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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이진경의 대화, 2인극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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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이진경의 대화, 2인극의 즐거움

[프레시안 books] 이진경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해 말 <책에 따라 살기>(김수환 지음, 문학과지성사)라는 책이 출간됐다. 저자에 따르면 '책에 따라 살기'는 러시아 지식인들이 근대의 여명기를 사는 하나의 특이한 태도였다. 그들은 독서를 통해 책이 제시하는 세계상과 그들이 사는 시대적 비참 사이의 간극을 인식했다. 그 간극은 그들에게 극복해야 할 부조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책에 따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쳤다. 특히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칼 마르크스의 책들은 필독서였다. 러시아의 혁명운동가 베라 자술리치는 혁명 조직을 결성하고 이 조직의 요구에 따라 마르크스의 책들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그녀는 마르크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혁명운동에 대한 조언을 마르크스에게서 구하기도 했다.

마르크스 자신에게도 서신 교환은 익숙한 것이었다. 짐작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 저술은 둘 사이의 서신 교환 속에서 준비되고 실행됐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편지를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편지를 받으면 정성 어린 답장으로 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관심 있는 이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많은 지식인/혁명가/예술가들은 서신 교환을 즐겼다. 그러니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유럽에서 온 마르크스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리 생뚱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링컨 역시 많은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을 테니까 말이다.

'책에 따라 살기'가 활발했던 시대의 특이성은 무엇일까? 그 시대에는 혁명적 에너지로 들끓는 주체들과 그들의 글만 있지 않았다. 서신 교환 문화에서 잘 나타나듯 그들 사이에는 대화가 있었다. 대화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성찰하고 수정하고 발전시켜갔다. 공론의 형성 과정에 관심을 가졌던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는 대화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그에 따르면 대화 속에서 기존의 관습과 의견에 반하는 독창성이 형성되고 이 독창성은 새로운 사회적 전염의 중심이 된다. 말과 말, 글과 글, 행동과 행동의 교환인 대화 속에는 새로운 세계의 씨앗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그의 책들은, 세계와의 불화에 관한 한 가장 첨예했고 세계의 변혁에 관한 한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마르크스와의 대화는 이론적, 실천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그리고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독주가 본격화한 이후, 급진적 사회 개혁을 통한 이상 사회의 건설이라는 전망이 사그라들면서 이 전통은 약화됐다. 물론 자본주의의 위기 때마다 마르크스는 소환됐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아브라카다브라! 수리수리마수리!"를 외치듯 잠시 그때뿐인 경우가 흔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가 세계의 비참을 성찰하는 관점에서 세계의 혼란을 봉합하는 주문으로 전락했다는 증거는 많다. 대학교에서 마르크스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정규 커리큘럼에서는 물론 동아리의 스터디에서조차 잉여가치론, 사적유물론, 계급론, 혁명론은 사라졌다. 반면 마르크스에 대한 '교양서'들은 출판 시장에 무수히 널려 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이론적으로 거의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피케티는 '21세기 마르크스'로 불리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 관련 책들에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언제부턴가 책은 그저 묵음의 텍스트, 또는 텍스트의 묶음이 되었다. 책은 여전히 세계의 비참을 조망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목소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책의 목소리는 집합적인 대화에 합류하지 못한다. 언제인가부터 유행이 되어버린 소위 '작가와의 대화' 같은 세련된 마케팅 기획들은 저자의 매력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이벤트로 끝나버린다. 산 사람의 책조차 구경거리가 돼버린 마당에 죽은 사람의 책은 오죽하겠는가?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온 이진경, 마르크스에게 말을 걸다

ⓒ꾸리에
이런 상황에서 이진경의 책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꾸리에, 2015년 3월 펴냄)가 출간됐다. 이진경이야말로 1980년대 한국에서 '책에 따라 살기'의 전범을 보여준 지식인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그가 24세이던 1987년 세상에 내놓았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마르크스라는 유령에 홀린" 상태에서 쓴 책이었다. 이 홀림은 군사 독재 치하에서 민주주의와 인간 해방의 꿈을 꾸었던 당대의 청년들에게 광범하게 퍼진 병증이었다. 그는 이 홀림을 비판적 사유로 마름질하면서 마르크스 이론을 한국 사회에 걸맞은 혁명 이론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러나 곧 맞이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절망적으로 목도하면서 그는 이론적 전환을 기하게 되는데, 이때 그를 찾아온 새로운 유령의 이름은 들뢰즈였다.

들뢰즈는 이진경에게 생산 영역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주체 형성과 국가권력의 장악 및 해체라는 마르크스의 단선적 혁명 경로를, 혹은 그런 식의 마르크스 해석을 비판하고 확장하는 대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 천착하면서도 그는 마르크스와의 대화를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들뢰즈를 경유하여 마르크스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마르크스에 다다르는 길은 들뢰즈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푸코와 스피노자를 파고들었고 불교 철학을 파고들었고 최근에는 블랑쇼를 파고들었다. 자본주의의 극복이 불가능해보이면 보일수록 그는 마르크스의 질문(누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가?)에 다다르는 다양한 경로를 집요하게 모색해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이진경은 자신이 탐구해왔던 모든 사상적 경로들과 함께 다시금 마르크스로 돌아간다. 특히 그는 '이인극적' 가상 대화의 형식으로 마르크스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이 책에서 이진경은 마르크스에게 연극적인 캐릭터를 부여한다. 마르크스는 이진경과의 대화에서 때로는 발끈하기도 하고 때로는 썰렁한 유머를 발휘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꽤 박식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현대에 발간된 신문과 책과 만화책을 읽고 그곳에 올라온 현대 예술가들 및 사상가들과 대화를 나눠왔기 때문이다.

이진경이 마르크스와의 대화에 도입한 이인극 형식은 단순히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 형식은 "마르크스가 계속 살아 있다면 현대의 비참을 극복하기 위해 동시대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사유했을 것이다"라는 가정법에 근거해 있다. 그리하여 이인극이라는 형식 속에서 마르크스는 말없이 떠도는 유령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에 딴지를 걸고 개입하는 '수다스런 유령'이 된다. 이때 마르크스는 자신이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 역사적 한계 안에서 생성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현재의 역사적 시점에 비추어 자신의 사상을 비판하고 나아가 과감히 변경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마르크스를 수다스런 유령으로 되살린 이는 바로 이진경이라는 무당이다. 우리가 듣는 마르크스의 말은 이진경이라는 무당의 입과 목소리를 통해서만 나온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관람하는 이인극은 사실 일인극의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책에서 마르크스와 이진경의 대화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둘 사이에 이견들이 표출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 이견들을 좁혀나간다.

이진경이 되살린 마르크스가 진정한 마르크스일까?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이진경이 되살린 마르크스가 진정한 마르크스일까?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이진경의 '코뮨주의'에 그토록 우호적일까? 마르크스가 "외부성을 원리로 하는 우정 공동체"를 옹호하는 이진경의 코뮨주의를 받아들여 "연대는 무엇보다 다른 계급, 다른 이해관계나 입장을 가진 집단 사이에서 필요한 것"(45쪽)이라고 말할까? 예를 들어 책에서 마르크스는 "농사란 기본적으로 인간과 동물, 토지와 숲, 토지 속의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공동체적 순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41쪽)이라면서 이진경의 생태적 코뮨주의를 우호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자연에 결박된 상태, 땅에 대한 지나친 애착, 지역적 차원에 국한된 사회적 관계 등의 소농적 특성들을 문제 삼지 않았던가? 그는 그러한 특성들이 소농들로 하여금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르는 계급 적대와 전국적 수준의 정치적 조직화를 불가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계급으로 구성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이진경이 되살린 마르크스는 생태주의적인 방식으로 생산력을 재정의하면서 이 질문에 답한다. 그에 따르면 생산력이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 양상"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 생산수단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함축"한다(227쪽). 그는 이윤 중심으로 자연의 가치를 파악하고 착취하는 현대의 "생명 산업"에 맞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잉여가치가 아닌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가 생성되도록 생산력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진경과 마르크스는 생태적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 같은 코뮨적 변화들이 "자본주의 안에 무수히 많은 비자본주의적인 구멍"(100쪽)을 뚫어나가는 일이라고 파악한다.

역사와 혁명에 대한 이 같은 코뮨주의적 해석 방식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고수해 온 '노동가치론'이나 '계급론'과 충돌할 것이다. 이해관계에 기초한 계급적 연대가 아니라 탈계급적 연대의 쾌감을 말하는 마르크스는 확실히 낯설다. 그러나 이런 해석 방식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거나 체계화되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잉여적 개념들을 그의 주요 개념들과 재연결시키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확보하게 한다. 예컨대 노동 과정에 매여 있던 착취 개념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활동 일반의 착취, 물질적 생산에서의 착취가 아닌 사회적 활동 전반의 착취"(219쪽)로 재정의된다. 코뮨주의적 구멍 뚫기는 이처럼 일반화된 착취의 시스템을 내부에서 변화시키는 실천론으로 제시된다.

나는 '내재적 확장'이라 부를 만한 이진경의 마르크스 해석이 반갑다. 나는 그의 방식이 "마르크스 왈"로 시작하는 교조주의나 축자주의보다 훨씬 더 마르크스답고 또한 실천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내가 그의 마르크스 해석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무산자로 "세계와 불화를 느끼고 그런 세계를 변혁하고 싶다는 욕망"(246쪽)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규직 산업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걸린다. 나는 이진경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과 해고자들이 현대의 노동운동, 나아가 정치 운동 일반에서 매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체계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세계의 비참 한가운데 있는 존재들이며 그들의 싸움은 종종 자본과 국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들, 혹은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무능과 과오를 인정하는 꼴로 만드는 요구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진경은 노동자 계급을 "잃을 것이 너무 많은" 기득권층으로 규정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실업자=프롤레타리아트"라는 등식을 구성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말대로 "노동 자체가 항상-이미 계급투쟁"(267쪽)이라는 전제를 수용해보자.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로서 혁명적 포지션을 상실하게 된 것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투쟁에서 그들이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은가? 단지 그들이 너무 많이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이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노동자 계급은 그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얼마나 많은 다른 것들을 잃도록 강요당했는가!

문득 쌍용자동차 공장 안의 굴뚝에서 지난 100여 일간 농성을 했던 해고 노동자 이창근이 신문에 쓴 칼럼의 한 부분이 생각난다. 그는 말했다. "이유일 법정관리인에게 좀비처럼 끌려다녔던 그 한 달의 공포스럽고 치욕스러운 기억에서 포박당한 채 7년을 아파했을 공장 안 사무직, 생산직 옛 동료들에게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하다. 그 이유를 굴뚝에 오른 지 96일째 되는 날에야 안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경향신문> 2015년 3월 17일, '굴뚝에서 보내온 편지' "7년, 그들은 왜 일어서지 못했나") 이창근은 굴뚝 위에서 가진 정규직과 가지지 못한 해고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7년 동안 일어서지 못했던 옛 동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자본이 강요한 선택에 따라 자신들의 직업을 유지하려다 정작 잃어버린 인간적 존엄을 헤아린다.

물론 이진경과 나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창근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관점, 계급적 구별선을 넘어서는 비-계급적 인식은 해고자의 지난한 투쟁이 빚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개인의 해방을 인류의 해방으로 전환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이, 임금 노동을 둘러싼 현대의 계급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모든 (비)노동자들에게 잠재해 있다고 본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실업자이건 해고자이건 그들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남는 싸움에서 임금 노동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싸움을 수행할 때, 즉 일반화된 사회적 착취에 맞선 사회적 연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포지션을 취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생각이 마르크스 이론의 내재적 확장이라는 이진경의 이론적 전략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여긴다.


이진경과 마르크스의 이인극, 그 경쾌함을 주목한다

내재적 확장이라는 이진경의 마르크스 해석 전략은 이인극적 대화 형식과 맞물려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이진경과 마르크스는 대화의 진행 과정에서 마치 그때그때 필요한 도구함의 연장을 끄집어내듯 개념들과 사례들을 선택하고 연결한다. 하지만 이인극적 대화 형식을 채택한 이유에는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득 이런 질문을 해본다. 그것은 읽는 이의 재미보다는 오히려 쓰는 이의 재미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에는 절박함과 경쾌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는 마르크스를 책 속으로 소환하였고 자신의 사유를 대질시켰다. 이진경은 마르크스에게 "당신이라면 현대의 이 견딜 수 없는 비참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라는 긴급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러나 둘은 대화라는 형식 속에서, 이인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현대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짚어나간다.

이 즐거움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그는 책을 쓰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할 거야!' 이진경은 바둑을 두는 심정으로 마르크스의 수를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두 수, 세 수 앞을 미리 준비했을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진검 승부를 펼친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현대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래도 고수일 테니 좀 봐주면서 둘까? 아니야 그래도 나의 스승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이 예의겠지?'

나는 이 경쾌함을 주목한다. 책을 사랑하면 세상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비애, 책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울분, 책을 읽지 않는 이들에 대한 윽박, 이것의 '책에 따라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왔던 태도들이다. 그러나 이진경의 '책에 따라 살기'는 사뭇 다른 태도를 제안한다. 이진경은 평생 책을 읽고 쓴 사람이다. 이제 그는 책과 함께 무대 위에서 놀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더 잘 놀았으면 좋겠고 더 웃겼으면 좋겠다. 놀이와 웃음이 진지함의 반대가 아니라 진지함의 완성임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놀고 웃는 모습이 해방된 인간의 모습이라면, 이제 인간 해방을 외치는 사회학자나 철학자도 책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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