 논거가 확실하여 한국어로 읽어도 미흡할 게 없는 듯하다.
그의 주석에서 한마디를 인용하면서 이 서평을 마무리한다. 교양 인문학 좁게는 철학의 기초는 진리를 회피하지 않고 거짓에 도전하는 투명한 인식론 위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225쪽). 교양 인문학과 철학은 존재의 반성과 인식의 비판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제대로 보는 눈을 갖추는 데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처세술이나 자기 계발의 테크네(technē)가 책방을 점거하고, 기만-독선-교조-불통의 권력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진실을 알고 소통을 나누기 위하여 바쁜 시간 쪼개어 이 책 <테아이테토스> 고전 읽기를 '강추'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