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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반공영화'가 반공법 위반 판결 받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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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반공영화'가 반공법 위반 판결 받은 이유는?

[문학예술 속의 반미]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III.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5. 미술 속의 미국

1961년 4월 부산에서 "양키는 가라"는 제목의 벽보가 붙었다. 그런 '불순한' 벽보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그 무렵 한미 간에 맺어진 불평등한 경제협정 및 주한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열악한 노동환경이 빈번하게 보도되면서 반미감정이 높아지는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1966년엔 사진작가 주명덕이 <섞여진 이름>이라는 사진집을 발간했다. 주제는 "미군들이 이 땅에 주둔하면서 뿌린 씨앗 : 혼혈아 문제"였다. 이미 앞에서 얘기했듯, 주한미군과 한인여성 사이의 국제결혼은 1960년대에 급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렵엔 국제결혼을 경멸하는 사회 분위기가 컸고, 혼혈아들은 미군 주둔의 부정적 부산물로 간주되었다.

1969년엔 김지하의 지도로 오윤을 비롯한 서너 명의 젊은 미술가들이 <현실동인>이라는 진보적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현실동인 제1선언"을 통해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의 현실주의를 내세웠다. 서구적 미학 개념을 벗어나 우리 미술에서 민족미학의 근원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국의 미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오직 민족적인 것만이 세계적인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곧 본질적인 것이며 오직 동시대적인 것만이 영원한 것이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196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미국에서 '팝아트' 또는 '네오 다다'의 이름 아래 물질과 일상성의 피동적 수락 또는 그것에 대한 비틀린 야유로서 선풍화"한 자연주의도 거부했다. "그것은 예외 없이 우리나라에 상륙했고 또한 예외 없이 잘못되었다"면서. 그들은 미술가들이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포함해 현대사회 현실의 중요한 모순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동인>이 준비하던 첫 전시회는 서울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들이 '반체제적'이고 '반미술적'이라며 반대하고 중앙정보부에 고발하는 바람에 열리지 못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그림은 모두 압수당하고 말았다.

6. 음악 속의 미국

1964년 서울대 미학과 학생으로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앞장섰던 김지하는 <최루탄가>라는 개사곡(改詞曲) 노랫말을 썼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행했던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의 시초랄까.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곡에 "탄아 탄아 최루탄아 / 팔군으로 돌아가라 / 우리 눈에 눈물지면 / 박가분이 지워질라"라는 노랫말을 붙여 1964~65년 학생 데모 때 널리 불리도록 이끈 것이다. 여기서 '팔군'이란 주한 미8군을 가리킨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최루탄을 제공하는 미국을 비난한 것인데, 시인 김수영은 1964년 발표한 수필에서 이 개사곡이 훌륭한 민요 정신을 지녔다고 극찬했다.

실제로 미국이 제공하던 최루탄은 1960년대 한국사회에서 불만이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1960년 3월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데모를 하던 고교생 김주열이 미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보도됐다. 널리 알려진 대로 4월 혁명의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둘째, 1964년 5월 전국 학생조직이 미8군사령관에게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권에 최루탄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내용이었다.

셋째, 1964년 5월 서울대학교에서 자유를 위해 단식투쟁하던 학생들이 최루탄 유령을 내걸었는데, 거기엔 "Made in U.S.A"라고 새겨져있었다. 넷째, 윤보선 전 대통령은 1965년 4월 미8군사령관에게 공식적으로 항의서한을 보냈다. 시위 진압에 사용되는 최루탄이 많은 시민들과 야당 정치인들을 부상으로 이끈다는 내용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는 민족주의 부흥의 영향으로 한국의 전통 민요와 국악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국악인들은 특히 미국 음악을 비롯한 서양 음악에 압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각급 학교의 음악 교육 커리큘럼을 개선해야 한다고 정부에 진정하기도 했다. 이 탄원 자체가 '반미'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민족주의 부흥은 분명히 '반외세'를 표방하고 있었다.

7. 연극 속의 미국

1960년대 군사정권 아래서 학생들은 항의데모를 연극 공연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63년 11월 서울대학교에서 농촌운동에 우호적이던 일단의 학생들이 "향토 의식 초혼 굿"이라는 전통극을 공연했다. 굿 가운데 장례식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외세에 대한 노예적 굴종을 꼬집은 것이었다.

더 진지하고 심각한 공연 시위는 1964년 5월 굴욕적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는 가운데 열렸다. 약 1500명의 학생들이 군사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다. 그들은 1960년 4월 혁명이 외세의 압력과 매판자본 그리고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었는데, 1961년 5.16쿠데타가 이러한 가치들을 훼손했다고 선언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일방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마비된 한국 경제를 ‘이중 종속’의 구조 아래 놓이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엔 서울대학교의 한 연극 동아리가 한국 작가들이 쓴 창작극을 공연할 것을 주창했다. 그 무렵 한국 연극계에서 유행하던 번역극 공연을 거부한 것이다. 이러한 목표 아래 무대에 올려진 연극 가운데 하나가 김영수의 1946년 소설 <혈맥>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었다. 1940년대 소설에서 소개했듯, 이 작품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관한 왜곡된 내용과 1945~48년 미군정시대 좌익과 우익 사이의 투쟁을 그린 것이다.

8. 영화 속의 미국

1960년 10월 약 500명의 영화인들은 정부에 외국영화 수입을 제한해달라고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실제로 1962년 1월 영화법이 처음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한국은 국내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수입했다. 예를 들어, 1952년부터 1961년까지 10년 동안 외국영화는 1200편 이상이 수입된 반면 한국영화는 500편도 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외국영화의 약 4분의 3은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1961년 영화감독 유현목은 소설가 이범선의 <오발탄>(1959)을 영화로 만들었다. 1950년대 소설에서 다루었듯, 이 원작은 한반도의 분단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죄로 작가의 해직을 이끈 '문제' 소설이었다. 영화 역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적성'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한 동안 상영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진흥공사에 따르면, 이 영화는 훗날 1919년부터 1989년까지 70년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 걸작 200편"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1964년 12월 영화감독 이만희는 <7인의 여포로>라는 영화와 관련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조사받았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국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일곱 명의 간호장교를 호송하는 과정에서 중공군들이 이들을 겁탈하려 들자 분개한 북한 장교가 그들을 사살하고 간호장교들을 구해주는데, 이 때문에 북한에 머물 수 없게 된 인민군 장교가 간호장교들을 따라 부하들과 함께 자유 대한의 품으로 귀순하는 것이다. 반공영화가 반공법 위반이 되어버린 기막힌 사건인 셈이다.

서울지검공안부는 이 영화가 "감상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군을 무기력한 군대로 내건 반면, 북괴의 인민군을 찬양하고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비참상을 과장 묘사, 미군철수 등 외세배격 풍조를 고취하였다"는 혐의로 감독을 입건했다. "중공군이 여군들을 겁탈하려는 것을 괴뢰군 수색대장으로 하여금 제지케 하여 위안부로 하여금 '장교님의 행위는 훌륭했어요'라는 등 칭찬하게 한 것은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의 국가 활동을 고무, 동조, 찬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공보부 자문위원회는 기소 내용과는 반대로 이 영화가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반공영화라고 결론지었다. 영화감독들은 1965년 2월 이만희 감독이 체포된 후 창녀들을 경멸하는 게 미국을 수치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신중하고 관대한 처리를 요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는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지만 그 영화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여러 장면을 삭제하고 다시 촬영하는 등 보완수정을 거친 영화는 제목조차 <돌아온 여군>으로 바뀌어 상영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1962년 시행되고 1963년과 1966년 수정된 영화법의 검열조항에 의하면 동맹국과의 우호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있는 영화는 모두 금지되었다. 미국을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북한을 긍정적으로 그린 영화는 상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9. 요약 : 이승만 정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국

1960년 4월 혁명은 한국사회의 문학예술계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후원을 받아온 사람들조차도 금세 '혁명적' 문인이나 예술인들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미군정시대에 시작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사이의 논쟁도 재개되었다. 이에 따라 현실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반외세주의 등이 문학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전정치에 있어서는 혁신정당들과 학생조직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한반도 중립화 통일 및 주한미군 철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와 아울러 한국에 대한 미국의 과도한 내정간섭 때문에 1961년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양키 고 홈" 구호가 터졌다.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로 4월 혁명의 기운은 금세 반전되었다. 군사정권은 진보적 문화단체들을 해체하고 표현의 자유를 가혹하게 제한했다. '반공'의 정의와 범위를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문학예술 분야에서 미국을 비판하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한국정치에서 세 가지 이슈는 반외세 민족주의를 깊고 넓게 고취시켰다. 첫째, 한국인들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빈번한 범죄에 따라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둘째, 미국에 의해 강요된 한일외교정상화에 대한 거센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셋째, 미국의 요청에 따라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으로의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른바 '반미문학'이 등장했다. 몇몇 저명한 시인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양키 고 홈"을 외치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지속적인 미국의 오만함, 한국의 내정에 대한 미국의 과도한 간섭, 미국의 문화적 침투 및 지배 등이 혈맹이라는 한국에서 반외세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며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이렇듯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한국에서의 반미주의는 손상된 민족 자긍심과 침해된 자주권에 대한 울부짖음이요 한미 두 나라 사이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외침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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