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은 요리란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이자 그 자체로 삶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또 공기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와 의미를 자꾸 잊게 되는 숭고한 노동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제철 식재료로 요리하는 과정 속 이야기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가 지난 2월 개봉했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고 국내에도 소개되어 화제가 됐던 동명의 원작만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으로, 시장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은 달려야 하는 농촌 마을 코모리에 살고 있는 여성 이치코(하시모토 아이)의 사계절을 다룬 소품이다.
이치코는 한때 도시로 나가 살기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고향인 코모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삶은 씨앗을 뿌리고, 생명을 건사하고, 또 다른 생명의 에너지가 되어 줄 곡물을 수확하는 것으로 가득 차있다. 그는 스스로 키우고 채집한 식재료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요리한다.
실은 나도 얼마 전에야 집에서 다시 음식을 해 먹기 시작했다. 공부하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그 일이 바빠 집에서 무언가를 해 먹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뭔가를 해 먹겠다고 장을 보면 결국에는 먹는 것보다 썩혀서 버리는 것이 더 많아 세상에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음식 하기를 멈추었고, 대체로 끼니는 밖에서 얼렁뚱땅 해결하게 되었다. 물론 도시에서 고양이와 단둘이 사는 비혼여성이라 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이 염분에 절여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일상생활을 등한시하자 몸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요리를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일상생활의 가치를 되찾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랴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김치볶음밥부터 시작해 보았다. 맛있는 김치에, 참치에, 밥에, 참기름까지. '온갖 맛있는 것들을 다 넣었는데 이게 맛없을 리가 없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입 가득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만든 김치볶음밥은. 맛이. 없었다. "니맛 내맛도 없는", 볶음밥도 안 볶음밥도 아닌 그런 맛. 시쳇말로 '멘붕'에 빠져 SNS에 들어가 맛없는 김치볶음밥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랬더니 요리 좀 한다는 친구들의 노하우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김치는 볶기 전에 짜야 한다, 참치김치볶음밥엔 원래 참기름을 넣지 않는 법이다, 달달 볶기는 잘하였느냐 등 간단한 음식이라고 막 해도 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이 어떻게 오는가
이렇게 이제 막 요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에게 <리틀 포레스트>라는 풀 내 나는 이름의 영화를 만난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목가적인 일본 시골 풍광을 배경으로 건강한 식재료의 이미지와 함께 이치코가 차분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선보이는 각종 요리법이 매혹적이기도 했지만, 영화 속 이치코의 일상을 보면서 비로소 내가 왜 요리를 시작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살게' 하는 먹거리로부터 소외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지만, 곧 내가 먹는 것이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기도 했다.
영화는 '직접 경험한 것으로부터 얻는 지식'의 단단함에 대해서 말한다. 추상적으로 아는 것을 그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체험에서 오는 생명에 대한 지식, 그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진짜 지식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이치코와 마찬가지로 도시에 나갔다가 귀촌한 청년 유우타(미우라 타카히로)는 도시에 나가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코모리의 농사짓는 어른들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우타의 말처럼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쓰는 전기, 내가 마시는 물 그리고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도시인들은 알지 못한다. 그야말로 삶이 추상화되는 것이다. 지금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태어나 자랐고, 수확되거나 도살되어 내 식탁으로 오게 되었는지의 과정은 그저 '생산, 유통, 소비'라는 건조한 말 속에 숨겨져 버린다. 도시인에게 당근은 1000원짜리, 파프리카는 3000원짜리, 오리는 한 팩에 1만 원짜리일 뿐이다. 먹거리는 그저 숫자로 표시되기 때문에 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역시 사라진다. 도시인들이 점점 먹거리를 그저 '취향'으로 소비하게 되고, 농사나 요리처럼 먹거리를 생산하고 다듬는 노동 자체를 폄하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농사짓고 요리하는 이치코의 모습은 이런 도시인의 식문화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만든다.
요리한다는 데 자부심을 가져야
물론 누군가는 요리라는 '지긋지긋한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군가는 요리라는 '숭고한 노동'에 정성을 쏟을 경제적 여력과 시간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요리가 숭고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나 여러 이유로 요리를 못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끝나자 내 뒤에 앉아 있던 한 관객은 "영화가 시골 생활을 너무 미화한다"고 말했다. 농부로서의 고된 노동이 다뤄지기는 하지만, 그 노동의 고통은 묘사되지 않은 탓이다. 이런 비판은 삶을 지탱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기본적인 행위로서 요리를 찬양하는 이 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다 요리를 비롯한, 삶을 지탱하는 다양한 노동을 하찮게 여기게 되었을까?
혹은, 우리로 하여금 요리할 수 없게 하는 현대 사회의 삶의 조건은 과연 건강한 것인가? 요리는 우리의 삶을,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이자 숭고한 노동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먹거리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스스로 다룰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살림이야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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