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 나는 명절 연휴를 앞두고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상복부의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다. 나는 이런 심한 통증은 처음 겪어보았다. 나와 같은 의사들은 병원을 선택할 때 통상 보통사람들과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선후배 등 아는 의사들이 많은 병원은 편안하지가 않기 때문에 되도록 익명이 보장되는 병원을 선택한다. 또 의사인 환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사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즉, 의사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으면 치료 과정에서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의사인 환자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에게도 편한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도 사소한 의료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다는 보고도 있다.
가까운 중소병원 이용의 편익
나는 집과 직장에서 가까운 곳, 그리고 내시경과 초음파 검사가 가능하고 수술과 입원을 할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인근 중소병원 중의 한 곳을 선택했다. 필요한 각종 진단을 편리하게 받을 수 있고, 진단의 결과에 따라 예상되는 수술이나 입원 등의 치료를 빨리 추진할 수 있는 곳을 고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병원이나 대형 종합병원은 기피 대상이다. 대학병원에서는 아무리 그 의과대학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외래진료를 예약하고, 각종 검사를 기다리고, 수술방과 입원실을 기다리는 과정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한 외래진료는 1차 의원을, 그리고 입원이나 수술을 해야 하는 질병은 2차 병원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번에 나도 내과 외래에서 진찰을 받고, 바로 내시경 검사를 통해 위나 식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방사선과에서 초음파를 통해 담도 결석과 담낭염이 심하게 온 것을 확인했으며, 곧바로 외과의사와 상담하여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병실을 잡고 입원 준비를 하는 등의 모든 과정이 반나절 만에 끝났다. 이는 대학병원 같은 대형병원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이를 통해서도 나의 선택이 적절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중소병원들은 병상 가동률이 매우 낮기 때문에 빈 병실이 많고, 수술실도 항상 여유가 있어 이용하는 환자들의 입장에서는 대형병원에서보다 훨씬 나은 대우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요즘에는 이들 중소병원에서도 전문 과목을 넘어 세부 전문 과목까지 갖추고 있어서 폭넓게 환자들에게 접근하고 여유 있게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특정 암 등의 고난이도 질환이 아닌 경우에는 가급적 대형병원보다는 의료비 부담도 적은 중소병원을 권하고 싶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시설과 장비만 보면서 대형병원들이 무조건 좋은 병원인 줄 알고 환자와 가족들 모두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물론 이것은 환자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법률과 적절한 규제를 통해 의료전달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거나, 의료비의 본인 부담과 수가 관련 정책 등을 더 세분화해서 질병의 종류나 중증도에 맞게 의료기관을 적절하게 이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인데, 이것이 잘 되고 있지 못한 게 문제이다. 보건복지부나 국민건강보험공단 같은 정부기관에는 국민과 환자들에게 의료 이용에 대한 올바른 정보와 적절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나 대한병원협회 등의 의료 관련 단체들과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더 적극적으로 그런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의사의 환자 체험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중요성
병원에 입원한 뒤, 나는 목에 걸린 가래를 뱉어내기 위해서는 수술 부위에 통증이 가지 않도록 온 신경을 모아 조심조심 기침을 해야 했다. 머리를 감거나 몸을 일으키는 사소한 동작조차도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힘들게 해 나갔다. 나는 의사로서 그야말로 '환자 체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의과대학에 다닐 때 들었던 "아파본 사람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실감나는 시간이었다. 진단과 수술, 그리고 입원의 전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환자의 심리 상태에서부터 사소한 불편함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체험해보는 것보다 더 잘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환자 체험을 통해 내가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지난 3년 동안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의 복지국가 운동 진영이 진행해왔던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절박성과 시급성이었다. 병원의 6인실에서 TV를 큰 소리로 듣는 보호자 때문에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 간에 다툼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상급병실 차액의 부담을 정상화하여 재정적 부담 능력 여부가 아니라 질병의 종류나 환자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병실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벽까지 근무하는 간호사를 보면서는 간호 수가의 정상화를 통한 의료 인력 확충의 필요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내가 입원한 병원은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었지만, 같은 분이 연속해서 이틀 야간 근무를 하는 경우를 보면서 야간 교대에 대한 부담이 작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병상 당 간호사 수 및 병실 당 간호사 수는 모두 OECD 평균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간호사 1명이 다른 OECD 국가들에서 간호사 3명이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번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근무시간이 길고 업무가 과중하면 제대로 된 서비스가 나올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이 관련된 의료나 아동을 돌보는 보육 등의 대인 서비스 분야는 시급히 수가나 인건비의 정상화를 통해 적정 수준과 적정 수의 인력이 근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너무 바쁘고 힘들면 친절하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 중대한 실수를 하게 되고, 이는 환자의 목숨이나 안전을 해치는 등의 치명적인 피해로 돌아온다. 야간 교대 근무를 하면 하루를 쉬게 하거나,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적정한 양의 일을 분배하는 것은 특정 의료 인력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한 정책이나 의료기관만을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바로 나와 가족의 안전과 제대로 된 진료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나는 선택 진료를 신청하지 않았고 간병에 대한 지출도 없었다. 그럼에도 3박 4일의 수술과 입원 치료에 총 340만 원의 의료비가 나왔고, 국민건강보험공단 부담금을 제외한 본인부담은 약 150만 원이었다. 나는 전날의 검사비용까지 합해서 이번 담낭염 수술로 약 200만 원을 지출했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의 중위소득은 연 1118만 원이었다. 이들에게 200만 원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실제로 의료비 부담이 가계 지출의 10%를 넘어가는 가구가 전체 가구의 20.6%나 되고, 이들 가구가 더 빈곤해질 확률이 매우 높다. 여기서 나는 본인부담금 연간 100만 원 상한제를 포함한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건강보험 재정 흑자의 진짜 이유는?
나는 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국민건강보험의 당기 흑자가 4조 5869억 원, 누적 적립금이 12조 8072억 원이라는 보건복지부의 발표를 볼 수 있었다(2/16, 2014년 국민건강보험 재정 현황). 통상적으로 적자는 나쁜 것이고 흑자는 좋은 것이다. 국민건강보험법에도 해당 연도 급여비의 5∼50%(2조∼20조 원)까지를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적립금으로 적립하도록 되어 있으니, 이는 법률을 위반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민단체들이나 언론은 이에 대해 잘 했다고 칭찬하기보다는 보건복지부가 국민건강보험의 흑자를 냈다고 비난하거나 흑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적자'가 발생하는 것도 좋지는 않지만, 흑자가 났다는 말은 국민들로부터 징수한 건강보험료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직도 의료비의 많은 부분이 환자 본인이 부담해야 할 비보험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런 상태에서 국민건강보험이 연속 4년째 흑자를 냈다는 것은 정부가 국민에게 필요한 급여 확대를 소홀히 했다는 뜻이다. 또한, 지난해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수입 증가가 7.4%(3조 3291억 원)인데, 지출의 증가는 5.7%(2조 3868억 원)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의료수가의 통제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꾸준히 확대해왔던 국민건강보험의 검진사업과 국민 5대 암 무료검진사업이 10년을 넘어가면서 그 효과가 나타난 것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일반검진의 수검율이 60.0%('07)에서 74.1%('14)로 높아졌고, 당뇨로 인한 입원비 증가율은 10.2%에서 5.6%로, 고혈압으로 인한 입원비 증가율은 24.5%에서 5.4%로 낮아졌다. 또, 암 급여비 증가율은 15.7%('07~'10)에서 3.1%('11~'14)로 낮아졌고, 암 입원 급여비의 증가율도 같은 기간 14.2%에서 2.1%로 급속히 낮아졌다. 국민건강보험의 지출 감소에는 그동안 이루어졌던 이런 정부 정책의 긍정적인 영향도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 급여비를 진료형태별로 보면, 외래진료와 약국진료로 인한 급여비는 증가했으나 입원급여비만 8.4%('09~'13평균)에서 6.9%('14)로 낮아졌다. 경제사정이 어려워 본인부담이 적은 의료 이용은 늘었으나 본인부담이 큰 입원 등의 의료이용을 기피하거나 축소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게 된다. 실제로 2013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를 보면, 병원에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한 환자의 21.7%는 경제적 이유를 원인으로 꼽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최저 생계비 이하 비수급 빈곤층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통해 최근 1년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한 경험이 있는 비수급 빈곤층이 36.8%이나 된다고 보고했다. 즉,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낮아 의료이용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적극 나설 때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국민건강보험이 흑자가 되면 더 이상 보험료를 올리자는 주장이 힘을 잃게 되는 상황이다. 직접세 증세가 고소득자들에게 불리한 것처럼, 우리나라 같이 소득 불평등이 OECD 국가들 중 최고로 심한 나라에서 건강보험료 인상은 고소득자와 사용자들에게 불리하다. 건강보험료 인상을 하지 않으면 급여 확대도 못하고, 높은 본인부담금으로 인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매달 나가는 푼돈(건강보험료)에서는 유리할지 몰라도, 결국 나중에 목돈(높은 본인부담금과 민간의료보험료)이 나가야 되므로 중산층과 서민들에게는 크게 불리하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의 입장에서는 건강보험재정의 획기적 확충 없는 이런 종류의 국민건강보험 재정 흑자 기조는 유리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부담율은 25%로 OECD 국가들의 평균인 34%보다 약 9%포인트나 낮다. 이는 조세부담률도 낮지만, 사회보장 기여율도 엄청 낮기 때문이다. 그동안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창해왔던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적어도 입원 의료비에 대한 보장성 수준을 90% 수준으로 높이고,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의 3대 비급여 항목을 급여화하여 연간 부담하는 의료비의 본인부담금이 실질적으로 100만 원을 넘지 않도록 하자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관련 학자들과 전문가들에 의해 충분히 검토와 인정을 받았고,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권후보의 대선공약으로 채택되기도 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했던 "4대 중증질환 완전 국가보장"은 행정적으로 시행하기도 어렵고, 현재의 진행 상황으로 볼 때 제대로 될 것 같지도 않다. 설사 시행되더라도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기초연금 2배 인상"이 여야 대선후보의 공통 공약으로 채택되어 현 정부에서 제도화된 것처럼, 2017년 대선에서는 "건강보험 하나로"가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보험 재정의 흑자가 났으니 이제 건강보험료 인상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근시안적이고 국민 다수의 이익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흑자를 계기로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할 수 있도록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함께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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