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심상치 않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암살을 다룬 영화 <인터뷰>의 제작사인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 해킹 배후로 북한을 지목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일 행정명령을 통한 금융제재에 돌입했고 급기야는 22일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와 인터뷰에서 북한 붕괴를 언급했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 '붕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미국이 북한 붕괴를 목적으로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 수위를 한층 높여가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면의 다른 목적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북한을 정말 붕괴시키겠다는 생각보다는 압박을 통해 북한의 저항을 유도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북한이 도발하면 이를 핑계 삼아 군사적 대비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쓰는 이유는 북한보다는 중국 때문"이라며 "북한을 압박해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이 미국의 본심"이라고 관측했다. 정 전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금융제재를 가하고 인터넷을 통해 북한에 외부의 정보를 유입하면 반드시 북한이 반발하고 군사적인 행동도 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의 도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인정 및 일본 군사력 강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력 강화 등이 함께 추진될 것"이라며 "이러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자신들의 수고를 덜고 현지의 대리인인 일본과 한국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미국에게 이보다 좋은 시나리오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을 불안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북이 가까워지면 미국은 북한 핑계를 대고 중국을 두들길 수 없다"며 "미국은 동북아에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객관적인 명분을 북한이 제공해주길 바라고 있는데, 남북이 가까워지면 북한 핑계를 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남북관계 개선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북한 역시 4차 핵실험이라는 위험한 카드를 꺼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이 △자위력을 강화하고 △미국에게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정치적으로 인민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준다는 측면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북·미 간 갈등이 커지면 남북대화와 관계개선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 전 장관은 "통일부에서 전단 살포하는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살포 단체들한테 자제 요청을 보내고 있다고 하던데, 이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대처해서는 북쪽에서 고위급접촉을 재개할 상황이라고 판단하긴 힘들 것"이라며 보다 적극적인 정부 역할을 주문했다.
인터뷰는 27일 서울 동교동에 위치한 김대중 도서관에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 '북남 최고위급회담'도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고, 이에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같은 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를 하자고 호응했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남북대화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김정은 위원장의 암살을 다룬 영화 <인터뷰>의 제작사인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 해킹의 배후로 북한이 지목됐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압박에 돌입했습니다. 급기야는 지난 2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북한 붕괴 가능성까지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이쯤 되면 미국의 대북정책이 그동안의 '전략적 인내', '전략적 무시'를 넘어 '전략적 적대'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남북대화와 북핵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정세현 : 오바마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말한 이유는 북한을 정말 붕괴시키겠다는 생각보다는 압박을 통해 북한의 저항을 유도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도발하면 이를 핑계 삼아 군사적 대비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칠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난해 체결한 한미일 정보공유양해각서를 기반으로 3국 간의 군사협력도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쓰는 이유는 북한보다는 중국 때문입니다. 북한이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 정책의 좋은 구실이 되는 셈입니다.
프레시안 : 미국이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 쿠바, 그리고 핵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이란과 달리 북한에 대해서만은 노골적인 적대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도 중국 때문일까요?
정세현 :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 속담에 '기둥을 때리는 것은 대들보 울리라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한을 압박해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이 미국의 본심입니다.
쿠바의 경우 압박을 계속 한다고 해도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더 큰 국제정치적 이익이 없습니다. 북한의 배후에 중국이 있는 것처럼 쿠바의 배후에 미국에 대적할 수 있는 국가가 없습니다. 미국이 쿠바 배후에 있는 국가를 견제하기 위해 쿠바의 반발을 유도하려고 해도 배후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는 압박 전략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이는 이란도 마찬가지입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의 흐루쇼프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긴장관계에 있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2015년의 러시아는 쿠바의 배후 국가 노릇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당시만큼 러시아의 국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과거에 소련 내에 있던 나라들을 미국이 자꾸 자기 쪽으로 끌어가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즉 러시아는 관념적으로 쿠바를 동지 국가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군사·정치·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
이란의 경우에는, 이란 자체가 중동에서 큰 나라입니다. 중동지역이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커지면서 거의 전쟁 수준까지 가고 있지만,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 시절부터 중동에 있으면서도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좀 다른 곳이었습니다. 지리적 위치를 봐도 러시아나 중국을 등에 업을 상황은 아닙니다. 그래서 미국은 이란과는 관계를 좋게 해서 이를 통해 석유와 관련된 이득을 계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미국이 태평양의 전체 제해권을 장악하고 2차대전 이후 계속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뒤쪽이 깨끗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쿠바와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미국의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의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들기 위해 쿠바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은 미국이 볼 때 중국 견제를 위한 매우 좋은 카드로 써먹을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북한의 운명이 기구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잘해보고 싶어도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중국 때문에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상황인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금융제재를 가하고 인터넷을 통해 북한에 외부의 정보를 유입하면 반드시 북한이 반발하고 군사적인 행동도 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기다리려는 속셈인데, 실제 북한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남북대화 분위기는 사실상 깨지게 되고 대북제재는 불가피해집니다.
또 미국의 대북제재가 합리화, 정당화되면서 동시에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인정 및 일본 군사력 강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력 강화 등이 함께 추진될 공산이 큽니다. 이러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자신들의 수고를 덜고 현지의 대리인인 일본과 한국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에게 이보다 좋은 시나리오가 어디 있겠습니까.
프레시안 : 그런데 그동안 미국이 한국의 도움을 받아 북한 인터넷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뉴욕타임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의 소니 해킹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면 이것은 미국이 북한의 해킹을 방치했다는 뜻 아닌가요?
정세현 : 그것도 일종의 설(說)이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확인해봐야겠지만, 미국이 그동안 북한을 해킹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북한의 능력도 파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을 공격할 카드를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카드를 언제 써먹을지는 여러 가지 국제정치적인 상황과 연계해서 정하게 되는 것이죠.
국내 정치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 예를 들면 대선의 경우 투표 이틀 전 정도에 이를 터뜨려서 상대방이 대응 못하게 하고 그걸로 상대방 후보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해서 선거 승리를 도모하지 않습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남북이 자기들끼리 뭔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굉장히 불안했을 겁니다. 한미일 정보공유양해각서라는 변칙적인 방법을 쓰면서까지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군사적 공유 전선을 3국이 가까스로 구축해놓았는데, 분단 70년, 광복 70년이라는 명분 때문에 남과 북이 갑자기 접근하는 것이 미국에게는 상당한 불안요소로 떠올랐을 겁니다.
남한이 미국에 "올해는 분단 70년, 광복 70년이라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 남북관계 진전에 미국이 협조해 달라"라고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일 휴가지에서 서둘러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시작한 것입니다. 남북이 가까워지면 미국은 북한 핑계를 대고 중국을 두들길 수 없게 됩니다. 미국은 동북아에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객관적인 명분을 북한이 제공해주길 바라고 있는데, 남북이 가까워지면 북한 핑계를 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1990년에 시작한 남북 총리급 회담이 탈냉전 추세를 타면서 빠른 속도로 진전됐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군산복합체나 국방부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추세는 무기를 내다 팔 시장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1991년 초중반으로 넘어오면서 빠른 속도로 남북이 합의문을 내놓을 것 같으니까 미국은 그해 여름, 북한의 핵 활동 정보를 슬그머니 내놓으면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권고가 아닌 사실상 압박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이 같이 나오게 된 겁니다.
당시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의 비핵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미국은 이를 남한에도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때 남한 내부에서는 소위 '핵주권'을 잃어버렸다는 비판들도 나왔습니다만, 미국 입장에서는 무기 시장이 없어진다는 문제도 있지만 북한의 핵 기술이 제법 발전해있는데 이걸 남북이 공유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1992년으로 넘어오면서 미국 국방부와 안보라인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2년 가을에 중단됐던 한미 연합훈련인 팀스피릿 훈련을 다음해인 1993년 재개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남북 기본 합의서는 상당 부분 훼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북한 붕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까?
오바마 대통령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북한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바마는 이번 인터뷰에서 인터넷으로 외부의 정보가 들어가서 북한 내부 불만이 증폭되고 이를 통해 북한의 현 체제가 붕괴된다는 공식을 적용했는데, 공산권 국가를 상대로 전략을 세우는 미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동유럽에는 이러한 공식이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1975년부터 시작된 헬싱키 프로세스도 10년 이상이 걸리긴 했지만 그동안 계속 경제교류·사회문화 협력을 진행하면서 외부 정보가 들어갔고 사회주의 체제 열등성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겼습니다. 이후 체제 변환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평화적 이행' 방안이라고 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일이 북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공산권 국가들을 연구하는 미국 학자들이 유럽 공산주의에 비해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2차대전 이후 중국과 대만 간 국공협상을 했을 때도 미국이 개입했는데, 미국은 판단 착오로 국민당보다는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역시 미국의 판단 오류로 결국 공산당의 수중에 베트남이 들어간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도 판단을 잘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북한은 오바마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은 수십 년 동안 통제됐고 3대 세습이 가능한 곳입니다. 이는 그만큼 사회가 폐쇄됐다는 뜻으로, 북한은 바깥에서 자기들을 어떻게 보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접하고 북한 내부 주민들이 동요해서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러면 북한 당국은 그렇게 될 때까지 손 놓고 있을까요? 오히려 북한 내부의 감시 감독 및 통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심해질 것이고, 그러면 북한 인권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또 북한 내부 통제가 강화되면 북한 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부족한 물자를 구해 어느 정도의 생활을 유지하는 국경지역의 보따리장수들도 활동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생필품도 줄어들게 됩니다. 미국식 사고방식으로는 생필품이 줄어들면 그 자체가 불만 요인이 되기 때문에 체제가 무너질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렇게 보는 것은 자본주의적 마인드입니다.
북한은 워낙 어렵게 살았던 세월이 길어서 이런 식이 과연 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때 북한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라는 말을 했는데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이런 문구가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북한은 이렇게 버틴 국가입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제재 결의안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압박하고 봉쇄하면 북한이 손들고 나올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북·중 간 국경지역의 경제 상황도 수년 전보다 좋아지고 있고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곳이긴 하지만 평양 시내도 활기가 있어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강경한 대북 압박, 북한 핵실험으로 응답하나
프레시안 : 미국에 대한 북한의 대응으로 4차 핵실험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 상태를 긴장으로 몰아가고 싶은 것이 미국의 의도인 것 같은데 북한이 정말 여기에 기름을 붓는 4차 핵실험을 감행할까요?
정세현 : 미국 쪽의 정보에 의하면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정도의 플루토늄은 구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의 수치가 북한의 핵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즉 자신들의 핵 능력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핵 능력이 외부에서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즐기는 측면도 있습니다. 북한의 협상력을 높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미국의 대북 압박이 커지면 북한이 자위력을 강화하고 미국에 자신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이 미국의 대북압박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로 연결되고 이것이 미·중 간 힘겨루기에서도 미국 쪽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북한도 뻔히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북한도 대내 정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민들에게 "미국이 우리를 건드리면 저들도 죽는다고 우리가 말하지 않았느냐"며 "핵실험 성공했다, 소형화에 근접했다, 미사일에 실어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북·중 관계가 지금보다 더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중국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심해지는 것을 우려해 일관되게 북한의 핵실험을 반대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중국이 북한에 넉넉하게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중국과 관계보다는 대내 정치적으로 인민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준다는 측면과 미국에 자신들을 건드리면 상황이 더 복잡하고 어려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는 차원에서 핵실험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가시화될 때 느끼는 정치적 부담이나 군사적 위협 등이 중국에는 크지만 러시아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근 중국보다 러시아에 더 손짓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레시안 : 북한이 지난 9일(현지시각) 미국에 핵실험 유예와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맞바꾸자는 식의 제의를 했고 이후 16일(현지시각) 현학봉 주영 북한대사가 이례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 붕괴를 언급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북한이 "더 이상 미국의 유화적 태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가요?
정세현 : 북한의 그 제안은 핵실험을 위한 명분 쌓기로 봐야 합니다. 북한도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실제 북한 국방위원회에서 이 두 가지 사안을 맞바꿀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 있었다면, 제가 김정은이었다면 그렇게 판단한 실무자를 그냥 그 자리에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북한의 제안은 "우리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 쌓기용입니다. 미국이 그런 것에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군사훈련이 일종의 '신종 무기 이동 박람회'인데,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인 미국이 이걸 중단하려고 하겠습니까? 북한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걸 모를 리는 없다고 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한편으로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정말 대북 방위에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측면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훈련이라는 평가도 있는데요.
정세현 : 한미연합훈련이란 게 이순신 장군의 칼을 들고 도마 위의 무를 자르는 것이랑 비슷합니다. 무를 자르려면 식칼 정도면 되는데 말이죠. 한미연합군사훈련은 북한의 대남도발을 견제하기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대중 봉쇄용이고 무기 시장의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고위급 접촉 시작도 못하고 있는 남북
프레시안 :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 초 발언으로 미국의 대북 강경 정책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남북관계 개선을 하려면 5.24조치 해제 등 남북대화 분위기를 가져가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대북 전단 살포도 막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의 대응이 이대로 괜찮을까요?
정세현 :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를 보면 북한이 생각하는 대화의 로드맵이 다 나와 있습니다. 일단 통일준비위원회와 통일전선부 간 대화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고위급접촉을 재개해서 몇 가지 문제, 예를 들면 5.24 조치 해제나 이산가족 상봉 등의 원칙을 교환해 놓고 부문별 회담으로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부문별 회담이 활성화되다 보면 "북남 최고위급회담을 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마련될 수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정상회담도 그렇고 부문별회담도 그렇고 일단은 고위급접촉 재개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로 들어가서 부문별회담이라는 마당을 거쳐서 정상회담이라는 안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북한이 내걸고 있는 고위급접촉 재개의 조건이 대북 전단 문제입니다. 대북전단 문제로 무산됐던 지난해 10월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부는 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이며 미국인이 전단을 뿌리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며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급접촉이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전단 문제에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칙에만 얽매일 수는 없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부에서는 전단 살포하는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살포 단체들한테 자제 요청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뜨뜻미지근하게 해서는 북쪽에서 "좋다, 그 정도면 고위급접촉 재개할 상황이 됐으니까 해보자"라고 나올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합니다.
고위급접촉을 못하면 이산가족 상봉, 경협회담,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 간 회담 모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서는 5월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다면서 여기서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남북 간 얽혀있던 매듭이 풀리고 나머지 사업들도 잘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건 기본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많은 나라의 정상들이 오는 자리에서 어디서 회담을 합니까? 남북 정상이 만나면 최소한 2박 3일 정도는 필요하고 참모들까지 따라가서 주거니 받거니 협상하면 최소한 공동선언 정도도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전면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한 남북 정상이 이 정도의 회담을 할 수 있습니까? 상견례 정도는 몰라도 회담은 불가능합니다.
야당에서도 논평을 통해 러시아에서 정상회담하라고 부추기던데, 정부에 충고를 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정부가 대북 전단 살포를 책임지고 막아서 고위급접촉이 재개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되고 금강산 관광 재개하고 그 과정에서 5.24조치도 해제되고 그러다가 8.15쯤 정상회담이 되는 것이 좋은 모양새 아닙니까?
야당에게 거꾸로 물어보고 싶습니다. 야당이 집권하면 그런 식의 정상회담을 할까요? 정상회담이 뭡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남북관계를 총정리하고 이를 한 단계 격상시키기 위한 그런 회담 아닙니까? 만나서 사진만 찍으면 정상회담입니까?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대북 전단 살포를 막지 못하는 이유로 현재 박 대통령의 국내 정치 지지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지지기반인 극우세력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릴까봐 그것마저 못한다는 분석입니다.
정세현 : 그것보다는 박 대통령의 대북관 자체가 "북한을 압박하고 고통을 줘야만 저들이 손들고 나온다, 북에서 해달라는 것 적당히 들어주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니면 지금부터 통일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남북관계가 원숙한 상태로 발전하고, 그래야 비로소 통일로 넘어가는 건데 박근혜 정부가 이야기하는 통일준비라는 것은 이런 단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즉 북한이 망해가고 있으니까 통일을 빨리 준비해야 하고, 올해 8.15를 계기로 해서 통일헌장을 발표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남한 정부의 고위층들이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북한 붕괴를 언급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이런 태도가 우리에게 좋지 않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북한 붕괴론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는 과정에서 비용의 70%를 우리보고 부담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곧 북한 붕괴한다면서? 그럼 이건 결국 너희들 것이 되네? 그럼 돈 더 내야지"라는 겁니다. 북한 붕괴론이 우리한테 비용을 덮어씌우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겁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고위직들이 북한 붕괴론을 신봉하고 있다면 의미 있는 남북관계 진전은 어려워지는 것 아닙니까?
정세현 : 신년 업무보고 때 통일부의 보고 내용을 보니 북한 정부는 그 안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서 사업을 시작해버리는 것만 있었습니다. 북한 당국과 협의해서 일을 한다거나 북측에 물자를 줘서 그들이 집행하라는 내용이 별로 없었습니다. 즉 우리의 행정력이 그대로 북한에 들어가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통준위 구성을 봐도 명색이 북한 전문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분야별 전문가만 있습니다. 바로 북한에 들어가서 내무행정, 문화행정, 보건행정, 산림녹화 등등을 해버리려는 구상입니다.
통준위의 인적 구성을 봐도 통일부 장·차관 출신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정부의 성향과 맞는 보수적인 통일부 장관 출신도 아직 건강하게 활동하는 사람 많은데 그런 인물 하나 없는 겁니다. 장관이야 정치적인 배경이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차관 출신 중에서는 상당한 이론적 식견과 더불어 실무에도 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관 출신도 없는 겁니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 '붕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통일대박도 그렇고 2015년 자유민주주의 체제 통일론도 그렇고 "이게 남는 장사다, 대박이다, 돈 들어가는 것 아까워하지 말고 참여하라"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주고 있는 겁니다. 통일 임박했으니까 국민들은 돈 낼 준비 하고 국가에서는 북한을 접수할 준비를 한다는 차원에서 통준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실현 가능할까요?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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