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은 못 챙겨도 장례식은 빠지지 말고 가라"
성인이 된 후 사회에 나와서 많은 어른들한테 들었던 조언이다. 기쁠 때 함께 있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슬플 때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자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사적인 차원에서도 이럴진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문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특히 국가 정상이 참석하는 이른바 '조문외교'는 양국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도 하고, 막혔던 관계를 풀기도 하며 국익을 증진시키기도 하는 좋은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외교적인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박근혜 정부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는 이른바 '신뢰 외교'를 표방하고 있고, 또 향후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의 협력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조문을 마냥 지지해줄 수만은 없다. 박 대통령의 이번 조문이 고도의 외교적인 차원과 대외적인 메시지를 고려했다기 보다는 개인적인 인연과 본인의 지향점에 의해 결정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문이 외교적 차원과 메시지 전달 차원에서 결정됐다면 왜 박 대통령이 지난 2013년 사망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장례식과 지난 1월 사망한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면서 리 전 총리의 장례식에는 참석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머지 두 정상이 리 전 총리에 비해 외교적인 차원에서 한국에게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남아공과 사우디에 스스로 외교적 '결례'를 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고 만델라 대통령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온몸으로 저항했으며 민주화를 이뤄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민주화 인사다. 그래서 90개국이 넘는 정상들이 앞다퉈 장례식에 참석해 그의 삶에 대한 존경을 표했으며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 나간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달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박 대통령은 없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시아에서 민주화를 이룬 대표적인 국가인 한국의 대통령은 이 자리에 참석해 다른 국가의 정상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가치를 상기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알사우드 국왕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이달 초 중동 순방을 다녀온 뒤 '제2의 중동붐'을 일으키겠다며 사회간접자본(SOC)·보건·정보통신(IT)·금융 등의 분야에 진출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 했던 말이 논란이 됐을 정도였다.
그랬다면 박 대통령은 더더욱 지난 1월 알사우드 국왕 장례식에 참석했어야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중동의 맹주 국가 중 하나인 사우디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현직 대통령이 조문한 사례가 없다면서 박 대통령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현직 대통령이 조문한 사례가 없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다던 청와대는 왜 입장을 바꿨을까? 청와대는 지난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리 전 총리가 "한국을 6차례 방문한 것 등 우리와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사"이며 "박 대통령은 1979년10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리콴유 총리와의 만찬시 처음으로 리 전 총리를 만난 바 있으며, 2006년5월에는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으로서 리 전 총리를 면담하였고, 2008년 7월에는 리콴유 전 총리의 초청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면담한 바 있다"면서 박 대통령과 리 전 총리의 개인적 인연을 중시했다.
물론 국가를 대표하는 정상이라도 개인적으로 소중한 인연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측면에서 박 대통령에게 생면부지나 다름 없는 넬슨 만델라와 알사우드 국왕에 비해 리 전 총리가 더 가까운 인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결정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은 대통령이 아닌, '자연인' 박근혜 였을 때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특정한 기준과 원칙, 일관성이 없이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공적인 문제를 사적인 기준으로 결정하는, 이른바 '권력의 사유화'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의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수십 년간 독재 정치를 벌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다. "언론의 자유는 싱가포르의 통합과 정부의 우선순위 아래 종속돼야 한다"는 그의 어록은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에 반하는 발언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언론에서는 박 대통령이 만델라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면서 리 전 총리의 장례식에는 참석하는 것을 두고, 그의 지향점이 만델라보다는 리콴유와 가깝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보다는 독재에 더 친화적인 인사라는 평가다. 이번 조문이 원칙과 일관성이 없는, 개인적인 이유로 벌어진 외교적 행보라는 비판과 함께 박 대통령의 '불통', '반민주' 이미지를 더 확고히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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