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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 시장 구도, 진보의 대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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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 시장 구도, 진보의 대안인가?

[프레시안 books] 허먼 슈워츠 <국가 대 시장>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산다. 정부 관료들의 회의와 정치인들의 대국민 담화에서 동네 상점 주인들의 대화까지, 그리고 밥상에 둘러앉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한숨 섞인 걱정에서도 경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언제나 뉴스는 세계경제 동향, 실물경제와 체감경제로 채워진다. 언론사들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와 유럽중앙은행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자유무역협정에서 부동산 경기, 공공요금과 물가까지 모든 것이 경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조금 전에 언급된 모든 것들은 제각각 분리되어 아무런 연관이 없는 개별 사안으로 경험된다. 현상은 있지만 그 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각각의 현상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 경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다하는 경제학자들도 2007년 시작된 금융 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적 사람살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산화된 체계를 통해 이동하는 막대한 양의 자본과 세계적인 분업에 따른 엄청난 양의 재화와 서비스의 이동, 환율과 자원 가격의 미세한 차이에도 반응하는 투기적 성격의 자본 이동, 채권을 담보로 창출된 증권과 증권의 위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각종 보험 상품들로 촘촘히 엮여 있는 경제적 행위자들의 망은 웬만한 정보력과 분석 능력 없이는 파악하기 어렵다. 미세한 환율 변화, 금리 변동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지구화된 경제가 지금 당장의 나의 살림살이에 영향을 끼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신호에 반응할 수 있을 뿐 '어떻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역사라는 씨줄과 지구경제라는 날줄로 해석된 자본주의 역사 읽기

ⓒ책세상
허먼 슈워츠의 <국가 대 시장>(책세상, 2015년 1월 펴냄)은 이렇게 파편화되어 다가오는 경제적 사실들을 역사라는 씨줄과 지구경제란 날줄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다. 400여 년이라는 장기적 시간대에서 펼쳐지는 경제·지리적 조건이 강제하는 구조적 변수들과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대결이라는 전략적 선택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촘촘히 분석한다. 슈워츠는 경제·지리적 조건은 결정적이지만 행위자(국가)의 전략적 선택은 그것을 변형함으로서 스스로 역사적 경로를 개척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책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적 의미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책이 담고 있는 방대한 양의 정보와 그것을 엮어 내는 다양한 경제적 메커니즘을 이해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6세기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경제가 확장되는 과정을 중심과 주변의 지리적 조건과 국가의 개입 전략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추적하는 역사적 분석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쉬울 수가 없다. 국가를 중심으로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던 중국보다 분열되고 다양한 경제적 주체들을 통합할 수 없었던 유럽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지식과 더불어 문화적인 통찰과 지리적 지식이 동원되어야 한다. 유사한 위치에 있었던 나라들이 성공과 실패의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조건과 우연적 기회의 복합적 작용 속에 등장한 국가적 전략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국가적 전략은 계급적 관계를 관리하고 경쟁력 있는 산업부문을 선별하고 국제적인 경쟁에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할 수 있는 선택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필자의 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나는 것들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400여 년의 시간대와 지구적 규모만이 독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니다. 슈워츠가 제시하고 있는 많은 자료들을 다른 입장의 저자들과 비교해서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제시한 자료가 얼마나 타당하고 그것들이 슈워츠의 이론적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더 나아가 세계체제론, 조절이론, 제도주의 경제학,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조류들과 겹치지만 분기하는 지점들을 일일이 짚어내고 이론적 공과와 현실 설명력을 평가해야만 했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과제였다. 슈워츠가 의도했고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단순히 정보와 지식의 더미가 아니라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의 경로를 찾기 위한 지침이라면 그가 펼쳐 놓은 지구경제 출현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평가하고 대조할 수 있는 다양한 준거점들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쪽을 읽고 책을 덮은 후 들었던 생각은 앞에서 언급된 지적 지도 그리기와 비교가 없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시각을 통한 400년 자본주의 경제사의 개관 이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단편적인 독서에서 멈추어 설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필자의 독서는 서평이라는 제목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무식이 탄로가 나더라도 글을 써보기로 했다. 최소한 필자의 무지가 드러나는 지점에 대한 비판이 또 다른 독자들의 수고를 조금은 덜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질문을 조금 과감하게 던져 보기로 했다. 과연 이 책은 여타의 다른 이론들이 부딪혔던 설명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일까?


'국가 대 시장'의 문제틀, 강점인가 약점인가?

아주 '용감하게' 문제를 단순화하면 튀넨의 생산 입지 이론과 그것을 현대화한 크루그먼의 제조업 집적화 이론을 발판으로 지구경제의 출현을 설명하고 있는 슈워츠의 분석이 조반니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보여준 역동적인 자본주의 역사에 비해 가지는 장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슈워츠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논리적 법칙을 역사적인 동학으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경제 분석보다 더 설득력 있는 입장을 개진하고 있는가? 윤소영 교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편향적 기술혁신과 이에 따른 이윤율 저하 법칙을 상쇄하는 제도적 혁신을 둘러싼 계급투쟁,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슈워츠는 '경성 기술혁신'과 '연성 기술혁신'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계급투쟁과 분리해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슈워츠가 지구경제 동학에서 핵심적인 변수로 설정하고 있는 국가 대 시장의 관계에서 국가의 역할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편향에서 연원한다. 국가는 가족과 교육제도를 매개로 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계급투쟁을 관리한다. 그리고 국가는 결정적으로 경찰과 군대를 중심으로 한 억압적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국가는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억압적 기능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정치를 그들 사이의 거버넌스로 축소하려 하지만 계급투쟁의 효과는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의 또 다른 해석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계급투쟁이 관통하는 국가의 과잉결정의 토대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국가의 기능들이 계급투쟁에 의해 과잉결정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국가의 역할을 위계화된 국제 질서에서 경제발전의 경로를 개척하기 위한 능동적 개입으로 환원할 경우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모순 해소의 길로 나가지 못한다. 계급투쟁은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향한 힘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관리되어 완화되거나 억압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슈워츠 자신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이 리카도 전략이든 칼도어 전략이든 성장의 경로에서 이미 하나의 행위자로 상정된 국가는 국내적 모순과 갈등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미국 연준과 유럽중앙은행의 행보에 숱한 언론 등이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정작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위키미디어커먼스


자본주의 이후를 생각할 수 없는 제로섬 게임의 숙명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슈워츠의 책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국가의 역할이다. 소도시를 둘러싼 농업 지역이 지대(rent)와 관련해서 어떻게 분화되는지를 설명하는 튀넨의 농업 입지론을 지역경제, 그리고 세계경제까지 확대해서 설명하는 슈워츠는 이렇게 주어진 조건에서 국가의 선택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확대 적용 과정에서 크루그먼의 운송비용과 규모의 경제를 통한 입지 이론을 튀넨의 발전으로 해석한다. 핵심은 원자재를 수출하는 리카도 적응 전략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기술적 투자를 동반한 산업 전략으로 중심과 경쟁에 나서는 칼도어적 전략으로 나갈 것인가의 선택에 있다. 물론 어떤 국가가 성공할 것인가에서 해당 국가(정부)의 계획도 중요하지만 외생적인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우연적 조건 또는 운도 크게 작용한다. 행위자로서 국가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완전한 정보는 결여하고 있으며 그 행위 결과가 항상 의도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잘 계산된 국가의 전략은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어쨌든 앞에서도 말했듯이 칼도어적 도전 전략은 거셴크론적 집합행위의 문제(개별 자본가가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과감한 투자)와 칼도어적 집합행위 문제(새로운 부문이 성장하도록 민족자본을 보호하는 국가적 개입)를 해결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슈워츠가 마르크스보다는 폴라니에 가까워지는 이유다. 그리고 폴라니가 시장을 사회와 대립시킨 데 반해 시장과 국가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폴라니에 미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폴라니가 품고 있던 더 너른 사회운동의 동학을 지구적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 개입으로 편향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국가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외생변수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내생변수다. 슈워츠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해하고 있는 국가는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적 모순이 해결되는 것을 저지하는 국가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억압적 기능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칼도어적 집합행위 문제와 거셴크론적 집합행위 문제가 바로 계급투쟁의 관리와 억제이며 이것이 바로 노동력과 화폐를 관리하는 자본주의적 국가의 핵심적인 기능이다.

그 자신이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외적이었다고 인정한 브레튼우즈체제-케인스주의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슈워츠의 주장은 중심과 반주변의 '제한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의 제로섬 게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현실은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 자본의 출현과 금융적 축적의 심화이다. 국가는 이렇게 재편된 지구적 수준의 계급투쟁의 양상에서 노동력을 관리하고 민중의 저항을 약화시키며 무력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자본의 이동은 자유롭게 보장하지만 노동의 이동은 철저하게 통제하는 억압적 기능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기능 뒤에 숨겨져 있지만 더 근본적이다. 결국 반자본주의-탈자본주의 운동의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되어야 하는 국가를 위기 해결의 주체로 특권화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폴라니에 미달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 헤게모니 기획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사진은 2003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위키미디어커먼스


슘페터적 혁신과 케인스주의적 개입국가의 부활?

슈워츠가 마르크스로부터 이탈하고 폴라니에 미달하게 되면서 초래되는 결과 중에 하나는 기술적 혁신과 제도적 혁신을 슘페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기술적 혁신(경성 기술혁신)과 제도적 혁신(연성 기술혁신) 자체가 자본주의적 모순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조건이자 효과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 혁신과 제도적 혁신이 계급투쟁의 조건이자 효과라는 것은 곧 혁신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고 구조적인 위기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위기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항상적인 구조적 모순과 더불어 존재한다.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위기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축적 전략과 사회 통제 전략의 조합을 발명해 내는 것뿐이다. 문제는 모든 국가가 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세계체계의 위계질서가 생기고 목숨을 건 투쟁이 벌어진다. 여기에 따르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노동하는 민중들이다.

슈워츠 자신도 분석하고 있는 철도와 자동차 산업의 기술적 혁신과 법인자본주의의 출현, 그리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바로 이러한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이다. 신자유주의도 자동차산업-법인자본주의의 기술혁신과 제도 혁신이 시효가 다하여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에 대응하는 계급 전략이라는 점에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인수 합병과 금융화를 통해 반전시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목표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 대중에 대한 공격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정보통신 혁명은 이러한 방향 전환의 배경이었으며 금융 혁신은 주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금융 혁신으로 이윤량을 늘리려 했던 신자유주의는 성공하지 못했다. 19세기 영국의 면방직과 철도, 20세기 미국의 자동차 부문과 같은 선도 부문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구조적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일까? 국가 간의 제로섬 게임에서 승리할 계획을 만드는 것인가? 슈워츠가 원한 답은 이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벗어나지 못한 낡은 패러다임은 오해와 혼란을 초래한다.

역자가 해제의 마지막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대중적 사회운동이 다시 등장하지 않으면, 우리 세대가 지나기 전에 대공황 이후의 정치가 만들어낸 규모의 사회 보호와 시장 조절이 실현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퉁명스러운 문장 하나로' 책을 마치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로부터 이탈하고 폴라니에 미달하는 슈워츠의 입장에서 초래된 필연적 결과다. 그가 바라고 있는 미래는 케인스주의적 타협이지만 이제 현실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케인스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대중운동이 다시 출현하기 위해서는 관리자본주의의 민족적 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필요하다. 그러한 근본적 비판이 경험되고 체험되는 다양한 운동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하지만 슈워츠의 대중운동은 케인스주의적 타협을 복원하기 위해 이념형적으로 요구되는 '어떤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민족과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드러나는) 국가가 매개하는 구체적인 자본주의 구성을 통해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는 체험과 경험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 헤게모니 기획과 정책으로 모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주기적으로 등장했던 구조적 위기 중 하나이다.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통한 자본주의 재편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훨씬 더 불평등한 계급 구조 재편일 가능성이 높다. 훨씬 더 파편화되고 경쟁적인 자본주의적 주체들을 양산하는 자기 파괴적 사회 기제에 바탕을 둔 초국적 금융자본의 지배로 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인간적인 자본주의라는 환상과 일국적 성장 전략과 이에 동반되는 복지국가를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정치적 판단은 민중에게는 파국적일 자본주의의 구조적 재편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는 이데올로기적 봉사를 할 뿐이다. 국가 간의 투쟁과 그러한 투쟁을 지탱할 국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민족-국가의 허구적 정체성은 반자본주의적 운동과 탈자본주의적 경향을 저지한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원자화된 개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적자생존 투쟁의 예행연습일 뿐이다. 그래서 슈워츠가 보여준 자본주의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바라지만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니다.

<국가 대 시장>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을 통해 우리들이 처해 있는 한계 지점을 드러내고 여기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이론적 탐색의 작업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슈워츠의 책은 우리를 이끌 방향 표지판이 아니라 위험 표지판이다. 이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조반니 아리기,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 그리고 던컨 폴리와 함께 읽었을 때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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