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의 실토
최경환 부총리의 한마디가 또 한 번 경제를 흔들었습니다. 최 부총리는 4일 한 민간연구소의 강연에서 "서민 입장에서 물가가 떨어지면 참 좋지만 지난 2월 물가는 담뱃값 인상분을 빼면 마이너스…. 저물가 상황이 오래 가서 디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참 큰 걱정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8월 한경 밀레니엄 포럼에서 "한국이 디플레이션 초기에 와있다"고 했다가 한 달 뒤 국회에선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디스인플레이션'이라고 밝힌 바 있으니 최 부총리의 진단은 '오락가락'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정의에 따르면 디플레이션이란 '2년 정도 물가 하락이 계속돼 경기가 침체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상황은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라는 신조어를 쓰는 게 맞습니다. 즉 물가상승률이 떨어지고 있지만(디스인플레이션)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가 된 지 2년이 되지는 않았으니까요.
문제는 최 부총리의 말대로 담뱃값 인상률을 빼면 이미 마이너스가 된 물가상승률이 계속 떨어질 것이냐는 데 있습니다. 물가가 하락하면 기업은 당연히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을테니 국내 총수요(소비+투자)가 줄어들겠죠. 여기에 수출까지 마이너스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니까 수요부족으로 인해 물가는 계속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이 2일 발표한 '1월 산업활동 동향'을 보면 산업생산은 작년 12월에 비해 1.7% 감소했고 광공업생산 증가율만 따로 떼어 보면 마이너스 2.7%로,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맞았던 2009년 12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소비는 더 나빠서 3.1% 줄어들었죠. 투자 역시 7.1% 감소했는데 특히 운송장비(자동차) 투자의 감소 폭이 컸습니다(-19.8%). 오로지 "불어터진 국수" 덕에 건축투자와 토목투자를 합쳐서 6.1% 늘어났을 뿐입니다. 한편 같은 날 한국은행은 1월 수출이 지난해 1월에 비해 10.0% 줄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소비, 투자, 수출 등 총수요를 구성하는 3대 요소의 '트리플 다운'이 일어난 겁니다.
이런 악순환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면 디플레이션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찬우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연말 밀어내기 수출의 기저효과, 금년에 설이 2월에 있었던 점, 심지어 따뜻한 날씨 탓에 소비가 줄었다고 강변하고 "유가 하락에 따른 세계경기 회복과 수출 증가 효과는 2분기와 3분기에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선진국들의 양적완화는 원화의 절상을 의미하고, 또한 중국의 성장률 둔화와 부품소재 수입대체도 우리의 수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으니까요.
더욱이 우리나라에는 가계부채라는 폭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디플레이션은 실질부채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똑같은 만 원의 빚이라도 연간 100%의 인플레이션 상황에선 실질 부채가치가 반으로 줄어드는 거지만(금년에 만 원을 빌려서 땅을 샀는데 땅값이 2만 원이 된다면 다음 해에 땅 절반만 팔아도 원금을 갚을 수 있겠죠.) 디플레이션 상황에선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거니까요. 더구나 담보로 잡힌 집값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LTV를 지키기 위해선 빚을 더 많이 갚아야 합니다. 따라서 디플레이션이 자리잡게 되면 심각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부채-디플레이션(debt-deflation)의 악순환이 급진전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제목에 '새로운 진단'이라고 한 것은 최경환 부총리가 "국민들은 고도성장기 기대감이 형성돼 있어 답답하시겠지만 그 당시와 비교해 여건들이 너무 어려워진 상태로 고도성장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며,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거론하면서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고 한 점입니다.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자고?
그는 부총리 인사 청문회 때도 이미 비슷한 발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최경환 부총리의 실제 정책은 오로지 부동산경기 부추기였습니다. 당장 빚 갚기에도 급급한 가계가 새로 빚 내서 집 사고, 빚 내서 전셋값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정책적으로 몰아갔죠. 해서 모든 나라가 부채축소(deleveraging)을 통해 회복의 기반을 다지는 가운데 한국 홀로 가계부채가 급증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새로운 진단, 낡아빠진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최경환 부총리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키자 기획재정부 고위공무원들이 5일 진화에 나섰습니다. "디플레이션이 아닌 상황에서 맞춤형 별도 대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이미 발표한 경제체질 개선과 경제활력 제고를 통해 내수를 회복하면 디플레 우려를 없앨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경제혁신3개년계획=줄푸세"가 디플레이션도 막을 거라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금리인하에 찬성합니다. 경기도 경기지만 미국이 금리인상을 할 경우에 대비할 필요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국 핫머니의 유입을 축소시키는 정책도 병행해야 하겠죠. 하지만 후자의 정책을 이 정부가 사용할 리 없고 금리를 내리면서 지금처럼 가계부채를 확대시키는 정책을 동시에 쓴다면 최악의 상황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기"를 다른 분야에서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최 부총리는 현상을 보기는 하지만 정책기조 전체를 바꿔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건 부인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완전히 다른 현상에 대해서 과거와 똑같이 자산시장 부양 정책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고도성장은 오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거죠.
최 부총리가 같은 강연에서 시사한 금융규제 완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 부총리는 "금융업이 뭔가 고장 났다"며 "과거 금융권이 10조 원 이상 세금을 냈는데 요즘은 3조~4조 원도 못 낸다"며 금융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위기를 빌미로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이었던 '금융업종 간 칸막이 완화, 건전성 규제 완화' 등을 '구조개혁'의 이름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을 게 뻔합니다. "자산시장이 붕괴하면 백약이 무효"라는 최 부총리의 말은 부동산 투기에 이어 금융투기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낡아빠진 발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융규제 완화("금융혁신"이라고 부를 겁니다)가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임금 인상'을 말한들 립서비스에 그칠 수 밖에 없겠죠. 정규직을 공격하는 게 비정규직 보호라고 간주하는 것도 낡은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지금 필요한 정책은 자산과 소득재분배에 의한 소비 확대, 그리고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투자, 특히 생태투자와 같이 시스템 개혁을 꾀하는 투자 확대입니다. 이런 정책을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소득주도 성장"입니다. 새 술은 이런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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