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하이 푸시지역 도심구조 변화
1980년대 중국 지도부는 이전의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와 같은 사회주의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향후 어떠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선전(深圳)을 비롯한 5개의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실험을 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실험에서 거둔 경험과 노하우에 기초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줄곧 중앙정부 재정수입의 6분의 1을 차지하던 명실상부한 경제중심지 상하이(上海)는 199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국가급 개발구로 지정되어 본격적인 경제실험에 들어가는데, 핵심은 바로 황푸장(黃浦江)의 동쪽에 위치하는 푸동(浦東)지역의 개발이었다.
그런데 푸동개발은 황푸장의 서쪽 지역인 푸시(浦西)의 공간변화와 직접적으로 맞물려있었다. 푸시지역은 건국 이후 "생산자가 주인이 되는 도시"라는 사회주의 도시건설 이념에 의해 공장과 노동자 거주지역이 주된 경관을 이뤘다. 개혁기에 들어선 1980년대, 푸시지역에는 이전 시기에 농촌으로 하방(下放)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유동인구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1988년에는 상주인구가 1000만 명에 육박했다.
1990년대 들어서 푸동지역의 개발과 맞물려 진행된 푸시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정부주도 개발로 푸시지역 도심의 주택들이 철거되고, 기존 주민들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됐다. 하나는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받고 본인이 알아서 주택을 마련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부가 마련한 주택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거와 이주는 1990년대 중반 푸시지역에 도시기반시설, 상업시설, 고가의 아파트, 관공서 등이 들어선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데, 도심의 토지사용비용이 크게 증가한 상황에서 철거민들이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받아서 이주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도심의 판자촌뿐이었다. 따라서 상당수 철거민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푸시지역을 떠나 정부가 푸동지역에 마련한 주택으로 이주했다.
2. 석고문(石庫門) VS 공인신촌(工人新村)
이상과 같이 1990년대 중반부터 집중적으로 시작된 상하이 푸시지역 도시공간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상하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유발시켰고, 이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도시 랜드마크(city landmark)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상하이 출신 저명 문화연구자인 통지대학(同濟大學) 주다커(朱大可) 교수는 석고문 양식의 주택이 상하이의 문화적 랜드마크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태평천국(太平天國) 군대가 다가오자 이를 피해서 조계(租界)지역으로 몰려든 상하이, 장쑤성(江蘇省), 저장성(浙江省) 일대의 피난민들이 전통적인 사합원(四合院)과 서양식 다층주택을 혼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석고문 양식주택으로, 1920~30년대에는 상하이의 지배적인 주택양식이 되었다. 석고문 주택은 초기에는 이주해 온 부유한 농촌지주의 취향을 반영한 독채주택이었고, 중기에는 임대주택으로 사용되었으며, 사회주의 시기에는 여러 주민들이 뒤섞여 사는 주택이 되어 상하이 전체시민의 3분의 2를 수용할 정도였다.
석고문 주택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몰락한 자본가, 브로커, 영세업자, 수공업자, 쁘띠부르주아, 지식인, 대학생, 농촌출신 피난민, 건달, 기녀, 무녀(舞女) 등으로 아주 다양했다. 이후 개혁기 초기까지는 낙후하고 오래된 빈민촌이 되었고, 1990년대 푸시지역 개발로 상당부분 철거되었으나 일부 석고문 주택은 그것이 가진 상업적 가치에 주목한 정부에 의해서 보존 개발되어 중국을 대표하는 상하이 최고의 종합 쇼핑가를 구성하는 주된 경관으로 남아있다.
주다커의 주장은, 사회주의 시기에 노동자 거주지역인 공인신촌이 상하이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였지만, 1949년 이전에는 공인신촌이 없었고 개혁기에는 체제전환으로 사실상 공인신촌이 가진 의미는 퇴색되어버렸으므로, 공인신촌처럼 노동자계급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계층의 역사적 기억과 정서를 포괄한 석고문이 "시민(市民)신촌"으로서 마땅히 상하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상하이 문화연구자인 통지대학 교수 장홍(張閎)은 공인신촌이야말로 상하이를 대표하는 역사적 랜드마크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노동자 거주지역인 차오양신촌(曹楊新村)은 1951년 상하이 시정부가 '상하이 노동자주택 건축위원회'를 만들고 소련의 노동자 거주지역 이념을 수용하여 짓기 시작한 것으로 중앙정부와 상하이 시정부가 함께 기획·조성했다. 차오양신촌의 건설로 이전까지 판자촌에서 생활하던 상하이 산업노동자들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좋은 조건의 주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들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사회의 지도계급이라는 이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후 차오양신촌과 같은 공인신촌이 상하이 전역에 조성되었는데, 그것의 조형적 특징과 상징적 의미는 바로 당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이후 30여 년 동안 차오양신촌으로 대표되는 공인신촌은 상하이를 대표하는 건축기호로서 존재해왔지만, 개혁기에 들어선지 오래인 지금 당시 공인신촌에 살았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상하이를 논할 때 공인신촌의 정치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단지 오래되고 낡은 주택지역으로만 생각한다. 장홍은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면서도, 공인신촌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상하이 사람들의 문화심리 속에서 자리 잡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시민(市民)과 공인(工人)
이상과 같은 주다커와 장홍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주다커가 주장하는 석고문이 대표하는 "시민신촌"은 단지 노동자만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집단이 거주하는 주택양식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여기서 '시민'의 의미는 모호하다.
주다커는 시민의 의미를 각종 사회집단이라고 하는 다양성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여기서 시민은 국민을 뜻하는 공민(公民)이 아니라 도시민을 뜻한다. 즉 "시민신촌"은 1949년 건국 이전에는 상하이로 이주해 온 외지인들까지 포함하는 범위였지만, 이후 사회주의 시기는 물론 개혁기에 들어서서도 시민은 전적으로 도시민의 의미로 상하이 호구를 가지지 않은 농민이나 외지인은 완전히 배제되는 권리를 보유한 존재였다.
상하이는 개혁기는 물론 사회주의 시기에도 전국 최대의 경제도시로서, 농촌은 물론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우월한 도시공공재(urban public goods)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상하이 호구를 가진 시민에게만 제공되었다. 따라서 주다커가 말하는 상하이의 랜드마크 "시민신촌"은 도시민들에게만 허용된 거주지역으로서의 배타성을 지닌다.
둘째 주다커가 말하는 시민은 정치적 참여의 권리를 보유한 온전한 의미의 시민이 아니다. 따라서 "시민신촌"의 시민은 사회적 경제적 권리만을 보유하고 주권자로서 정치적 참여를 보장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시민은 단지 도시민일 뿐이다.
셋째, 주다커가 주장하는 시민신촌은 시민의 범위가 사실상 '상하이 도시민'으로 제한되는 배타성을 지닌 한계가 있지만, 1949년 이전까지로 역사적 범위를 넓혀 볼 때 자본가로부터 기녀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사회집단을 아우르는 다양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상하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상하이 석고문 주택양식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다양성보다는 소비주의, (쁘띠)부르주아적 취향의 상징으로 해석되는 것이 현실이다. 2001년 홍콩 부동산회사에 의해서 개발된 신톈디(新天地)는 중국을 대표하는 상하이의 초호화 쇼핑가 명품가인데, 당시 낙후한 빈민촌 정도로만 인식되던 석고문 양식의 주택들을 재개발하여 이 지역의 주요한 경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석고문 주택들은 원래 이 지역에 있던 프랑스 조계의 서양식 건물들과 어우러져 신톈디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여기서 석고문은 과거 그것이 지녔던 각종 사회집단을 포괄하는 다양성보다는 프랑스풍의 서양식 건물들과 함께 초호화 쇼핑가 명품가인 신톈디를 구성하는 주요 경관으로 소비주의와 (쁘띠)부르주아적 취향의 상징으로 바뀌어버렸다는 점이다.
장홍이 주장하는 상하이의 랜드마크 공인신촌은 어떤가. 첫째, 차오양신촌으로 대표되는 상하이의 공인신촌이 가진 "생산자가 주인이 되는 도시"라는 이념의 역사적 진보성은 충분히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하지만 이러한 "노동자의 존엄이 살아있는 생활세계"는 앞서 주다커가 주장하는 "시민신촌"의 시민이 지닌 배타성과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장홍도 인정하고 있듯이 1951년부터 입주가 시작된 공인신촌은 이후 30년에 걸쳐서 조성되는데 모두 10만여 명의 산업노동자에게 주택을 제공했다. 그런데 사회주의 시기 중국은 호구제도를 통해서 도시민과 농민을 구분하고 농민의 자유로운 도시이주를 철저히 차단했고, 농업부문에서 추출한 잉여를 도시공업부문에 우선적으로 투자했다. 따라서 공인신촌은 농민은 절대로 누릴 수 있는 도시민 노동자만의 주택이었던 것이다.
셋째, 동일한 도시 공업부문이라고 하더라도, 중·대형 국유기업과 그보다 소규모의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 사이에 제공되는 사회·경제적 복지 측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장홍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구사회"(舊社會)에서 항상 하류계층으로 열악한 주택에서 살던 노동자들 모두가 사회주의 중국의 공인신촌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 중 중·대형 국유기업의 이른바 "선진생산자"와 "모범노동자"들만이 이러한 주택에 거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 노동자는 상하이 현지인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으로 구성된 '소수정예'였다. 이렇게 볼 때 장홍이 주장하는 "존엄의 생활세계" 공인신촌은 그것이 가진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선발된 소수정예 노동자들이 중·대형 국유기업에 근무하면서 상하이 도시민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4. 21세기 상하이의 랜드마크는?
이상과 같이 주다커와 장홍이 주장하는 상하이의 랜드마크는 서로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양자 모두 각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상하이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그 역사성을 반영한 사회집단의 거주지역이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다커는 석고문이 사회주의 시기에 공인신촌에 주도적인 지위를 내준 것을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다양한 상하이 '시민'들의 주택으로서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홍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제기된 "사회주의 도시건설"의 이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성이 실현된 공인신촌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다커와 장홍은 여전히 20세기 역사와의 연속성 속에서 상하이 랜드마크를 상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푸시지역 공간이 보여주는 20세기(더 멀리는 19세기까지)의 역사성과 그것을 근거로 한 랜드마크 논쟁은, 동아시아의 금융허브를 꿈꾸는 공간생산이 한창 진행 중인 2015년 현재 상하이에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다커가 주장하는 석고문이 상징하는 "시민"은 그 다양성만으로 시대적 의의를 주장하기에는 "시민" 내부의 계급적 계층적 분화가 너무나 커져버렸고, 장홍이 주장하는 공인신촌이 상징하는 "노동자"는 계약에 기초한 임금노동자로서 더 이상 "공장의 주인"이 아니고 "생산 도시의 주인"도 아니다.
오히려 석고문과 공인신촌을 대신하여, 푸동지역 루자주이(陸家嘴) 금융중심지에 들어선 수십 개의 마천루, 대량의 철거민을 발생시키면서 건설한 상하이 엑스포 기념관, 그리고 "순수한 자본의 공간"으로 예측되는 상하이 자유무역지대가 21세기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아닐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