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4. 시를 통해 본 미국
1960년대엔 시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4월 혁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의 표현대로 "예술가의 양심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온몸으로 외쳤던 시인 김수영이 앞장섰다. 그는 1960년 발표한 <가다오 나가다오>에서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한반도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유는 없다 /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이유는 없다 /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 가다오 가다오.....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 서푼어치 값도 안되는 미(국).소(련)인은 / 초콜렛, 커피, 페치코오트, 군복, 수류탄 / 따발총..... 을 가지고 / 적막이 오듯이 / 적막이 오듯이 /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1966년 발표한 <풀의 영상>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침략과 학살을 비난한다. "나는 옷을 벗는다 엉클 샘을 위해서 /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무거운 겨울옷을 벗는다 / ..... / 그러다가 드디어 나는 월남인이 되기까지도 했다 / 엉클 샘에게 학살당한 / 월남인이 되기까지도 했다". 여기서 '엉클 샘'은 미국정부나 미국인을 풍자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1967년 발표한 <VOGUE야>에서는 미국의 저속한 대중문화에 대한 조롱과 경멸감을 드러낸다. 미국의 화려한 패션잡지에 대해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유물론 (唯物論)도 아냐, 선망 (羨望)조차도 아냐"라고 외친 것이다.
김수영의 시는 어렵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조차 어렵다고 인정한 그의 작품들을 시에 문외한인 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른바 '참여문학'의 기수로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도 미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아리조나 카우보이야> (1960), <거대한 뿌리> (1964), <전화 이야기> (1966), <미농 인찰지> (1967).
김수영에 이어 신동엽도 주한미군 철수를 외쳤다. 1960년대 '참여시인'과 '민족시인'의 대표로 꼽히는 신동엽은 김수영보다 더 많은 작품을 통해 더 강하게 미국을 비판하며 거부했다. 1967년 발표한 <껍데기는 가라>에서 남북한이 중립화 통일을 이루겠다며 외세를 상징하는 '껍데기'와 무기를 의미하는 '쇠붙이'들은 한반도에서 나가달라고 호소한다.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그는 1968년에 쓴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에서도 다음과 같이 '중립'을 강조하며 통일을 기원한다.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 완충지대, 이른 바 북쪽 권력도 /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고 / 평화로운 눈밭.....
그 중립지대가 / 요술을 부리데 /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 점점 팽창되는데 /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꽃피는 반도는 / 남에서 북쪽 끝까지 / 완충지대 /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 사랑 뜨는 반도 /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 나부끼데.
소설가 최인훈에 이어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이 1960년대에 외친 한반도 중립화 주장은 오랜 역사를 지녀왔다. 조선 시대 말엔 유길준이 1883년부터 미국에서 공부하다 유럽을 거쳐 1885년 귀국한 뒤 조선이 벨기에와 같은 중립국이 될 것을 제안했다.
해방 이후엔 1945년 원불교 2대 종법사였던 송정산이 "조선의 정세를 살필진대 중립주의가 아니고는 도저히 서지 못할 것"이라며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으로 일어설 것을 주장했다. 1952년엔 재미동포 김용중이 남북 당국과 유엔에 한반도의 중립통일 방안을 제안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며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바람에 1951년 일본으로 쫓겨 갔던 김삼규는 1953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월간지를 통해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했다.
그리고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일본에 망명했던 김삼규가 귀국해 신문과 잡지들을 통해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을 내세웠고, 혁신 정당들이나 사회단체들도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을 앞세우며 활발하게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동엽은 대표작이랄 수 있는 1967년의 <금강>에서도 미국이 한반도를 착취하기 위해 분단시켰다고 분노를 표출한다. 무려 5천 행이 넘는 장편 서사시에서 그는 미국의 원조물자가 한국인들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남한이 버터와 달러 그리고 양키즘으로 부패되었다고 외친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작품들에서 미국의 한반도 분단,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 남한 국민에 대한 착취 등을 고발한다. <글쎄 왜 와서 찝적이냐 말이오> (196?), <주린 땅의 지도원리> (1963), <발> (1966), <산에도 분수를> (1966), <종로5가> (1967), <조국> (1969). 신동엽이 1969년 죽은 뒤 1975년 그의 작품집이 출판되었지만, 정부는 즉각 배포 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앞서 신동엽은 <왜 쏘아>를 통해 미군들의 만행에 대해 절규한다. 1960년대 초 미군들이 한국인들을 총 쏘아 죽이는 사건이 거의 매일 일어나다시피 하자 분노를 쏟아낸 것이다. 배고픈 한국인들이 미군 부대에서 무엇을 훔치기 위해 철조망을 넘는다 할지라도 맨손인데 왜 총을 쏘느냐며 울부짖는다. 그러면서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눈이 오는 날 / 소년은 쓰레기통을 뒤졌다.
바람 부는 밤 / 만삭의 임부는 / 철조망 곁에 쓰러져 있었다.....
열두 살짜리 소년들은 / 어제 신문에서 읽은 동화애길 재잘거리다 / 저격받았다.
쓰레기통을 뒤져 / 깡통 꿀꿀이죽을 찾아 먹는 일 / 나도 이따금은 해봤다 / 눈사태 속서 총 겨냥한 / 낯선 병정의 호령을 듣고 / 그 퍽퍽한 눈 속을 / 깊이깊이 빠지면서 무릎으로 기던 / 그 소년의 마음을 나는 안다.....
아기 밴 어머니가 / 배가 고파, 애들을 재워 놓고 / 집을 빠져나와 / 꿀꿀이죽을 찾으려던 그 마음을 / 고용한 새벽 흰 눈이 쌓인 그 벌판에서의 / 외로운 부인의 마음을 / 나는 안다.....
왜 쏘아 / 그들이 설혹 / 철조망이 아니라 / 그대들의 침대 밑까지 기어들어갔었다 해도 / 그들이 맨손인 이상 / 총은 못 쏜다.
왜 쏘아 / 우리가 설혹 / 쓰레기통이 아니라 / 그대들의 판자안방을 침범했었다 해도 / 우리가 맨 손인 이상 / 총은 못 쏜다.
쏘지 마라 / 솔직히 얘기지만 / 그런 총 쏘라고 / 박첨지네 기름진 논밭 / 그리고 이 강산의 맑은 우물 / 그대들에게 빌려준 우리 아니야.
벌주기도 싫다 / 머피 일등병이며 누구며 너희 고향으로 / 그냥 돌아가 주는 것이 좋겠어.
위 시에 나오는 10대 소년과 임신부는 실존 인물이었다. 1964년 2월 2일 경기도 동두천의 미군 부대 주변에서 깡통을 수집하던 임신부가 미군 초병의 총을 맞고 죽었다.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세 명의 술 취한 미군이 두 딸의 어머니인 창녀를 미군 부대 안으로 유괴하여 강탈하고 강간하며 거의 죽이다시피 했다. 2월 6일 포천에서는 미군 초병이 10대 소년 한 명을 사살하고 다른 한 명을 중태에 빠뜨렸다. 2월 9일 의정부에서는 미군부태 철조망 근처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던 12살의 굶주린 소년이 미군의 총을 맞고 거의 죽을 뻔했다. 그리고 2월 17일엔 파주에서, 2월 18일엔 송탄에서, 2월 19일엔 동두천에서,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터졌던 것이다.
이러한 미군들의 만행과 관련해 당시 주한미군 당국은 부대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며 한인들이 적절한 이유 없이 부대에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미8군 사령관은 주한미군 부대에서 매달 7만 달러어치 이상의 물품이 도난당하는데 한국 법원은 미군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 도둑을 막기 위해 강력한 처벌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김영삼 당시 야당 대변인은 사람의 목숨이란 70만 달러 이상의 물질적 손실과도 비교될 수 없다고 논평했다.
미군들의 이러한 만행은 1960년대 말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1968년 10월 서울발 부산행 미군용 열차 안의 한 가방 속에서 22세 한인 여성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는 철조망을 넘어가 탄피를 주우려던 어린 소년이 미군들에 의해 새까맣게 콜탈 칠이 된 채 아이스박스 안에 갇혔다. 포천에서는 양공주가 미군부대 안에서 삭발을 당했다. 1968년 11월 구미에서는 사냥하는 미군들을 뒤따르던 초등학생들이 사냥감이 되어 무더기로 부상당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그리고 1969년 1월 칠곡의 미군 부대 뒷산에서는 21세의 한인 양공주가 속옷이 찢기고 벗겨진 채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이틀 뒤에도 같은 마을에서 20세의 위안부가 피투성이 알몸으로 숨져있었다. 미군들과 '육체의 시비'를 벌인 결과라고 보도되었다.
정공채는 1963년 발표한 <미 8군의 차>라는 서사시에서 주한미군이 한국의 국토와 여인들을 황폐화한다고 분노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러나 이 시 때문에 그는 반미주의자로 낙인 찍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조지훈은 <우리는 또다시 노예일 수 없다>는 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이 굴욕적인 협상을 부추기고 강요하는 모든 동맹국들의 터무니없는 행위에 분개하며 외세의 적들을 물리치자고 외쳤다. 한일협정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준태는 1969년 스무 살의 새내기 시인으로 등단하자마자 미국을 비판하는 시를 연이어 발표했다. <서울역> (1969)과 <시작 (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1969)에서 '양키'를 경멸한다. 그리고 <어메리카 I> (1970)에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어메리카 II> (1970)에서는 미군들의 범죄를, <베트남> (1970)에서는 베트남의 미국화를, <껌둥이> (1970)에서는 미국의 인종차별을 비난한다. 그는 10년 후 1980년 5월 광주학살이 일어나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썼다. 100행이 넘는 이 유명한 즉흥시는 광주항쟁으로 13일간 폐간되었던 <전남매일> 1980년 6월 2일 자에 실렸는데, 그는 이 시로 전남고등학교 교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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