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저희 왔어요."
설을 닷새 앞둔 13일 대구 수성구 범물동 한 임대아파트. 올해 92살인 위안부 피해자 이선옥 할머니 집에 선물꾸러미를 든 젊은이들이 왔다. 위안부 피해자 인권보호 활동을 하는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들과 지역 대학생들이 설인사를 하기 위해 할머니 집을 찾은 것이다.
이선옥 할머니는 얼마전까지 대구에 있는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 최근에서야 퇴원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 며칠전에는 거 동이 불편해 병원을 찾아 뼈주사를 맞는 등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할머니를 돌보는 예순이 넘은 큰아들은 저러다 할머니가 잘못되진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자식들한테 민폐만 끼치고 빨리 가야지. 영감도 기다린다." 혼자 걷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는 아흔 넘은 할머니는 신세를 한탄하며 습관처럼 이 말을 했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준 젊은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일부러 발걸음을 하게했다는 생각에 미안했기 때문이다.
나이를 세는 것도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힘든 할머니는 "조용히 살다 가고 싶다"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옆 사람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보니 너무 좋다"며 "얘기하고 웃고 떠드는 게 사는 것 아니겠냐. 잊지 않고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옛 추억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할머니가 잊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 2차세계대전 중 17살 나이로 일본인 군인 위안소로 강제로 끌려간 기억이다. 수 십년 동안 가족들이 물어도 좀처럼 입밖으로 내지 않고 가슴에만 담아둔 아픈 기억이 최근에는 어쩐지 선명히 떠올라 할머니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당시 할머니는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북한에 살고 있던 부모님의 곁을 떠나 포항 안강에서 큰 식당을 하고 있는 고모댁으로 가 소일거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다 영문도 모른채 일본군들에게 강제로 끌려갔다. 그 길로 배에 태워져 일본 히로시마 등 여기저기를 다녔다.
반항도 하고 몸싸움도 벌이고 서툰 일본어로 욕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구타와 굶주림 뿐이었다. 고국 땅 여기저기서 끌려온 친구들과 손을 맞잡고 서로 위로하고 수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총칼을 차고다니는 일본군들의 철통경계를 뚫을 순 없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시간은 4년이 지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돼서야 할머니는 겨우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모댁을 갔지만 고모 내외는 이미 돌아가셨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겨우 부모님이 있는 북한으로 갔다. 아버지는 전쟁 중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와 형제들만 생존해 있었다. 딸을 잃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딸의 얘기를 듣고 따뜻하게 품어줬다. 올해로 광복 70년이 됐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어느때보다 선명했다.
"벌써 옛날 얘기다. 잊은 줄 알았는데 계속 떠오른다." 아흔 넘은 위안부 할머니의 한맺힌 얘기는 계속됐다.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입을 오므렸다 하며 천천히 당시를 떠올렸다. "여전히 또렷하다. 그 때 같이 끌려간 동네 언니, 동생, 친구들. 조선 땅 팔도에서 끌려온 처자들. 아이고 말도 못한다. 못하지. 그냥 길바닥에 기댈 곳만 있으면 다들 주저앉아서 울었다. 그때 조선 딸들의 눈물을 어떻게 잊어."
2시간이 넘는 증언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가도 할머니가 중간중간 던지는 농담에 화기애애졌다. 다른 피해자 할머니들의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할머니는 "다음 세대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양심이 있다면 일본이 사과를 하도록 해달라. 늙은 몸들은 힘이 부족해 옛날 일들을 다 잊고 살지만 젊은이들이 계속 기억한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나"라고 호소했다.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설을 앞둔 12~13일 이틀간 대구경북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6명의 집을 찾아 설 선물을 전달했다. 시민모임은 매년 명절 동참 시민들과 함께 할머니 집을 찾아 뵙고 있다. 한편,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8명으로 생존자는 모두 54명이다. 대구경북에는 대구 이선옥, 이수산(87), 이용수(87) 할머니를 포함해 경북 3분 등 모두 6명이 생존해 있다.
프레시안=평화뉴스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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