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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 세대'가 된 20대에게 '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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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포 세대'가 된 20대에게 '하면 된다'고?

[민들레] 이십대의 자화상, 희망이 있을까

과거를 추억하는 이십대

이십대들이 추억에 빠졌다. 지나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남았는데, 벌써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토토가'(MBC <무한도전> 특집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열풍으로 90년대 가요들이 최신곡 차트를 점령했고, 전성기를 지난 스타들은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데없는 복고 열풍에 빠진 사람들은 중장년층이 아닌 이십대와 삼십대 젊은 사람들이었다. 벌써 나도 무언가 추억할 거리가 생겼다는 게 신기하다. 지금과 비교하면 어딘가 촌스럽고 과장된 모습의 90년대 음악과 가수들 옷차림이 오히려 정감 있다. 음악은 일기장과 같다고 했던가.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기억과 장소, 냄새까지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이렇게 향수에 젖어 있는 동안, '토토가'가 불러온 열풍이 별로 달갑지 않다는 한 칼럼을 봤다. 앞이 안 보이는 미래 때문에 과거로 숨고 싶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나타내는 글이었다. 더는 희망을 갖기 어려운 젊은이들의 포기와 허무가, 2015년 시작과 함께 '토토가'로 재연되고 있는 건 아닌지를 우려했다. 사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떠올리는 것보다, 차라리 미화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스물아홉의 터널로 진입한 나에게도 더 약효가 좋다.

ⓒMBC

지금을 살아야 하는 이유

예측 불가능의 시대가 도래했다. <트렌드 코리아 2015>(김난도 지음, 미래의창 펴냄)에는 '카르페디엠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말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현재를 잡아라!"라는 외침을 그대로 재현하는 세대가 바로 요즘의 이십대다. 가슴을 울렸던 이 대사는 요즘 현실에서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

그들은 '작은 사치'로 행복을 실현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 꼬박꼬박 평생 저축을 해도 부모 세대처럼 집을 사거나 차를 살 수 없을 것 같다. 미래에 모든 것을 저당 잡힐 바에야,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2000원짜리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고, 1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커피 한 잔과 달콤한 디저트로 기분 전환을 하는 식이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어떤 이는 고가의 카메라 렌즈와 장비를 사들인다.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그건 더 이상 형편에 맞지 않는 사치라고 볼 수 없다.

미래를 기약하지 않은 사람들, 바로 지금 당장,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태도는 <결정장애 세대>(올리버 예게스 지음, 미래의창 펴냄)에서도 잘 드러난다. 198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작가는 지금의 젊은이들을 '메이비족'(Generation Maybe)으로 명명했다. 이들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일관된 무언가가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없는 세대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그 어떤 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변하고 있다. 달라진 상황에 적응할 겨를조차 없이 또 다른 새로운 상황이 밀려오고 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기존의 경계는 흐려지고 새로운 경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게 가능하단다. 모든 걸 가질 수 있단다."(<결정장애 세대> 31쪽)
불확실한 시대이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라는 두 가지 요인이 맞물려 이십대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방향성을 상실했다. 저자는 말한다. 선택의 범위가 너무 넓으면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뭐라도 좋으니 제발 어떤 기준이라도 있었으면, 지침이 되는 방향이 제발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라고. 결국, 나 또한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이렇다 할 포부도, 명확한 목표도 없이 부유하던 이십대를 단번에 제압한 것은 자기계발이란 덫이었다.

'하면 된다'고 말하는 냉혹한 멘토들

"문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사실은 평생 '극복만 주문' 받는 개인을 만들어 버린다. 이십대는 불안하니까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어서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불안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돌이표처럼 갇혀버리는 것이다. (중략)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 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된다."(<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33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에서는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십대의 자기계발이란 '취업준비'일 뿐이다. 매주 등산을 하거나, 꾸준히 악기를 배우는 것은 책이 말하는 자기계발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가지고 놀았던 탱탱볼 같았다. 방향을 못 잡고 사방팔방으로 튀어 올랐다. 토익점수를 만들기 위해 영어를 공부했지만, 그건 영어 공부라기보다 단번에 정답을 골라내는 '기술' 습득이었다. 실제로 요즘 어떤 토익학원 광고는 '토익은 기술'이라며 대놓고 수강생을 모집한다. 그 기술을 배울 목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나와 친구들은 고득점을 따냈지만 끝내 누구도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할 수 없는 기이한 결과를 마주했다.

기업들은 분기별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이며 기자단, 체험단 같은 각종 참여 프로그램을 쏟아놓는다. 지원자 수가 어마어마하고, 거기에 뽑힌 청년들은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어쩌면 해당 기업에 입사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력서 대외 활동란을 채워줄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대부분 SNS를 활용한 바이럴마케팅에 투입되거나, 기업에서 부과하는 과제들로 활동하게 된다. 팀원들과 밤 새워 아이디어를 모아 제출한 과제물은 대학생들의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자료가 되거나, 실제 기업의 아이디어 창고로 사용된다. 기업이 참여하고 배울 기회를 준 것이니, 거기에 쏟아야 하는 물질적, 정신적 에너지는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 된다. 인턴에 지원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은 정당한 급료 대신 '열정 페이'를 받는다. '열정 페이'란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돈이 적어도 섭섭해 말라. 아니, 아예 무급이어도 감사히 여겨라. 다 경험이고 공부이지 않느냐"는 기성세대들의 뻔뻔한 핑계다.

▲ <결정장애 세대>(왼쪽)과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른쪽).

나 또한 '자기계발'을 위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잡지협회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매일 아침 가방을 싸고, 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의 일원이 되어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토익이며 영어 말하기, 컴퓨터, 한자 등 잡다한 자격증을 하나씩 수집하면서 말이다. 눈앞에 다가온 대학 졸업은 유예한 상태였다. 재학생 신분으로 취업하는 게 졸업생보다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신입사원 채용정보를 확인하며, 닥치는 대로 '묻지마 지원'에 나섰다. 전공과 흥미에 맞춰 구직활동을 한다는 건 사치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나 자신을 꾸며야 했던 자기소개서를 쓰는 시간은 고됐다. 자소서는 가장 처절한 이 시대의 '문학'이었다.

힘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순간이 좋았다. 잘 하고 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기계발의 함정에 완전히 빠진 나는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대체 그때 나를 그렇게 밀어붙였던 동력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그렇게 밑바닥까지 스스로를 착취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아마 그 동력의 원천은 '불안감'이었고,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불안감이 만들어낸 가짜 동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윤제균 감독, 황정민·김윤진 출연. 2014)의 덕수가 돌아가신 아버지께 묻는다. "이 정도면 잘 살았지예?" 이런 노력은 대부분의 이십대가 하는 것이기에, 안타깝지만 생색낼 곳도 없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으며 생사를 걸고 가족들을 먹여 살린 어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미미하고 배부른 투정일지도 모르지만, "저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미래를 잊기로 했다

남들 하는 대로, 옆길로 새지 않고 달려왔지만 나와 친구들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정규직으로 취업한다는 건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정규직의 꿈을 이뤘다'는 누군가의 입사 후기를 봤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 정규직은 정말 '꿈'이 됐다. 누구도 대놓고 무시하지 않지만,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을 움츠러들게 한다. 2년 계약의 종료 시점을 떠올리며, '그땐 뭐할까?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뭐'라고 애써 상황을 낙관하곤 했다. 공무원 준비를 하던 친구는 자투리 시간에 편의점 알바를 하며 피우지 않는 담배 이름을 줄줄이 꿰게 되었다. 시급은 최저임금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 지금의 이십대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민음사 펴냄)에는 그 방향을 짚어내는 분석이 담겨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서른 살 저자의 시각은 제목처럼 조금은 절망적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133쪽)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글쓴이는 "일본의 이십대는 절망적인 시대를 살지만 역설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있으며, 주변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작은 공동체 내에서 상호 승인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비정규직이나 프리터·니트 족 등이 이미 만연한 일본 사회에서는 전 국민이 모두 중산층이라는 '1억 총중류(중산층 1억 명)' 캐치프레이즈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포기' 세대의 행진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다는 삼포세대는 어느새 사포세대가 되어 있었고, 곧이어 오포세대가 등장했다. 그리고 기어이 칠포세대를 보고야 말았다. 대한민국의 이십대는 연애, 결혼, 출산에다 인간관계, 내 집 마련, 취업, 마지막으로 희망까지 포기했다고 보도한다. 열 개를 채워야 이 신조어의 행진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릴까. 더 포기할 무언가가 남아 있기는 한가 싶다.

빈손으로 절망의 터널을 지나는 순간에 책으로라도 구원받아볼까 한다. <가장 사소한 구원>(라종일·김현진 지음, 알마 펴냄)에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온 정치인, 행정가, 교육자이며 외교가에 대학총장을 지낸 라종일 석좌교수와 안 팔리는 몇 권의 책을 낸 30대 초반의 에세이스트 김현진 씨가 나눈 서른두 통의 편지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며, 아직 자신은 세상에 '삐쳐'있는 것 같다는 고백을 한다. 라종일 교수는 "이 세상에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 되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적어도 에덴의 낙원 이후에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리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사실 개중에는 여전히 어른들은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는 독자로서의 투정을 불러일으키는 말들도 있었지만, 왜일까. 나는 젊은 에세이스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안타까움과 따끔한 질책, 담담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 노교수의 답신을 읽으며 시시때때로 울컥하곤 했다. 덜 자란 어른인 내가 바란 건 나보다 조금 더 자란 어른의 지지가 아니었을까.

"'로봇 다리' 수영 선수로 알려진 김세진 군의 어머님이 김 군을 이런 말로 단련시켰다 합니다. "넘어졌을 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가장 사소한 구원> 254쪽)

▲ <절망한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왼쪽)과 <사소한 구원>(오른쪽).

사회적으로 산적한 이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다 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건, 그 과정에는 손을 잡아 일으켜주려는 어른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아나운서처럼 잘 읽는다"고 칭찬해줬다. 나는 그 뒤로 국어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즐기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원동력은 여덟 살 때 들었던 칭찬 한 마디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한 어른은 나에게 힘주어 말씀해주셨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늦지 않았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는 지극히 평범한 문장 하나에 나는 이십대의 마지막을 헤쳐 나갈 힘을 얻었다. 아, 이제 이 긴 터널의 마지막이 보인다. 빛이 보인다.

* 이 글을 쓸 당시 양미영 씨는 취업준비생이었으나, 최근 BTN뉴스 기자로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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