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은 친숙하고도 긍정적인 말이다. 이 말은 원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내용이나 시비, 논쟁 따위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현대 영어의 'impartiality'와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에게 탕평은 정파를 떠난다는 뜻을 넘어 부정부패 사회를 척결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무책임하다 못해 무능한 정치인을 보고 있노라면 탕평에 대한 열망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탕평이란 말에는 민주주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부정적인 뉘앙스도 있다. 탕평이 위로부터의 개혁을 앞세우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당파, 무리의 논리에 빠지지 않는 군주의 도리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뭐로 가도 결과만 좋으면 좋다는 식으로 개혁의 당위성이 중요하다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민의 의사를 반영한 개혁과 위로부터의 개혁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전자는 주권재민 정신의 발로라 한다면, 후자는 말 그대로 통치기술의 연장일 뿐 시민의 바람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진정성 있는 역사적 개혁은 늘 전자의 길을 밟아왔다. 진정 민주주의의 시대에서는 시민의 의지가 반영된 개혁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시민정치의 근본 취지는 '시민정치'의 가능성, 당당히 정치주체로서 민주주의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시민의 삶에 비전을 제시하고, 감추어진 사회의 어두운 곳을 드러내 시민 스스로 삶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시민정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인 시선이 많은 게 사실이다. 애매모호한 시민의 정의(定義), 이념 중심의 접근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이들 논변에서 드러나는 한결같은 공통점은 시민과 대중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시민정치의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 기우였다. 시민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이슈에 대한 주인의식, 공공문제에 대한 비판과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는 이런 시민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시민의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항상 기득권의 편견에 맞서야 한다. '시민정치시평'은 여러 전문가들의 시선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려고 했고, 이제 300호를 맞이한다. 300호를 기념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반성한다는 취지로 과거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아직은 척박한 이 땅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을 내건 시평은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시민이 누구이고, 왜 이 시대에 시민이 전면에 나서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시대 현안에 대한 논쟁을 주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정치시평'은 이 시대의 산 증인자로서 시민담론에 대한 새로운 지형도를 그렸다고 자부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평은 기억되어야 할 시간의 기록이다. 때론 기대 섞인 시간으로, 때론 좌절로 시간을 기록해야 했다. 그 시간은 깨우침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는 숙연히 머리 숙여 고난의 절규를, 아픈 자의 목소리를 전해야만 했다.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 사건,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들이다.
기성세대의 무책임은 무고한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의 민낯,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기성세대의 무능을 고발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유 모를 무력감의 근원은 든든한 버팀목이 될 국가가 없다는 서글픈 현실에 있다. 우리 시대는 희망보다 좌절을 먼저 맛봐야 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더 많은 숙제가 있다. 일상이 되어버린 실망과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가야 할 명분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변화가 몇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탕평이 우리 시대의 화두인 듯해도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없다.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모든 시민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온갖 핑계로 자기 정당화하는 '마피아, 관피아, 철피아'등과 같은 온갖 기득권에 대항하려면 낡은 사고를 버리고 새로운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 '시민정치시평'에서도 드러난 한계 지점이다. 지금까지 기득권에 대한 예리한 비판에도, 사회효율성이나 시장 논리에 함몰되지 않는 담론으로 무장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끄떡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높은 벽, 역부족임을 실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 시민이 모색해야 할 총체적 비전이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가능성만을, 여전히 당위성만을 언급한다고 바라는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 보복의 사슬에서 벗어날 새로운 비전으로 현실 대안을 담아내야 한다. 일차적으로 현실의 아픔을 담아내는 데 성공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큰 담론으로, 정치적 비전으로 담아내지 못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탕평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분명 있다. 또한 탕평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분명 있다. 권력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사회구조를 새로운 희망으로 바꾸는 일은 오직 현실을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자에게만 일어난다. 시민의 힘은 늘 위태로운 현실을 직면하고 정면 돌파할 때 커진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말하자면 시민정치는 우리의 주인정신으로 달성해야 할 과업이다.
과거는 반복될 수 없다. 탕평을 부르짖던 우리 선조들도 어두운 현실 앞에 늘 굴복해야 했다.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탕평의 기대가 온 누리를 뒤덮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정치인의 무당무파 정신으로 우리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헛된 망상일 뿐이다. 위로부터 무언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는 여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변화가 풀뿌리 민주주의 기반에서 성립되지 않는다면 단순히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과업은 거대담론 부재의 시대에 새로운 과제를 남긴다. 늘 새로운 오늘이 미래에 대한 다른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오늘이 정체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오늘의 고통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 중요하다. 고통 없는 내일을 꿈꾸는 것 자체가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헛된 기대로 장밋빛 미래로 덧칠하길 거부해야 한다. 따라서 시민정치의 길은 냉엄한 현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과거, 오늘에 그 대답이 있다. 지금 우리에겐 탕평이라는 말 대신에 사회를 바꿔나갈 시민을 위한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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