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을 위한 노력이라도 기울인다면 변변찮은 대로 국가가 존재는 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는 진상 규명 등 국가의 역할 수행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적으로 대했다. 대통령은 면담을 거부했고, 여당 인사들이 유가족을 모욕하는 언사를 내뱉었고, 경찰 등 행정 기관은 유가족의 단식을 조롱하는 극우 세력을 방치하거나 감쌌다. 반년 넘어 지나 겨우 만들어진 조사위원회는 정부-여당의 사보타주로 작동이 어렵다.
상징적인 문제가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방이다. 국가의 역할이 절박하게 요청되던 7시간(근무 시간 포함) 동안 행정부의 수장이요 국가 원수라는 자가 어디서 뭘 하고 자빠졌는지 깜깜하니 온갖 기괴한 소문이 나돌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 소문의 존재를 보도한 일본인 기자에게 죄를 묻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청와대 안에 있었다"는 주장 외에 아무것도 밝히지를 않고 있으니, 뭔가 밝히지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달라는 이야기 아닌가.
현대 세계의 국가 중에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국가가 없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피해를 더 늘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해주고 싶어도 후속 조치라는 것을 보면 뭔가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걱정을 억누를 수 없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국가 자격을 의심할 만한 일 또 하나를 국가 기관이 터뜨렸다. 이건 우연한 사고로 볼 여지도 없이 그냥 저지른 짓이다.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까지는 따지지 않겠다. 설령 해산 판결이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통진당 소속 의원들 배지를 떼겠다고 어떻게 사법부가 나설 수 있나? 의원 자격 박탈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소속 의회에 권유를 할 일이지, 어떻게 헌법재판소가 손수 배지를 떼러 나설 수가 있나? 8인의 재판관은 '3권 분립'이 뭔지도 모르는 무지렁이란 말인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 헌법' 들고 나왔을 때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는가?" 따진 일이 있다. (☞관련 기사 :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는가?") 지금 생각하면 이완용에게 미안하다. 이완용은 고종이 맡겨놓은 총리대신으로서의 권한을 팔아먹은 것이지만 8인의 헌법재판관은 누가 맡겨주지도 않은 권한을 팔아먹었으니 훨씬 더 질 나쁜 범죄자들이다. 이완용이 '국가 절도범'이라면 이것들은 '국가파괴범'이다.
국가의 파괴란 어떻게 해서 벌어지는 일인가? 권력의 사유화가 문제다. 국가 권력이 공변된 성격을 지키더라도 현실 조건 때문에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이 충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공변된 성격을 아예 포기한다면?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조선 말기 권력의 사유화 현상이 국가 기능의 저하를 불러온 끝에 망국 중에도 아주 추잡한 꼴의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어봤다. 1910년의 한일 합방 설명으로 그 작업을 끝낼 때, 망국 이야기를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35년 후의 '광복(光復)'을 맞고도 한국인은 국가를 되찾지 못했다. 3년 후 '건국(建國)'을 했지만 온전한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이른바 '해방 공간'을 세밀히 살펴보는 '해방 일기' 작업을 했다. 그 성과가 이제 책으로 완간되는 시점에 이르러, 한국인이 지금 이 시점까지도 온전한 국가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확인한다.
'국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국가주의'를 몹시 싫어한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아무리 국가주의가 싫더라도 내 국가를 아끼는 생각은 버려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족의 전통이 빈약한 유럽인들은 민족과 국가를 분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둘 다 'nation'이란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반면 한국처럼 민족 전통이 뚜렷한 사회에서는 그 차이가 분명하다. 20세기 전반기의 참극을 겪은 유럽에서는 'nationalism'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치열한데, 그 대상은 엄밀히 따져볼 때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다.
선진국의 사조라 하여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거름통 지고 장에 가는 격이다. 번역을 잘못해서 국가주의의 잘못을 애꿎은 민족주의에 덮어씌우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거니와, 국가주의의 반성도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국가의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원래의 임무를 등지는 짓이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것이 원래 나쁜 것이니까 국가의 역할을 무조건 축소해야 한다는 것은 국제 자본의 전횡을 도와주는 매판 세력의 상투적 주장이다.
문명 세계에는 제도화된 질서가 필요하다. 문명 발생 이전, 지구상에 인류의 개체수가 500만 명이 되지 않을 때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문제라도 개별적으로 처리하면 됐지, 굳이 제도적 질서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다.
문명이 발생하고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제도적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문명 발전에 따라 제도적 질서를 공유하는 사회의 규모가 커져 어느 단계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제도적 질서를 통해서만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관계를 가지는 상태에 이른다. 이것을 '국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규모는 계속 커지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구성원을 품고 있으면서 외부적으로는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가지는 기본 구조는 지금까지 그대로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의 외부 관계가 몇 개 인접국에 제한되어 있고 교류의 분량이 적었기 때문에 내부적 기능이 압도적으로 중요했다. 내부적 기능의 핵심이 질서 유지에 있었고 폭력의 억제가 국가의 기본 역할이었다. 국가 제도가 일찍 발달한 중국에서 '왕토(王土)'의 이념으로 토지 소유권을 제한한 것은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지한 것과 같은 뜻이었다. 무력(武力)과 함께 재력(財力)이 또한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국가의 질서 유지 기능은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세워주는(抑强扶弱)" 원리에 따른다. 도덕적으로 고매한 원리라서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질서가 유지된다. 강자의 전횡을 방치하고 정글의 법칙에 맡기면 약자가 설 땅을 잃고 극한적 저항으로 나오기 때문에 질서 유지가 불가능하게 된다.
강자의 입장에서도 거시적-장기적으로 질서 유지가 필요하다. 사회가 지속 가능성을 가져야 자신의 유리한 입장도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의 욕심을 참고 국가 질서에 순응할 동기를 가진다. 그러나 국가 질서에 신뢰를 가질 수 없을 때는 자신의 힘밖에 믿을 데가 없다는 전제 아래 생존을 위한 각개약진으로 나서게 된다. 강자들이 절제 없는 경쟁을 벌이면 약자들이 견딜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사회구조가 붕괴되면 강자들도 피해를 면할 수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에 대한 구성원들의 믿음이 매우 약하다. 전에는 정치인의 선의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국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있었다. 독재 정치에 시달리면서도 국가의 운영권을 원래의 주인인 국민이 되찾기만 하면 국가가 국가 역할을 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87년의 '민주화' 이후에도 다수 국민이 집권 세력에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국가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 정치 혐오증 확산의 이유다.
어느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했다. 솔직한 말씀이긴 한데,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시장이 아니라 재벌에게 넘어간 것이다. '재벌'로 지칭되는 자들이 그 이름을 몹시 싫어하지만,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다. 무력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 권력이 되는 것을 '군벌'이라 하는 것처럼, 재력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바로 '재벌' 아닌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안팎으로 기능이 온전치 못하다. 안으로는 국민을 재벌의 권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하고(법인세를 놓고 '성역' 운운 하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가!), 밖으로는 미국에 종속되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민족 문제에 관한 정책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나는 '해방 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 작업으로 이 문제를 검토했다.)
밖으로는 외세 의존성, 안으로는 무정부 상태
사회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1987년까지 '민주화'에 쏠린 것은 그런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민주화'의 의미는 물리적 폭력의 통제, 즉 '문민'의 원리에 집중되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억울한 죽음이 상상 밖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데서 물리적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987년에 한국 사회는 '문민'의 원리를 확보했다. 국가의 물리적 폭력이 '정상적'인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의 의식이 물리적 폭력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덜 물리적인 폭력, 즉 재력에 대한 통제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총칼의 힘을 대신해 돈의 힘이 정부에 대한 장악력을 지금까지 키워왔고, 이제 그 장악력을 발판으로 물리적 폭력까지 다시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단계에 와 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정권은 새누리당(민정당 이래)과 민주당을 두 축으로 운용되어 왔다. 비교적 민권을 중시한다는 민주당이 10년간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을 때도 재벌의 '경제 권력'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두 당이 경쟁적으로 '경제 민주화'를 외친 것은 그 폐단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구호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고, 민주당의 진심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제 권력의 통제를 진심으로 주장하는 것이 분명한 정치 세력은 정권에 접근할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내놓고 대변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 1년 되었을 때 일어난 '용산 참사'는 국가의 물리적 폭력이 정상적 수준을 다시 벗어나는 신호탄이었다. 유시민이 <국가란 무엇인가>(돌베개 펴냄)를 쓴 것은 이 사태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는데, 그는 바람직한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로 생각한다고 서문에 썼다.
2011년 봄 이 책이 나왔을 때는 이런 말을 대단히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해방 일기> 작업을 진행하면서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좋은 국가'를 생각하기 전에 '최소한의 국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환자에게 건강 관리법을 설명해 주는 격이 아닐까?
1910년에 한반도에서 국가가 사라졌다. 통치 기구로서 정부는 총독부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통치의 목적이 주민 아닌 외세의 이익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국가가 회복될 조건 일부가 이뤄졌지만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1948년 만들어진 두 개의 정부가 모두 국가의 회복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1948년 이후 두 개 정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국가 비슷한 조직 두 개가 한반도에 존재하게 되었다. 북한 사정은 내가 잘 모르거니와, 내가 살아온 남한은 정부 수립 당시부터 갖고 있던 국가로서의 결함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함이 밖으로는 외세 의존성으로 나타나고 안으로는 무정부 상태로 나타난다. 두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며 식민지 시절에 빚어진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미국이나 (한국 출신을 포함한) 국제 자본의 총독부 역할에 그치게 하려는 세력과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뒤얽혀 맞서는 상태에 있다.
정의를 세우는 국가, 시민을 보호하는 국가,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쉽지, 꾸준한 노력과 많은 의논이 필요한 일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분명한, 더 기본적인 응급조치다. 우리 정부가 총독부 아닌 주권 국가 정부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이론에 맞춰 본다면 국가의 성격을 정량적으로 조절하는 정상 상태가 아니라 국가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패러다임 전환기에 우리가 서있다고 나는 본다.
"내 탓이오!" 외치기 전에 생각할 것들
어렸을 때(1950~60년대) 많이 듣던 "엽전은 안 돼!"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이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과 조선인을 비하한 관념이 내면화되어 해방 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은 일본인이 물러간 뒤에도 분단과 전쟁, 독재의 참혹한 상황이 이어진 때문이었다.
고통과 치욕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놓고 내인(內因)론과 외인(外因)론이 엇갈린다. 개인이든 사회든 어떤 일에나 내인과 외인은 어울려 작용한다. 개인의 일을 놓고는 내 잘못을 중시하는 쪽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태도일 뿐 아니라 문제 극복에도 효과적인 길이 되기 쉽다. 그러나 한 사회를 놓고는 도덕성보다 현실 조건의 정확한 파악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의 행태를 내부 원인으로 보아 "엽전은 안 돼!" 하는 생각에 보태서는 안 된다. 을사5적이 당시 대한제국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시 지식인의 전형도 아니었다. 고종의 권력 독점욕과 일본의 압력이 어울려 빚어낸 '괴물 내각'이었다. 그런 소인배는 어느 사회에나 상당수 있게 마련인데, 그런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게 한 상황이 문제지, 5인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내부 원인을 따지자면 임금 노릇이 뭔지도 모르는 고종 같은 자가 임금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건데, 그것은 문제가 된 장면에 국한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을사5적이 아니라도 조선의 식민지화는 진행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서세동점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식민 통치자들이 을사5적의 행태를 권장해서 친일파를 크게 육성했고, 그 세력이 해방 후에도 외세를 받들어 민족 국가 수립을 가로막고 나섰다. 국가 권력을 그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그 역할이 커 보이지만, 그들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서세동점 상황 속에 식민지 체제가 냉전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외세에 붙어먹은 기생충이었다. 그들의 잘못을 놓고 일반 한국인이 "내 탓이오!" 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반성을 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행적을 되돌아봐야 한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 합작을 거부한 김구의 오류는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가 좌우 합작을 통해 10년의 신탁 통치를 감수하고 온전한 독립에 이른 것을 보면 신탁 통치 반대를 빌미로 좌우 합작을 거부한 것은 세계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김구의 오류로 인해 민족주의 세력이 제 몫을 못한 것은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있었다. 해방 공간의 민족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 수준의 좌우 합작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민족 국가 건설의 길이 오스트리아처럼 순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에는 갈등의 확대에 대한 주변의 억지력이 있었던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국공 내전이 주변의 갈등을 부추기는 형세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초래한 제국주의 체제와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온 냉전 체제의 공통 분모는 서세동점 현상이다. 일본의 침략 정책도 서세동점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고, 미국의 패권 정책도 서세 동점의 세계 체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해석이 근년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남한의 경제 발전도 이 세계 체제 전개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굴기 앞에서 서세동점의 형세가 끝나고 있다는 시각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의 발전만이 아니라 서세동점의 동력이었던 자본주의 체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견해도 1970년대부터 '세계 체제론'의 형태로 확장되어 왔다. 이 시각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질서가 근 2세기 만에 큰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며, 한민족의 주권에 대한 외부의 억압이 100여 년 만에 크게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망국과 분단의 조건이 해소되고 있다
<해방 일기> 집필을 끝낼 무렵 나는 이 전환기의 인식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재 완료 기념 대담에서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란 제목으로 문명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한 내 관점을 발표했던 것이다. (제10권에 수록되었다.) 19세기 중엽 이래의 서세동점 현상이 끝나고 있으며, 근대적 관념들로부터 풀려난 새로운 생각의 방향이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 그 발표의 골자였다.
최근 '자본주의 이후'란 제목으로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다음 단계에 대비할 필요를 논하고 있는 것은 이 문명사 관점의 연장선 위에서 이 사회의 당면 과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통해 이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가치관의 혼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보'의 이름이다. 근대 사상의 '진보주의'와 관계없이, 이 사회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한 모든 노력에 '진보'의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바꾸는 것을 거부하는 '수구' 세력이 '보수'를 표방하기 때문에 그에 대칭되는 이름을 내걸게 된 것인데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하는 사람 중에 진짜 진보주의자는 많지 않다. 내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진보의 믿음이 인간의 근대적 오만에서 나온 것으로 보며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7년간 그런 입장을 꾸준히 밝혀 왔는데도 나를 '진보' 진영으로 보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이름이 발라야 말이 통하고 말이 통해야 일이 이뤄진다(名不正 言不順 言不順 事不成)"는 공자 말씀을 생각한다. 청와대를 놓고 '불통'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이름을 거짓되게 하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이 이뤄지지 않는 결과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비슷한 문제가 진보 진영에도 있다. 진보 진영의 집권 10년 동안 일어난 많은 오해와 혼란이 '진보'의 바르지 못한 이름에 얽혀 있었다.
이 나라에는 잘못된 문제가 많이 있다. 그 문제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사람들이 '진보' 진영으로 지칭되어 왔다. 그런데 그 문제들이 정상적 국가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수준의 문제들이고 그 문제들을 극복함으로써 더 나은 체제를 새로 만들자는 입장이면 '진보'가 맞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 정상적 국가의 기준을 형편없이 벗어나는 것이라면, 제대로 된 나라를 일단 만들고 봐야겠다는 보수주의자들도 '진보' 진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라의 순조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개혁적 보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우선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어놓아야 '더 좋은 세상'을 빚어 갈 발판이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의 조선 사회의 과제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고, '최소한의 민족 국가'를 추구한 중간파의 입장이 이 과제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파의 노력은 외세를 등에 업은 매판세력의 무력과 재력 앞에 좌절되고 말았다.
지금 이 사회에서 전환기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간파 선인들이 좋은 뜻을 갖고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절대적 이유가 불리한 국제 정세에 있었다. 일본이 패전했다는 사실 외에는 망국을 겪던 시절의 국제 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정세를 무릅쓰고 민족 국가를 성취한 예로 베트남이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민이 겪은 30년 전쟁의 고통을 생각하면 꼭 부러워할 일만도 아니다.
국제 정세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나 냉전 종식과도 차원이 다른 심대한 변화다.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형세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의 망국과 분단을 강요한 국제 정세가 근 200년 만에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나는 본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에도 '근대적 가치관'의 안경이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안경 때문에 우리가 본질적 의미가 없는 가치에 얽매여 불필요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정작 중요한 가치를 간과하기도 한다. 이 안경에 현혹되지 않고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절대화하는 관점을 우선 억제해야 할 것이다.
'국가'도 다시 볼 필요가 있는 대상이다. 한민족이 1000년간 민족 국가를 생존과 번영의 틀로 삼아온 경험은 서양인들과 다른 것이다. 서양인들에 비해 우리에게는 민족과 국가가 정체성의 발판으로, 사회 운용의 기본 제도로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이다. '세계화'의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민족과 국가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지 않는 세계화라야 진정한 세계화가 될 것으로 나는 본다. 그래서 '국가'의 회복이 아직도 이 사회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역사학자 김기협 기획위원의 <해방 일기>가 4년 만에 완간됐습니다.
1945년 8월1일부터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즈음인 1948년 8월14일까지 역사를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해방 일기> 연재는 10권의 책으로 묶였습니다. "광복은 아직도 우리의 과제"라고 말하는 김기협 기획위원과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의 '대담'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대담은 3월 25일 저녁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20호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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