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학교는 20세기를 악으로 채웠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학교는 20세기를 악으로 채웠다"

[민들레] 돌봄·② 대중은 우둔하지 않다

세월호 참사와 어린이집 폭력 사건 이후, '돌봄'은 우리 사회 중요 이슈가 됐다. 그러나 '돌봄'은 CCTV 확대와 같은 감시 영역, 또는 훈육을 통한 예속 관계에 머물러 있다. '함께자리'는 새로운 '돌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존 테일러 개토는 30여 년 동안 미국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학교제도의 대안을 제시해왔다. <민들레>는 2005년과 2009년 <바보 만들기>(김기협 옮김)와 <교실의 고백>(이수영 옮김)을 통해 국내에 개토의 독특한 게릴라 학습법을 알렸다. 다음 글은 출판 예정인 <Weapon of Mass Instruction> 중 일부다. 편집자

학습장애도 영재도 없다

정부 주도 학교 교육은 역사상 가장 과격한 모험이다. 아이들의 황금기를 독점하고 가정과 부모에 대한 불경을 조장해 가족을 소멸시킨다. 학교 구상의 청사진은 그리스나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에서 왔다. 인간의 가치가 희귀하다는 신학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에 이 개념이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 개념이 청교도를 거쳐 미국 역사에 전해졌으며, 사람의 재능이 생물학의 철칙에 따라 정해진다는 종 모양 곡선을 '과학적' 근거로 삼았다. 이 개념은 종교적 신념과 마찬가지며, 학교는 이 개념을 교리로 삼는 신전이다. 나는 이 신전에서 제를 올려 이단의 침투를 막고, 신도들의 기록을 자료로 천상의 피라미드를 정당화한다.

소크라테스는 가르치는 일이 정식으로 직업화되면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견했다. 학교에서는 쉬운 일을 어려워 보이게 만들고, 평신도를 사제에게 예속시켜 직업적 이해를 충족한다. 학교는 일자리 프로젝트와 계약을 통한 이익 제공, 사회질서의 수호자로서 그 중요성이 막중하기 때문에 '재구성'할 수 없다. 학교에는 그 행진을 보호하는 정치적 지원군이 있어서 대대적인 변화 없는 개혁이 잠시 나타나고는 사라진다. 개혁가조차 학교가 많이 변하는 것은 꿈꿀 수 없다.

데이빗은 4세에 글을 깨치고 레이첼은 9세에 글을 깨친다. 정상적인 발달을 거친다면 둘 다 13세가 됐을 때, 누가 더 글을 빨리 익혔는지 구분하기 힘들다. 5년 차이는 전혀 큰 의미 가 없다. 그러나 학교에서 나는 레이첼에게는 '학습장애'라는 딱지를 붙이고, 데이빗의 학습 속도를 늦춘다. 봉급을 받기 위해 데이빗이 내 말에 의존하도록 가르쳐 언제 가고 멈추어야 할지를 지시한다. 데이빗은 이 의존성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나는 레이첼을 '특별 교육 대상'이라 구분하고 떨이 상품 취급한다. 레이첼은 이 범주에 영영 갇혀 있을 것이다.
'잘 사는 아이'와 '가난한 아이'의 구분 없이 30년 동안 가르치면서 나는 학습장애가 있는 아이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으며, 영재라 할 만한 아이도 만나보지 못했다. 학교에 존재하는 모든 범주가 그렇듯 이것도(학습장애와 영재 구분)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성스러운 신화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의심스러운 가치가 깔려 있으나, 학교라는 신전을 지키기 위해 결코 검증받는 일이 없다.

단답형 시험, 종소리, 똑같은 시간표, 나이 구분, 규격화를 포함해 온 나라를 벌하는 학교 신앙의 모든 의식 뒤에는 이 비밀이 숨어 있다. 그러나 교육에는 정도(正道)가 없으며 개개인의 지문만큼 다양한 길이 있다. 교육하기 위해 서라면 교사자격증 소지자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격증이 보증하는 것은 '자격증도 교육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증거가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좋은 학교라면 돈도, 더 긴 교육기간도 필요 없다. 자유시장이 허락하는 선택의 기회가 필요하며 그 다양성이 모두의 욕구에 반응하고 모험을 받아주면 된다.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과정도, 시험도 필요 없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인간이 어떻게 배우는지에 무지해서, 또는 일부러 무관심해서 나온 것들이다.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시스템

수많은 수상과 보상으로 가득한 지난 30년간의 교직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토록 많은 시간을 제도 속에 보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중앙 집중적 학교교육이 존재하며, 거대한 세뇌도구이자 분류기계로 작동해 사람들에게서 아이들을 강탈한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나? 이것이 내 인생이었나? 하늘이시여.

학교는 종교다. 학교에 이렇게 성스러운 임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간이 우둔하거나 타락해서, 또는 계급 갈등 탓이라고 오인하기 쉽다.

보통 사람들은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려고 학교에 보낸다. 그러나 현대 학교가 가르치는 것은 '우둔함'이다. 예전에는 우둔함을 단지 무지하다는 정도로 여겼으나, 지금은 영구히 남는 수학적 범주로 둔갑했다. 이 범주에서는 멍청함의 정도를 상대적으로 나누어 '우수', '평범', '특별교육'으로 구분한다. 이 범주에서 학습은 시스템과 질서유지를 위해 계획적으로 배급된다. 멍청한 사람들은 더 이상 무지한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위험천만한 바보천치라서 정신 상태를 길들여야 하며, 상업적 거짓 정보가 이들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다량 주입된다.

새로운 우둔함은 특히 '중류-중상류 계급'의 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이 아이들은 부모와 얕은 뿌리로 이어진 채, 사회와 부모로부터 순응하라는 압력을 받아서 스스로는 깊이 사고할 수 없다. 이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자기들이 얻은 학위와 자격이 말해주는 대로 무언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하게 이혼하거나 실직할 때, 사는 의미가 사라져 갑자기 공황이 들이닥칠 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불완전하게 이어지던 성인의 삶은 엉망이 된다. 영국의 사학자 앨런 불록(Alan Bullock)은 '악이 무능력의 상태'라고 했다. 불록의 말대로라면, 학교는 20세기를 악으로 가득 채운 셈이다.

일단 뛰어난 아이들도 이 시스템에 의해 망가지면 도덕적으로 해체되고 집단이 인정하는 내용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 집안에 전국 장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자기 꿈은 '커다란 기계 속의 작은 부품'이 되는 것이라고 해서 내 마음을 뭉갠 적이 있다. 학교 교육을 받으며 지나치게 단순해진 아이들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며, 오래도록 쉬게 놔두면 안절부절 못한다. 그래서 마비된 아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존할 거리를 찾으며 영리한 어른들에게 쉽사리 착취당한다.

사람마다 바보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해석의 근거가 다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친절을 베푸는 일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종형 곡선 모델), 자본가들의 억압과 학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며(신 마르크스주의 모델),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칼뱅주의 모델). 번식이라는 게임에서 얼간이를 자격박탈하려는 자연의 방식이라거나(다윈이론 모델), 누군가에게는 더러운 일을 맡기려는 사회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실용적 엘리트주의 모델), 혹은 전생에 쌓은 업보의 탓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불교 모델). 근거가 무엇이든 사회질서에서 바보의 등장에 대한 설명을 믿는 사람이라면 거대한 관료조직이 나서서 바보의 문제를 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잠든 사이에 바보들에게 살해당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사람들 대부분은 바보가 그리 많지 않아서 바보를 보살피는 일자리도 많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전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나의 입장은 확고하다. 우둔한 대중은 필요에 의해 꾸며져야 했을 뿐이며, 실재하지 않는다.

헥토르는 문제가 없다

이제 13세가 된 헥토르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키가 작고 마른 체형에 올리브색 피부, 눈이 크고 검은 이 아이는 센트럴 파크 북쪽의 스케이트 링크 입구를 빠져나가려 곡예 하듯이 몸을 비틀던 참이었다. 교사로서 헥토르를 안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그전까지는 실제로 안 적이 없었고 그때도 이 아이가 보여준 수수께끼 같은 행동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할 뻔했다. 헥토르는 주머니에 입장권이 있는데도 내보이지 않고 그대로 입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지금 이 아이가 제정신인가?' 표를 내야 움직이는 자동문의 가로 막대 사이에 헥토르가 끼인 순간 나는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헥토르, 왜 몰래 들어가려는 거야? 너 입장권 가지고 있잖아." 그랬더니, 헥토르는 표정으로 '왜 소리 질러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거든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실은 내가 자기 속내도 모르고 한 말에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헥토르는 엉뚱한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자동 회전문의 막대가 맞물리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때 걸릴 경우에 대비해 손에 입장권을 들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 안전한 방법이 있을까?'

나는 나중에 헥토르를 이해할 만한 단서를 찾으려 학적부를 훑어보다가 이 아이가 그 짧은 인생에서 무법자로서 정말 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00년 전 같으면 엉덩이를 얻어맞고 끝날 일이었겠지만, 지금 헥토르의 '범죄 행각'은 사회복지사업체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도 남았다. 그전에 헥토르는 뉴욕 주에서 평가가 제일 낮은 학교에 다녔으며, 이 학교는 주 교육당국이 운영권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한 학교 군에 속해 있었다. 헥토르의 학년에는 13개 학급이 있었는데, 그중 9개 학급은 헥토르가 속한 학급보다 상위권이었다. 헥토르는 자존심을 휩쓸어 버릴 듯 위협하며 격하게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느라 기진맥진한 연어 같았다. 학교는 고의로 큰 물을 방류해 아이들을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엄격하게 구분된 다섯 개 범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매우 우수-우수-발전가능-평범-특별교육'(마지막 범주에 속한 아이들은 다른 범주에 속한 아이들보다 금전적 가치가 세 배나 높다. 이 아이들에게 있지도 않은 몹쓸 결함을 찾아내라고 장려금을 지급받기 때문이다.)

헥토르는 '평범'이라는 불운한 범주로 분류되었다. 이 범주는 다시 A-B-C-D 네 개의 하위범주로 나뉘며, 가장 불리한 위치인 '특별교육'보다 바로 위에 '평범 D'가 있었다. 헥토르가 여기 속했다. 특별교육은 또래들에게 평생 배척과 멸시를 받는 종신형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헥토르가 비록 D일지언정, 평범으로 분류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헥토르는 정말로 저주받은 집단 바로 위, 엷디엷은 자비의 단층에 둥둥 떠 있었다. 규격화된 시험의 결과, 헥토르는 중간인 아이들보다 3년 정도 뒤처져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헥토르는 단순히 궁지에 몰린 것 이상으로 생매장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스링크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헥토르는 총을 들고 근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가 체포당했다. 총은 가짜로 밝혀졌지만 교직원과 교장의 눈에는 진짜 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헥토르는 그날 아침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일찍 나와서 자기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아직 정상 수업하던) 어린 아이들을 풀어주려고 했다. 자기 딴에는 그 조그만 스파르타쿠스 같은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려고 한 일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교직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처음 들었는데 마침 교장이 내 쪽으로 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개토 선생.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시간을 1년 전으로 되돌려 고등학교 신입생이 된 헥토르를 보자. 두 번째 성적표에 헥토르는 전 과목 낙제를 기록하고 무단결석으로 기록해도 좋을 만큼 결석이 잦다. 이 무자비한 학적부에 그려진 헥토르의 모습은? 가난하고,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 소수집단 출신에 중요한 사람들에 게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며 우열반 안에서도 바보, 입장권을 들고도 무임승차하려던 괴상한 아이, 여기에 총잡이 전력까지 있으니 고등학교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다. 대부분은 헥토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시스템은 이렇게도 쉽게 한 아이를 낙인찍었으며, 그 아이의 앞날도 예언했다.

이 사회는 수많은 헥토르에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헥토르는 20세기의 매 십년마다 수백만 명씩 늘어나며 학교 관계자를 번민에 빠뜨리는 아이다. 미국 공립학교를 물류공장으로, 행동과 태도변화를 위한 병원으로 전환시켜 교육의 사명을 붕괴시킨 아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가 우리 반과 헥토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교장이 영화 제작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학교 시스템이 형편없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개토 선생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이 숨 막히는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오직 혼돈뿐일까? 국가는 헥토르가 학교교육의 문제라는 관점을 팔아넘기고 있다. 이런 착각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악마다. 수많은 가면과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는 능력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강제 학교 교육은 혼돈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으로 배치되도록 고안됐고, 그 시작은 헥토르와 그 부류를 보호의 명목으로 가두는 일이었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믿는다. 문명이 살아남으려면 인간의 본성에서 불합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충동을 부단히 물리치고 가두어 그 악마 같은 생명력을 없애야 한다고 말이다. 이들에게서 광신도의 열기가 느껴진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