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외무장관 모임인 유로그룹은 24일 그리스에 대한 기존 구제금융을 4개월 연장하기 위한 조건으로 치프라스 정부가 제시한 개혁안 리스트를 승인했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 12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우크라이나 휴전 협정을 타결했습니다.
이로써 유럽은 당면한 두 개의 위기를 일단 모면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내전이 핵강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확산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았고, 그리스 외채 위기에 의한 유로존 붕괴의 가능성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휴전협정과 외채 협상은 당장의 급한 불을 끈 미봉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취약한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독일 주도의 협상으로 유럽의 위기를 해결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유럽이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걸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그리스 외채 협상과 우크라이나 휴전 협정의 배경 및 내용과 함께 향후 유럽의 진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는 지난 20일 2월말까지로 예정된 기존 구제금융을 오는 6월 말까지 4개월간 연장하는 조건으로 기존 구제금융의 조건인 긴축안에 바탕을 둔 자체 개혁안을 제출하기로 국제채권단과 합의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리스의 급진좌파 시리자 정부가 긴축안 철회 등 당초 공약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지출, 추가적인 민영화 억제 등이 담겼습니다. 시리자 정부가 집권 공약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긴 셈입니다. 이번 합의에 대해 <가디언>은 시리자 정부가 그리스의 경제 운용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채권단이 일방적 지시에 따르지 않게 됐다는 것이죠.
개혁안은 정치권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는 특권재벌 올리가르히에 대한 과세 확대 등 탈세와 부정부패 척결을 우선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민영화와 관련해서는 이미 진행된 사안은 원상회복하지 않지만, 추가적인 민영화는 재고하기로 했습니다. 최저임금은 당장 인상하지는 않지만 집단교섭권 도입으로 노동자 입지를 강화할 예정입니다. 또한 공공지출이 확대되지 않는 선에서 주거 보장 및 실업자를 위한 의료보험 지원 등 인도적 위기 대응책도 마련됐습니다.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은 유로존 회원국 의회의 승인을 거쳐 발효됩니다. 이번 협상으로 그리스 정부는 자국의 경제 운용에 대한 주도권을 일정 부분 되찾은 반면, 그리스외의 협상을 주도한 독일은 기존 구제금융 방식과 채권단(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의 틀을 유지하는 명분을 지키면서 유로존 붕괴라는 최악의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리스는 실리를, 독일은 명분을 챙긴 셈이죠.
한편 지난 12일 우크라이나 휴전협정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필사적인 외교 노력에 의해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2월초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시작으로 모스크바, 워싱턴, 오타와, 민스크 등 8일간 무려 8개 도시를 순방하는 초인적인 정상외교를 펼친 끝에 (지난 해 9월에 이어) 2차 민스크 휴전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메르켈이 이처럼 필사적인 외교 노력을 펼친 이유는 우크라이나 내전이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유럽 안보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지난 14일자 기사를 통해 메르켈 평화외교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슈피겔>은 메르켈이 급박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로 '데발체베'를 꼽습니다. 데발체베는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동부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로, 이곳에 주둔해 있던 6천-8천명의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반군에 완전히 포위돼(2월 8일) 전멸 위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전투 가능 병력은 약 3만명 정도인데 이중 6천명 이상이 무너진다면 우크라이나 정부의 군사적 패배는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 무기 지원을 적극 검토하면서 우크라이나 내전이 세계의 양대 핵강국인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리전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높아졌습니다. 그 경우 핵전쟁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결국 메르켈은 지난 6일 프랑스와 올랑드 대통령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푸틴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우크라이나 휴전을 위한 대강의 합의를 이뤄낸 뒤 9일 워싱턴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설득했습니다. 메르켈은 4시간에 걸친 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내전의 군사적 해결은 가능하지 않다면서 '인내'에 바탕을 둔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당시 미 정부 내에서는 조 바이든 부통령, 존 케리 국무 장관 등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에 찬성했으나 오바마 대통령의 결단으로 일단 독일, 프랑스의 외교 노력에 동참했다고 하는군요. 11일 밤부터 12일 오전에 걸쳐 17시간동안 민스크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오바마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90분간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의견을 교환했다고 합니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협상장에 대기하고 있던 동부 반군 지도자들을 설득해 휴전협정을 추인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휴전협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탓에 불만이 컸으나 푸틴의 설득으로 휴전협정을 추인한 것입니다.
13일 오전 타결된 2차 민스크 휴전협정에서 러시아는 3가지를 양보하고 3가지를 얻어냈습니다. 첫째 지난 해 9월 1차 휴전협정 이후 동부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분리주의 반군은 휴전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셋째 내전 당사자의 중화기 후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현 전선을 기준으로, 반군은 지난 해 9월 전선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러시아의 양보 사항입니다.
반면 향후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에 가입할 경우 동부 분리주의 지역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올해 안으로 예정된 개헌 작업에서도 동부의 동의를 얻는다는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전자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등과 관련해 동부 반군 지역에 일종의 거부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개헌의 핵심은 지방분권화(또는 연방화)인데. 앞으로 동부 지역은 개헌을 통해 고도의 자치를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최대 성과는 이번 휴전으로 서방측의 추가 경제 제재를 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독일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휴전 협정을 어길 경우 우크라이나에 경제 제재를 가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협상 결과는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 및 동부의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나온 배경은 우크라이나의 군사, 경제적 상황이 매우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슈피겔>에 따르면 독일의 대외정보기관인 BND는 '우크라이나 군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에 있으며' '반군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사기가 저하되고 있고' '병력 부족으로 반군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상황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포로셴코의 무능과 부정부패, 그리고 내전에 따른 경제난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2월 이후 우크라이나 통화(히브니아) 가치는 달러화 대비 75%나 하락했으며 GDP는 10% 마이너스 성장이었습니다. 반면 인플레는 19%나 됐습니다. 올해에도 IMF 등의 구제금융이 없다면 마이너스 10% 성장이 예상됩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제2의 마이단(지난 해 2월 22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권좌에 몰아낸 반정부 시위)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미하일 샤카시빌리 전 조지아 대통령 같은 사람이 "현재의 상황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4~6개월 내에 민심이 폭발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샤카시빌리는 지난 2004년 미국의 지원으로 조지아 대통령에 올랐던 인물로, 포로셴코 지지자입니다.
특히 메르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은 푸틴이 미국의 대(對)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반겼다고 하는군요. 미국이 무기 지원을 할 경우, 그동안 은밀하게 진행돼왔던 미국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물론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이라는 점을 러시아 측은 강조했다고 합니다. 현재 러시아 국민의 푸틴에 대한 지지도는 85%에 이릅니다. 나아가 러시아의 한 온건파 인사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무기들은 곧 동부 반군에게 빼앗길 것이 분명하니, 우리로서는 그저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답니다. 실제로 독일 정보기관 BND는 미국의 최첨단 무기는 우크라이나 정부군에 도움이 아니라 부담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미국의 첨단 무기를 다룰 실력이 없기 때문에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슈피겔>은 이번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통해 두 가지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다, 둘째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분할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우크라이나 평화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해결을 있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제시했으나 두 번째 윈칙을 지킬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죠.
(우크라이나의 분할 또는 연방화가 사태의 유일한 평화적 해결책이라는 점은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존 페퍼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 Can Ukraine Gnaw Its Way out of Trouble?)
<슈피겔>은 메르켈의 우크라이나 평화 외교에서 다음 세 가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독일의 국민 여론과 부합되는 것이라고 메르켈을 극찬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평화를 위해 싸워라'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라' '미국에 굴복하지 말라'입니다.
독일 요아킴 가우크 대통령은 지난 해 "이제 독일은 (자신의 경제력에 걸맞게) 국제 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일 및 유럽의 이익을 위한 독자적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메르켈의 평화외교는 독일 나아가 유럽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국의 국익과는 다른 외교 노선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국이 신자유주의 원칙의 관철,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의 경제적 통합을 가로막을 수 있는 수단으로 우크라이나 내전을 촉발한 반면 유럽은 내전의 종식과 러시아와의 화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메르켈의 이번 평화외교는 유럽이 독자노선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우크라이나 내전과 그리스 외채 위기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며 언제든 위기 상황으로 반전될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은 지난 23일 <한겨레> 칼럼(유럽이 자초한 '유럽의 위기')에서 최근 유럽이 겪고 있는 위기의 책임은 유럽 자신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20여년간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접근을 받아들였고, 또한 미국이 밀어붙인 나토의 동진에 동조한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회민주주의적 전통, 그리고 보다 공평한 경제라는 유럽연합 초기의 약속을 저버리고, 미국의 러시아 포위 및 약화를 위한 나토 동진에 동조한 것이 그리스 및 우크라이나 위기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죠. 과거 제레미 리프킨이 제시했고, 고 노무현 대통령도 선망했던 '유러피언 드림'이 무너진 것은 유럽이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페퍼 소장의 지적이 일리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압적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근원적 문제는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 독립언론 '살롱'의 패트릭 스미스 기자는 우크라이나와 그리스 등 현재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신자유주의라는 우리 시대의 괴물이 일으킨 것이며, 인류는 현재 총칼이 동원되지 않은 신자유주의와의 3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이외의 모든 사회적 대안을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지구촌 도처에서 군사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Neoliberalism is our Frankenstein: Greece and Ukraine are the hot spots of a new war for supremacy)
한편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자 마이크 허드슨은 미국은 유럽과 러시아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일으켰지만, 그 결과는 러시아가 유럽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 유럽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냉전이 끝난 이후 유럽의 기술과 자본, 러시아 등 구 소련의 자원이 결합해 유라시아에 자급자족적이며 번영하는 지역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이었으나 유라시아의 독자적 경제공동체 결성을 한사코 막으려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지적합니다.
유라시아의 독자적 경제공동체 결성을 막는 것은 19세기말 이래 영국의 지정학적 목표였으며 최근에는 브레진스키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유럽과 러시아의 자연스런 경제 협력을 가로막으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과 영국의 지정학 사고의 바탕에는 경제적 경쟁세력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경쟁세력으로 전환되며 그 경우 세계의 경제 패권을 독점하려는 미국의 국익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는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허드슨에 따르면 지난 12일의 민스크 휴전 협상 당시, 푸틴은 메르켈과 올랑드에게 다음 두 가지 선택지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자원과 유럽의 기술을 바탕으로 번영하는 경제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나토 동진을 추종해 러시아와의 일대 전쟁을 감수할 것인가. 허드슨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유럽이 미국을 따르는 것은 유럽과 러시아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 세계 평화에도 해가 되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과연 유럽은 어느 길을 걸을까요? 그 첫 시금석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여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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