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래왔다. 전쟁은 아마도 가장 오래됐고, 손쉽게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으며, 그리고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업이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다. 또한 이윤은 돈으로 계산되지만 손실은 인간의 목숨으로 지불되는 유일한 사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사기'야말로 전쟁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믿는다. 전쟁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권력) 내부'의 극소수 사람들만이 알 뿐이다. 전쟁은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가 희생하는 사업이다. 전쟁을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
미국 해병 역사상 가장 용감한 군인이며, 병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스메들리 버틀러(1881∼1940년) 장군의 저서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의 첫 대목이다. 1935년 출간된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 반전 도서로 꼽힌다. 하지만 버틀러 장군은 모든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미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필요하지만, 미국 자본 및 대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침략 전쟁에는 반대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버틀러 장군은 어떤 군인이었나
'바나나 전쟁'이란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 승리 이후 중미 및 카리브해 국가들(파나마, 온두라스, 니카라과, 멕시코,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등)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을 말한다. '바나나 전쟁'이란 말은 이 지역 국가들이 바나나나 키우는 미개한 국가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군사 개입은 미국 대기업 및 금융가들의 진출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 미국 해병이 수행했으며 때로는 해군이 함포 사격으로 지원을 하고 육군 병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바로 함포 외교(gunboat diplomacy)였다. 군사 개입 사례가 너무도 많아 미군은 1921년 <작은 전쟁들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매뉴얼을 펴내기도 했다. 바나나 전쟁은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발표하고 아이티 주둔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종료됐다.
중미 및 카리브해 국가들에 대한 바나나 전쟁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가 바로 버틀러 장군이었다. 그는 주로 바나나 전쟁을 통해 16개의 무공 훈장을 받았으며, 특히 미국 최고의 훈장인 '의회 명예 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2개나 받았다. 미군 역사상 의회 명예 훈장을 2개 받은 군인은 19명뿐이며 해병으로서는 버틀러 장군이 유일하다.
그는 1935년 잡지 <커먼 센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 자신의 군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현역 군인으로 33년 4개월을 복무했으며 그 대부분을 대기업과 월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조폭(a high class muscle man)으로 일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를 위한 사기꾼, 조폭이었다. 1914년 나는 멕시코, 특히 탐피코를 미국 석유업계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이티와 쿠바를 내셔널시티뱅크가 돈을 긁어모으기에 적당한 장소로 변모시키는 것을 도왔다. 월가의 이익을 위해 중미 6개 국가를 침탈하는 것을 도왔고, 1902∼1912년에는 브라운브라더스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 소탕을 도왔다. 1916년 미국 설탕업계가 도미니카공화국에 진출하는 것을 도왔으며, 1903년에는 온두라스를 미국 과일 기업들이 활동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1927년에는 스탠다드오일이 아무런 방해 없이 중국에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알 카포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줄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기껏해야 시카고의 3개 구역에서 사기 행각을 벌였지만, 나는 세 대륙에 걸쳐 그 짓을 했으니 말이다."
1881년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퀘이커 교도이자 유력한 공화당 하원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세이던 1898년, 나이를 속이고 미국-스페인전쟁에 소위로 참전한 이래 필리핀 식민 전쟁, 중국 의화단 사건, 1차 세계대전 등 숱한 전장을 누볐다. 1929년 48세의 나이로 최연소 해병 소장이 됐다. 당시 미국 해병에서는 소장이 최고위 장성이었다.
1931년 버틀러 장군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미움을 사 사실상 강제 퇴역 당했다. 이탈리아 측의 항의를 받아들여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한 것이다. 버틀러 장군은 남북전쟁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된 최초의 장성이었다. 군법회의 결과는 경고에 그쳤지만 결국 그는 1931년 10월 50세라는 이른 나이에 군을 떠나야 했다.
당시 후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보수적 정치인들과 경제계 거물들은 유럽의 파시즘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좌파 정당 척결과 노동조합 해체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무력화, 군비 확장을 통한 대규모 수요 창출 등 파시스트적 정책이 1930년대의 대공황이라는 경제 위기를 벗어날 유력한 해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원래 공화당 지지자였던 버틀러 장군은 퇴역 이후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루스벨트를 지지했으며,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막기 위한 강연 및 저작 활동을 벌였다. 특히 1932년 1차 대전 참전 군인들의 보너스 요구 투쟁을 지지하고, 1933∼1934년에는 루스벨트 정부 전복을 겨냥한 쿠데타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1932년 여름, 1차 대전 참전 군인 및 그 가족 등 약 4만3000여 명이 수도 워싱턴에 모였다. 자신들에게 약속한 전쟁 보너스를 조기 지급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의회는 1924년 1차 대전 참전 군인들에게 1925년 이후, 1945년 이전에 전쟁 보너스(1000달러)를 지급하겠다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참전 군인들이 보너스의 조기 지급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당시 버틀러 장군은 이들의 농성장을 방문해 퇴역 군인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라며 격려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의회의 거부로 무산됐고,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에 의해 농성은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어린이 1명을 비롯해 2명이 사망했다. 당시 버틀러는 맥아더보다 훨씬 더 높은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그는 현역 군인 시절, 몸소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물론 부하들에게 자상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편 1933년 일단의 금융가와 대기업 소유주들이 버틀러 장군에게 군사 쿠데타를 제의했다. 한 채권 중개업자를 내세워 전국의 퇴역 군인 50만 명이 워싱턴으로 행진해 루스벨트 정부를 전복시키고 버틀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파시스트 군사 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비즈니스 플롯(Business Plot)'으로 알려진 쿠데타 음모였다. 버틀러는 이러한 사실을 미국 의회에 알렸다. 하원 특별조사위원회는 1934년 11월에서 1935년 2월에 걸친 조사 후 최종 보고서에서 버틀러의 증언 중 일부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J. P. 모건을 비롯해 음모 당사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관련 사실을 부인했고 <뉴욕타임스>, <타임>(당시 J. P. 모건 소유였다) 등 유력 언론들도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결국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별다른 후속 조치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루스벨트 정부 초기 미국 파워엘리트들의 속내를 보여주는(즉 미국의 파시스트 정부를 염원하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은 사기다>는 바로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나온 책이다. 이 책은 본문이 23쪽에 불과한 소책자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에 관한 노장군의 번득이는 통찰이 간결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오랜 기간 군대 생활을 하면서 전쟁은 사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었다. 민간인으로 돌아온 이제 나는 전쟁은 사기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게다가 또 다른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나는 전쟁의 실체를 직시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고 말한다. 1차 대전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미국이 또 다른 세계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전쟁국가 미국
미국은 왜 1차 대전에 참전했나
이 책은 모두 5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전쟁은 사기다!'에서는 국민 대다수의 희생으로 극소수가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전쟁의 본질을 밝힌다. 2장에서는 '누가 전쟁의 이윤을 챙기는가', 3장에서는 '누가 전쟁의 부담을 지는가'를 조목조목 보여준다. 4장에서는 전쟁이라는 사기 놀음을 막을 수 있는 3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5장 '전쟁이여 지옥으로!'에서는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한 진정한 이유를 밝히면서 또 다른 세계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5장을 시작으로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불과 5개월 후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회에 요청했고, 1917년 4월 전쟁에 뛰어들었다. 버틀러 장군은 그 5개월 동안 미국 국민의 의사는 무시됐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5개월 만에 윌슨 정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그 답은 '돈'이다. 그는 독일에 밀리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윌슨 대통령에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 한가하게 농담할 때가 아니오. 우리가 밀리고 있단 말이오. 우리는 당신네들(미국의 은행가, 무기 제조업자, 투기꾼, 수출업체 등)에게 50∼60억 달러를 빚지고 있소. 만일 우리가 진다면, 사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이 전쟁 빚을 갚을 수 없소. 그리고 승전국인 독일이 이 빚을 갚진 않을 거요. 그러니…."
1차 대전 당시 미국 최대의 은행가였던 J. P. 모건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 전쟁 물자를 독점 공급했다. 현금 지급이 아닌 외상이었다. 그러니 영국 등이 패전한다면 막대한 군사 물자 대금을 회수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국이 참전했다는 게 버틀러 장군의 설명이다. 버틀러 장군은 미국의 참전과 관련한 연합국 간의 협상 내용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졌더라면 미국은 절대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쟁의 실상을 알았다면 미국 국민들은 일개 은행가의 전쟁 빚을 받아내기 위해 수십만 명에 이르는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러한 실상은 당시에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고, 윌슨 대통령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고상한 이상을 내세워 미국의 참전을 강행했다. 그 결과 400만 미국인이 전쟁에 참가했고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나중의 통계에 따르면 전사자는 11만6000명, 부상자는 20만4000명).
버틀러 장군은 1차 대전이 끝나고 18년이 지난 지금(1935년), 세계의 민주주의는 후퇴했으며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란 윌슨 대통령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얘기다. 결국 1차 대전은 미국 국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J. P. 모건을 비롯한 경제 엘리트들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익을 챙기는 자, 누구인가?
1차 대전 동안 미국의 전쟁 비용은 520억 달러에 이른다. 어린아이를 포함해 국민 1인당 400달러의 전쟁 비용을 댄 셈이다. 미국이 (스페인전쟁을 통해) 해외 진출을 시작하기 이전인 1898년, 미국의 국가 부채는 1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후 그 액수는 250억 달러로 늘어났다. 즉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한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미국 국민 1인당 200달러의 전쟁 빚을 안게 된 것이다. 미국 국민은 아들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이 전쟁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
반면 1차 대전의 전쟁 비용 520억 달러 중 실제 전투에 사용된 비용은 390억 달러이며 전쟁에 따른 이윤은 160억 달러에 이른다. 즉 평균 이윤율은 41퍼센트인 셈이다. 그리고 160억 달러의 이윤으로 2만1000명의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생겨났다. 미국 국민 1억3000만 명(1935년 당시)의 세금과 수십만 군인의 목숨을 대가로 2만1000명의 거부가 태어난 것이다.
"1차 대전을 통해 미국에서만 2만1000명의 거부가 탄생했다. 그나마 이들은 성실하게 자신의 소득을 신고한 사람들의 숫자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득을 속인 채 거부의 대열에 합류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억만장자들 중 소총을 들어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참호를 파본 사람은 또 얼마인가? 생쥐들이 들끓는 참호 안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당해본 부호들이 있는가? 이들 중 전투 현장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전쟁의 부담은 누가 지는가? 일반 국민들이다.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과 몸과 마음을 다친 군인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 그뿐만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은 대를 이어 등골이 휠 정도의 세금을 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 기업들은 전쟁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윤을 챙겼을까? 버틀러 장군에 따르면 미국 기업의 평균적인 이윤율은 6∼12퍼센트 정도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 그 비율은 최고 20, 60, 100, 300, 그리고 1800퍼센트까지 올라간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연방정부가 무한정 돈을 대주었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화약 제조 회사인 듀퐁은 전쟁 이전 5년간(1910∼1914년) 연 평균 600만 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 기간(1914∼1918년) 연 평균 이윤은 5800만 달러로 950퍼센트나 증가했다. 미국이 참전한 시기는 1917년이지만, 전쟁 초기인 1914년부터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전쟁 물자의 대부분을 미국이 공급했다. 베들레헴 철강의 이윤은 전쟁 이전(1910∼1914년) 연평균 600만 달러에서 전쟁 기간(1914∼1918년) 4900만 달러로 늘어났다. 유에스(U.S.) 스틸의 연평균 이윤은 1억500만 달러에서 2억4000만 달러로, 구리 생산업체인 아나콘다는 1000만 달러에서 3400만 달러로, 유카 카퍼의 연간 이윤은 500만 달러에서 21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이 5개 기업의 총 이윤은 전쟁 이전 1억3748만 달러에서 전쟁 기간 4억830만 달러로 20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군화 등을 생산하는 센트럴 레자의 경우, 전쟁 이전 3년간 연 평균 이윤은 116만7000달러였으나 1916년의 이윤은 1550만 달러로 무려 1100퍼센트나 증가했다. 제네럴 케미칼은 전쟁 이전 3년간 연평균 이윤 80만 달러에서 전쟁 기간에는 1200만 달러로 1400퍼센트가 증가했다. 핵심 전쟁 물자인 니켈을 생산하는 인터내셔널 니켈의 연간 이윤은 전쟁 이전 400만 달러에서 전쟁 기간 7350만 달러로 1700퍼센트가 증가했다. 심지어 설탕 제조업체인 아메리칸 슈가는 전쟁 이전 20만 달러에서 1916년 600만 달러로 이윤이 3000퍼센트 증가했다.
65기 연방의회 상원 문서 259호에 따르면 122개 육류 회사, 153개 면화업체, 299개 의류 기업, 49개 철강업체, 340개 석탄업체 등이 전쟁 기간 동안 자기자본 대비 적게는 100퍼센트에서 많게는 7856퍼센트의 이윤을 거둬들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버틀러 장군은 금융가들이야말로 전쟁 이윤의 알짜배기를 거둬들이는 자들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대부분 파트너십으로 운영되는 금융 회사들은 영업 실적 공개 의무가 없다. 따라서 이들 금융가들이 1차 대전을 통해 수십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음이 확실하지만, 이윤의 엄청난 규모만큼이나 그 실상도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상원 조사위원회도 그 규모를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미국 기업들이 생산해낸 전쟁 물자들은 모두 제대로 전쟁 수행에 이용됐을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국민들의 세금으로 대기업들이 엄청난 돈 잔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버틀러 장군에 따르면 미국의 군화 제조업체는 전쟁 기간 동안 연방정부에 3500만 켤레의 군화를 납품했다. 미국의 참전 군인은 400만 명, 따라서 1인당 8켤레 이상의 군화를 정부에 팔아먹은 셈이다. 버틀러 장군은 "내가 지휘한 연대는 딱 한 켤레씩만 지급받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끝난 후 무려 2500만 켤레의 군화가 재고로 남았다. 3500만 켤레에 해당되는 군화 대금은 이미 연방정부가 모두 지불한 뒤였다.
1차 대전에는 기병대가 참전하지 않았음에도 수십만 개의 말안장이 제조돼 미국 정부에 팔렸다. 대령은 자동차나 말이 아닌 사륜마차를 타야 한다며 6000여 대의 사륜마차를 만들어 정부에 납품한 자가 있는가 하면, 주요 전쟁터인 프랑스에는 모기가 없었음에도 자그마치 6000만 개의 모기장이 정부에 납품됐다. 버틀러 장군은 "아마도 전쟁이 더 오래 지속됐더라면 이들은 (모기장 수요 창출을 위해) 모기를 납품해 프랑스로 보내려 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비행기 제작업체들은 무려 10억 달러 상당의 비행기와 엔진을 정부에 납품했으나, 단 한 대도 전쟁에 투입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무려 52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이 지출됐고 이를 바탕으로 2만1000명의 거부가 탄생한 것이다. 버틀러 장군은 1930년대 상원 조사위원회(나이 커미티)가 전시 중 전쟁 산업(이른바 '죽음의 상인')의 실상에 대한 조사를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그 결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전쟁의 부담은 누가 지는가?
그렇다면 전쟁의 부담은 누가 지는가? 모든 국민이 진다. 미국 정부는 전비 충당을 위해 리버티 본드(Liberty Bonds)라는 국채를 발행했다. 금융가들은 액면가 100달러의 리버티 본드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커다란 차액을 남겼다. 국민들에게 100달러에 채권을 판 다음 가격 조작을 통해 값을 낮춰 84달러, 86달러에 사들인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가격을 올려 정부에 판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것은 역시 군인이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거나 신체적으로 불구가 되는 것은 물론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틀러 장군은 1차 대전 참전 군인들을 위한 국공립 병원 18곳을 방문했다. 퇴역 군인 중 5만 명은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이었다. 3800명의 산송장이 수용돼 있던 밀워키의 한 병원 원장은 이들 퇴역 군인의 사망률이 일반인의 3배라고 말한다.
전사나 신체적 불구가 전부는 아니다. 전쟁에 참가한 모든 젊은이가 겪는 정신적 충격은 너무도 크다. 버틀러 장군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농장, 사무실, 공장, 학교에서 일하고 공부하던 멀쩡한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살인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180도 돌변을 강요한 것이다, 군중심리와 애국심, 대대적 프로파간다를 통해 이들은 2년간 오로지 죽이는 일, 또는 죽임을 당하는 일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사회로 돌아와서는 다시 한 번 180도 돌변하라고 한다. 군중심리도 없이, 상관의 지시나 조언도 없이, 전국적인 프로파간다도 없는 채로 다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적응하라고 한다. 더 이상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방치해둔다. 너무도 많은 훌륭한 젊은이들이 결국은 망가지고 만다. 그들 혼자서는 '180도 돌변'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디애나 주 매리온에 있는 퇴역군인병원에서는 1800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혀 지낸다. 이 중 500명은 쇠창살 감옥에 갇혀 있다. 사람으로조차 보이지 않는다. 신체적으로는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마어마한 전쟁의 열광, 그리고 광적 흥분 상태의 갑작스런 종말을 이들은 견뎌내지 못한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생업과 학업을 누리는 동안 참전 군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임해야 한다. 하지만 군인들은 몸으로만(전사 또는 부상) 전쟁의 부담을 지는 것이 아니다. 전투의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스페인전쟁(1898년) 때까지 군인들은 돈을 위해 싸웠다. 전투에 참가하는 대가를 지불받은 것이다. 남북전쟁 때는 전쟁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연방정부 또는 각 주정부는 군에 입대하는 대가로 최고 1200달러를 지급했다. 스페인전쟁 때도 포상금을 주었다. 예를 들어 적의 선박을 나포하면 군인들에게 일정액이 지급됐다. 그러다가 상금을 주는 대신 훈장을 주는 제도가 도입됐다. 이제 군인은 자신의 참전을 대가로 돈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훈장 사업(medal business)이다. 남북전쟁 이전에는 훈장이란 것이 없었다. 의회 명예 훈장이 처음 제정된 것은 1861년이다.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너무도 극성스러워 하느님도 자원입대할 판이라고 버틀러 장군은 비꼰다. 독일 목사는 신의 이름으로 적을 죽이라 하고, 미국 목사도 신의 이름으로 적을 죽이라는 선전에 광분하고 있다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누구도 전쟁의 진짜 이유는 돈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죽음이 어마어마한 전쟁 이윤을 낳는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고국의 동포가 만든 총알에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국 특허로 만들어진 어뢰에 의해 내가 탄 배가 침몰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영광스러운 모험에 참가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1차 대전 참전 군인의 월급은 30달러였다. 그나마 절반은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정부나 지역사회가 군인 가족을 부양할 수 없으므로 군인 자신이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15달러는 고국의 조선소나 탄약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의 일당을 약간 넘을 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6달러는 상해보험에 들어간다. 문명화된 국가라면 정부가 대줬어야 할 돈까지 군인에게 부담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인 손에 들어가는 돈은 고작 월 9달러. 이것도 끝이 아니다. 군인들은 리버티 본드까지 사야 했다! 1차 대전 동안 참전 군인들이 산 국채의 액수는 자그마치 20억 달러나 된다.
참전 군인의 가족들도 부담을 진다. 사랑하는 자식, 남편, 아버지를 전쟁터에 보낸 가족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밤잠을 자지 못한다. 만일 그가 전사했거나 부상자로 돌아오면 그 고통을 나눠 가져야 한다. 신체적 부상이 없더라도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을 지켜보며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 빚을 갚기 위해 대를 이어 세금을 내야 한다.
전쟁이라는 사기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극소수가 엄청난 이윤을 얻는 반면 국민 대다수가 생명을 비롯해 엄청난 부담을 지는 전쟁이라는 사기극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버틀러 장군은 직업군인이나 관료들이 참여하는 이른바 '군축 협상'으로는 전쟁을 없앨 수 없다고 강조한다. 병사 없는 지휘관, 전함 없는 제독이 되기를 원하는 직업군인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직업군인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버틀러 장군은 "군축 협상의 본질은 우리 편의 군비를 증강하는 반면 상대편의 군비를 축소하기 위한 게임"이라고 지적한다. 군축 협상으로는 결코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버틀러 장군은 전쟁을 없애기 위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즉 전쟁을 위해 젊은이들을 징집하기 전에 자본과 기업과 노동도 징집하라는 것이다. 전쟁으로 큰돈을 버는 은행가, 무기 제조업자, 선박 제조업자, 그리고 노동자들에게까지 참전 군인과 똑같이 30달러의 월급을 받게 하라는 것이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군인들이 30달러의 월급을 받는다면 이들 자본과 기업, 노동자들 모두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 장군은 "군인들을 징집하기 한 달 전에 이들 자본과 기업, 노동자들에게 군인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을 용의가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결단코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참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 투표권을 가진 국민투표를 통해 참전 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미 미국의 많은 주에서 재산이라든가 문자 해독 능력 등으로 투표권을 제한한 많은 전례가 있는 만큼, 전쟁에 관해서는 전쟁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투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쟁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에 몸소 참여할 가능성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실제 전투를 치러야 할 국민들이 직접 참전 여부를 결정하자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군사력을 오로지 방어 목적으로만 운용하자는 것이다. 버틀러 장군은 국토의 양면이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커다란 바다에 접해 있는 미국을 침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면서 소수의 군사력으로도 충분히 미국을 방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미국의 전함은 해안에서 200마일(320킬로미터) 이내를 작전 범위로 한정하고, 항공기의 경우 정찰 목적까지 포함해 500마일(800킬로미터)로 한정해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는 1898년 미국 해군 전함 메인호가 쿠바 아바나 항구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미국-스페인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사고로 메인호가 침몰했으며 이것이 미국-스페인전쟁을 촉발했다. 아바나와 미국 연안 사이의 거리는 200마일이 넘는다).
전쟁에서 이윤을 없앨 것, 전쟁을 직접 치를 사람이 전쟁 개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할 것, 미국의 군사력을 방어 목적으로만 한정할 것이라는 버틀러 장군의 제안은 물론 현실화되지 못했다. 1차 대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1920∼1930년대 미국에서는 국제 분쟁에 대한 불개입주의(보통 고립주의로 일컬어지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폭격으로 불개입주의는 일거에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한다. 미국의 전쟁 참여를 막기 위해 분투했던 버틀러 장군은 이보다 1년 6개월 전인 1940년 6월 위암으로 별세했다.
미국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내걸고 1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위의 두 가지 목표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초래했다.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전쟁 배상 요구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고, 자유주의적 국제 무역 질서가 무너지면서 대공황을 초래했다. 그리고 유럽의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면서 세계는 20년 만에 1차 대전보다 더 큰 규모의 국제 전쟁에 휘말린다.
1600만 명의 미군이 참전한 2차 대전은 미국인들에게 '좋은 전쟁(Good War)'으로 각인돼 있다. 전쟁이 가져온 군수산업 호황은 뉴딜 정책으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벗어나게 했으며 미국이 세계 최강의 패권 국가로 떠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940년 15퍼센트였던 실업률은 1944년 1.2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실업자 수도 1940년 800만 명에서 1944년에는 67만 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한편 미국의 참전 기간인 1942∼1945년 미국의 2230개 대기업의 이익은 전전(1936∼1939년)에 비해 41퍼센트나 늘어난 144억 달러를 기록했다. 2차 대전은 군수산업이 미국 경제의 주춧돌이 되는 중대한 계기였다. 이후 미국은 '총과 버터'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쟁경제로 변모했다. 1960년대에 시작한 베트남전쟁의 실패로 미국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경제의 전통은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고 있다.
* <전쟁은 사기다>의 한글 번역판이 2013년 6월 '공존'이라는 출판사에서(권민 번역) 간행됐다.
* 다음 호(3월 13일)에는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한 진정한 이유는 자유, 민주주의, 정의와 같은 고상한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경제의 세계적 팽창, 즉 미국 경제 엘리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을 파헤친 캐나다 역사가 자크 파월(Jacques Pauwels)의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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