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와 어린이집 폭력 사건 이후, '돌봄'은 우리 사회 중요 이슈가 됐다. 하지만 '돌봄'은 CCTV 확대와 같은 감시 영역, 또는 훈육을 통한 예속 관계에 머물러 있다. '함께자리'는 새로운 '돌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아이들을 돌볼 줄 모르는 사회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어린이집 아동학대는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병의 한 '증상'일 따름이다. 기침을 한다고 기침병이라고 규정하면 치료가 힘들다. 기침감기인지 폐렴인지 폐결핵인지 잘 들여다봐야 한다. 기침을 한다고 기침약만 먹이는 것을 '대증요법'이라 한다.
최근 정부가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폐쇄회로화면(CCTV) 설치 의무화는 대증요법이라 하기에도 부끄러운 조치다(어린이집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영유아보육법 일부개정안'이 지난 3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기침을 한다고 입을 틀어막는 식이다. 마녀사냥하듯 해당 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처벌하는 것 또한 저마다의 책임 회피나 다름없다. 어린이집 환경 개선이나 교사 처우 개선이 필요하지만, 이도 당장 눈에 띄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뿐이다. 아이들을 돌볼 줄 모르는 사회가 된 현실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어린이집까지도 돈벌이의 수단이 됐다. 보육료를 정부가 지원하면서 어린이집이 아이 머릿수에 따라 권리금이 붙어 사고 팔린다. 어린이집 매매를 중개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억대의 권리금이 매겨진 '매물'들이 수두룩하다. 일반 점포처럼, 규모가 크고 목이 좋을수록 권리금은 올라간다. 아이 한 명당 평균 219만 원의 권리금이 붙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억대의 권리금을 주고 어린이집을 매입한 사람은 보증금과 월세에 교사 인건비를 감당하면서 투자한 돈을 뽑기 위해 편법 운영을 일삼게 된다.
교회도 신도 수에 따라 권리금을 붙여 사고파는 사회에서 이런 일은 그다지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돈에 중독된 사회다. 중독 상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일상화되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처럼 '돈독이 오른' 증상도 우리가 앓고 있는 고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다. 두드러진 증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병의 원인은 아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은 워낙 총체적인 고질병이어서 병명도 뚜렷하지 않다. 그냥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하는 게 가장 적확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세월호 참사는 그 증상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빈발하는 사고는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겠구나' 하는 위기감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하지만 기득권 집단은 암세포처럼 숙주가 죽을 때까지 번식할 기세다.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 행태를 보면,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면역체계가 백혈구를 바이러스로 인식하고 공격하는 이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갈수록 더 많은 세포들이 암세포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백혈구들은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
성장의 한계상황에 맞닥뜨렸음에도 성장의 관성과 단맛에 젖어 있는 이들이 암세포처럼 성장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이다. 승자의 독식이 패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승자는 탐욕을 거둘 줄 모른다. 부가세라는 이름으로 패자의 얄팍한 호주머니를 터는 짓도 서슴치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쟁을 원천 봉쇄 하는 사회주의 같은 응급처치가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의 싹마저 잘라버리고자 승자들은 헌법재판소까지 동원해서 선수를 쳤을까.
'근대병'이라는 고질병에서 벗어나려면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고질병을 진단하기를 '근대병'이라고 명명한다. 병을 제대로 치료하는 길은 먼저 병을 제대로 진단하는 데서 출발하고, 진단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병명을 제대로 붙일 수 있어야 한다면서. 암을 독감이라 불러서는 치료가 힘들다. 정명(正名)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근대병의 주요 증세가 면역력 결핍이라고 지적하는 선생은 근대문명의 충격으로 사회적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가치관의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고 진단한다.
근대병은 우리 사회만 않고 있는 병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난히 증세가 심각한 까닭은 어디 있을까. 식민지 시절을 겪으면서 전통 가치와 단절되고, 분단 현실 속에서 체제 경쟁을 하다 보니 그리 된 측면이 클 것이다. '이겨야 산다'는 논리가 일상 속에 체화된 셈이다. 승리가 곧 성공이라고 착각하면서 '필승'을 외치며 다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산다. 삶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보게 만드는 광고들이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다. 많이 소비할수록 더 높이 오를 수 있다고 유혹하면서.
"사고판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돈독이 오른 이들의 좌우명이다. 세계를 향해 "바이(Buy) 코리아"를 외친 대통령을 모셨던 나라여서일까. 이제 온 국민이 장사꾼이 되어간다. 한때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주문처럼 외치며 천시하던 장사꾼이 되기 위해 너도나도 안달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옛날에도 장돌뱅이 보부상과 달리 돈 많은 대상(大商)들은 천시하지 않았던 걸 보면 돈 버는 일을 천시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돈 독에 쉽게 중독되는 체질을 타고난 것일까.
대한민국을 팔아먹지 못해 안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통째 봉헌도 하려드는 분열증을 앓던 'CEO 장로님'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변함없이 자화자찬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이 병이 얼마나 고질인지 알 수 있다. 무덤에까지 가져갈 병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병든 뇌세포 하나 쯤 죽는다고 해서 고등 유기체가 죽지는 않는다. 희망을 가질 일이다. 감염되는 세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정상세포도 적지 않고, 면역체계를 회복할 길이 아주 없지는 않다.
김기협 선생은 우리가 맹신하고 있는 근대의 가치를 의심하는 작업부터 해나가자고 제안한다. 문제의 뿌리가 150년 전 개항기부터 이어진 것 이라고 볼 때 그동안의 처방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집권세력의 경제지상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나 인권처럼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치들 중에도 지나친 절대화로 인해 가치체계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다. 계몽주의에서 유래하는 '근대적 가치'에는 모두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본다."(1월 5일 자 <한겨레21>의 '증오의 한국사회, 진단 2015' 중 '친일파 속성 그대로인 사이비엘리트집단'에서 인용)
그야말로 가치관의 전면적인 재점검을 시작하자는 제안이다. 이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요구되는 작업이다. 수구 집단에게까지 기대할 일은 아니지만, 보수나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진지하게 이 제안을 숙고해볼 일이다. 동시에 전통의 가치를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반짝거리는 양은 그릇이 좋은 줄로만 알고 내팽개친 놋그릇들을 다시 살펴볼 일이다.
두려움을 떨치고, 부족한 그대로
아이를 돌볼 줄 모르는 사회를 만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책임'이란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목에 힘주는 사회이지만, 책임은 그 것을 느끼는 이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느끼는 이가 이 사회의 주인이다. 무책임한 사기꾼들이 주인 행세를 하려 드는 세상이라도 진짜 주인들이 정신을 차리면 사기꾼들은 발붙일 여지가 없게 된다.
돌봄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다. 계약 이전에 인간의 도리에 기반한 관계, 이해관계를 따지기 전에 인간관계를 먼저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다. 돌봄의 관계에서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도, 말로 주고 되로 받을 수도 있다. 그러자면 품앗이 육아를 하는 '숲동이' 엄마들이 그리하듯이 '먹튀'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너른 품이 필요하다. 부족한 이웃과도 함께할 수 있는 어진 마음이 돌봄의 마음이다. 이런 돌봄의 마음이야말로 돈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가 아닐까?
이런 돌봄의 마음을 가로막는 것은 두려움이다. 내 것을 잃을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 담장을 더 높이 쌓아올리고 싶게 만드는 그 마음. 손해 보는 짓을 하고 싶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이 벽을 쌓기도 한다. 때로는 정의감이 돌봄을 가로막을 때도 있다. 정의감은 우리를 자칫 '정의로운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자신의 정의로움에 집착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게 된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 곁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인간성 상실의 극단 을 보여주는 '일베'들을 양산해내는 이 사회에서 '가스통 할배'와 '일베'까지도 끌어안으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촛불이 가스통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사실 촛불을 위협하는 것은 가스통이 아니다.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할아버지들의 '정의로운 독선'까지 끌어안을 때 촛불은 더 빛날 것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 못지않게 이해와 연민이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다.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됩시다"라고 했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을 새롭게 되새기게 되는 요즘이다. 부족한 이웃을 끌어안을 때, 나의 부족을 또 누군가가 메워줄 것이다.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는 길 말고는 동지가 되는 길이 없음을 이제는 안다. 동지까지는 아니어도, 서로에게 좋은 이웃 이 되어 서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우리 사회도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이 길 말고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삶을 약속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을까.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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