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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만복대, 그곳에서 만복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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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리산 만복대, 그곳에서 만복을 누리라

2월 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 전문가)의 2015년 2월 제50강은 2월 28일(토) <백두대간 지리산 만복대(萬福臺) 구간>입니다. 이번 산행 주제는 <지리산 만복대에서 만복을 나누다>입니다. 지리산 서부에 위치한 만복대는 풍수지리적으로 지리산의 많은 복을 입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이 일품입니다. 이번 산행도 누구나 부담 없이 겨울 지리의 감동을 담을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전한 산행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지리산 만복대 운해가 나이아가라폭포처럼 흐른다. ⓒ지리산국립공원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의 머리, 백두산(白頭山)이 동해와 나란히 흘러흘러 내닿은 두류산(頭流山). 백두대간학교 2월 산행은 두류산으로도 불리운 지리산의 만복대(萬福臺)입니다.

수많은 전설과 애틋한 그리움, 절절한 아픔을 구십구골에 간직한 지리산. 만복대를 향해 백두대간학교 도반들은 성삼재에서 지리산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고개 들어 하늘을 봅니다. 수많은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차가운 계절 별빛은 더욱 또렷합니다. 별빛을 불빛 삼아 성삼재를 지나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희미한 미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뱀사골 입구로 이어진 861번 지방도로를 건너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으로 들어섭니다. 완만하게 이어진 산길은 눈이 쌓여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대간길이 이어집니다.

어두운 밤의 포장을 벗기는 여명이 시나브로 밀려오며 장중한 지리산의 능선들이 실루엣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소금배의 고리를 묶어 놓았던 고리봉에서 바라보는 달궁계곡은 심연의 바다처럼 고요합니다. 반야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진 지리산의 주능선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천왕봉 주위의 하늘들이 수줍은 새색시의 볼처럼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점점 더 붉어진 색시의 볼은 어느 순간 하얀 알을 토해 놓습니다. 지리산 위로 하얀 태양이 떠오릅니다. 하얀 알은 다시 붉어지며 산하를 물들입니다. 지리산과 태양이 그려내는 웅장하고 가슴 저리는 일출입니다.

고리봉을 내려서면 산길은 뒷동산 숲길처럼 편안한 길이 이어집니다. 우측의 심마니능선과 좌측의 산수유로 이름난 산동면을 눈에 담으며 사스락사스락 눈길을 걷다보면 넓은 개활지가 나타납니다. 묘봉치입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합니다. 함께한 도반들과 옹기종기 모여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펼칩니다. 즐거운 이야기와 함께하는 꿀맛 같은 시간입니다.

묘봉치를 지나 만복대로 오르는 능선은 유순하기 그지없습니다. 평평한 만복대처럼 편안한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북으로 갈래친 심마니능선, 삼정능선, 오공능선이 중첩으로 나란히 걷는 길입니다.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만복대입니다. 복을 기원하면 쌓은 돌탑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주능선과 달궁계곡의 부채골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만복대에 올라서면 자연스레 만복대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서서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만복(萬福)인 것입니다. 함께한 도반들과 만복을 나누고 서로 각자의 만복을 소원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모산(母山) 지리산의 넉넉한 덕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덕담 나누고 달궁골이 전하는 마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령치로 향합니다.

▲만복대의 봄, 새벽산행 ⓒ지리산국립공원

정씨 성의 장수가 지키던 고갯마루에는 이원규 시인의 시비가 산객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 거든
불일 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 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마지막 시구,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처럼 지리산은 언제나 그렇게 묵묵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행여 못 견딜 때에도, 행여 견딜만할 때에도 말없이 받아들여 줍니다. 포근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든 모두를 안아줍니다.

정령치에서 간식 나누고 바래봉으로 이어진 대간길로 접어듭니다. 큰고리봉으로 향하는 마루금은 아기자기한 길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동네골목길 같은 길을 지나 오솔길이 이어지고 작은 철계단길과 솔밭길 그리고 암릉길이 걷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큰고리봉에서 대간길은 우측 고기리를 향해 급하게 내려섭니다. 쉼 없는 내리막의 연속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함께 걷는 길입니다. 철쭉과 진달래의 벌거벗은 나선을 보며 내려서는 길입니다. 고기리에서 산길을 벗어납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세상으로 내려섭니다.

지리산은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의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장중한 산세의 영향으로 덕산(德山)으로도 이름 지어 졌으며, 민중의 저항의식이 함축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도 지리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3도(道)5군(郡)에 걸쳐있는 지리산은 장쾌하고 부드러운 주능선에 기대어 아흔아홉의 골짜기가 흘러내립니다.

어머니의 산[母山]이라고 불리우는 지리산을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입니다.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풍부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자연스레 사람들이 기대어 살게 되고,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을 비롯한 이상향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지리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역사적 기록으로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청에 전하는 구형왕릉은 6세기경 신라와의 전쟁을 피해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반야봉 아래 달궁은 피난한 마한의 도성으로 전해져 옵니다.

지리산은 그 특유의 자연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험난한 역사가 상존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통 전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삼한시대와 가야시대와 삼국시대는 각국의 국경의 접경지대로 싸움터의 주무대였고, 고려 때에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일(朝日)전쟁의 전란을 겪어야 했으며, 근세의 동항민중운동과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습니다.

지리산의 지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전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세 명의 성(姓)이 다른 장군이 지켰다는 고개 ‘성삼재’, 정씨 성(姓)의 장군이 지킨 고개 ‘정령치’, 마한의 임금이 피난해 머문 ‘달궁’ 등은 마한의 슬픈 역사입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적을 섬멸한 운봉의 황산대첩비와 여원재, 피아골 등은 왜적과의 싸움에 대한 전설이 어린 곳이며, 구례의 석주관은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근세에 와서는 동학민중항쟁의 마지막 전투 장소가 되었고, 현대에 접어들어 여순사건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의 목숨이 산화한 곳입니다. 지리산은 동전의 양면처럼 때론 생활의 터전과 피난지로, 다른 한편으론 치열한 싸움터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마음 아프고 가슴시린 일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혼잡하고 서글픈 일들, 마음 답답하게 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기운을 내시기 바랍니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포근한 어머니의 품 지리산을 거닐며 마음 내려놓고 기운 돋우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만복대 함께 거닐며 지리산의 포근함 가득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지리산의 고요한 아침 ⓒ지리산국립공원

[구간소개]
- 산행월일 : 2015년 02월 28일(토)
- 산행출발 : 2015년 02월 27일(금) 24시(자정)
- 산행코스 : 성삼재-고리봉-묘봉치-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고기리
- 산행거리 : 약 11.1km
- 소요시간 : 약 7시간30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 난 이 도 : 중중(★★)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2월 27일(금)
24:00(자정)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2월 28일(토)
00: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0: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0: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 승차장

<산행일정>
06:00 성삼재 도착 - 산행준비/스트레칭
06:20 성삼재 출발 - 산행 시작
07:10 고리봉 - 일출 감상
08:00 묘봉치 - 아침식사(개인 도시락을 준비하세요)
10:00 만복대
11:10 정령치 - 간식
12:20 큰고리봉
13:50 고기리 - 산행 마감/스트레칭
14:00 점심식사 - 선유산장(전북 남원시 주천면)에서 묵은지 닭볶음탕 & 산채정식, 막걸리로 뒤풀이
15:20 고기리 출발
19: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스패츠, 아이젠, 얼굴가리개(버프), 그리고 반드시 아침 도시락을 준비하세요.

<백두대간걸작선> 제50강 <지리산 만복대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회 식사 겸 뒤풀이, 가이드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교장선생님에게 해주세요(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에도 꼭 놀러오세요.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2015년 3월 산행 안내]
- 산행일 : 2015년 3월 28일(토)
- 산행지 : 금북정맥 덕숭산(수덕산) 구간
- 산행코스 : 육괴정-덕숭산(수덕산)-한티고개-가야봉-석문봉-일락산-개심사
- 출발시각 : 27일(금) 24시(자정) 덕수궁 앞 출발
- 참가비 : 10만원
- 거리 : 약 13.4km
- 예상시간 : 약 9시간
- 난이도 : 중상(★★)

▲지리산 수묵의 능선 ⓒ지리산국립공원

[산행자료]
[지리산] 1,915m.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동경 127°27′∼127°49′, 북위 35°13′∼35°27′에 위치한 거대한 이 산은 총면적이 440.4㎢이며, 전라북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덕평봉(德坪峰, 1,522m)·명선봉(明善峰, 1,586m)·토끼봉(1,534m)·반야봉(般若峰, 1,732m)·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삼신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渤海彎)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이곳에 신선(神仙)과 불사약(不死藥)과 황금(黃金)·백은(白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史記)>의 기록이 있는데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 신산(四大神山)이라 하고, 그에 구월산을 합하여 5대 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지리산을 신산(神山)으로 꼽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하였다. 또 <팔역지(八域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산수론(山水論)에서 지리산을 조선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되며 12종산(宗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호남읍지>,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山水考)>,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도 모두 지이산(智異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류산·방장산·지리산(地理山)·남악 등의 이칭이 소개되어 있고, 두류의 류(流)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류(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두류산(頭留山)이라는 이칭이 하나 더 추가된다.
-지리산의 자연환경
지리산의 북부와 동부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로서 덕천강(德川江)·주천(朱川)·남천(藍川) 등이며, 남부와 서부의 하천은 섬진강의 지류로서 화개천(花開川)·서시천(西施川) 등이다.
일반적으로 지리산 일대는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로 분리시키는 중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고도에서 오는 산악성 기후가 뚜렷이 나타난다. 남동쪽 지역에는 빈번한 저기압의 통과와 여름철의 고온다습한 남동계절풍이 남동 사면에 부딪쳐 상승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형성 강우로 인하여 많은 비가 내린다.
겨울에 산지의 북서쪽은 한랭건조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은 데 반하여, 남동쪽은 산지에 의하여 계절풍이 저지되므로 추위에서 보호되고 남해를 흐르는 동한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하다.
이 지역의 연강수량은 1,200∼1,600㎜이며, 6∼8월에 50∼60%가 내리고 12∼2월에는 10%도 못 되어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한다.
연평균기온은 12∼14℃로서 삼림대로 보아 온대남부형에 속한다. 온량지수(溫量指數)는 105∼115로서 난온대(暖溫帶)에 속하며, 1월 평균기온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는 한랭지수는 -14.5∼-7.8이다. 세석은 평지보다 6∼7℃가 낮아 한랭하며, 600∼700m 고지에서는 첫서리가 10월 1일경에 내리는데 다른 지역보다 13일 내외가 빠른 편이다.
또한 1,500m 고도의 만복대에서는 5월초까지 얼음을 볼 수가 있다. 산지의 영향으로 운천일수(雲天日數)가 130일을 기록하고 있어 연중 흐린 날씨가 많은 편이고, 산곡풍(山谷風) 등 국지풍이 탁월하며 안개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형이 복잡하고 산정에 걸치는 낮은 구름과 계곡에 자주 끼는 짙은 안개 때문에 일조시간(日照時間)도 짧은 편이다.
한여름 기온의 차는 15∼20℃를 나타내는데 표고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이 낮아져서 7월 중순 산록에서는 36∼37℃인 데 비하여 산정에서는 19∼20℃를 나타낸다.
식생은 137과 536속 1,369종이며, 이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식물은 32과 56종으로 섬말나리·새우난초·약난초·천마·사철란·구름송이풀·솜다리·삼백초·모데미풀·백부자·세뿔투구꽃·지리바꽃·금강제비꽃 등이 있다. 또한, 한국 특산 식물 407종류 중 46종류가 있고 지리산특산식물은 19종류이다.
지리산 특산식물은 갓대·왕개서나무·지리개별꽃·지리바꽃·얼룩함박꽃나무·지리말발도리·히어리·지리터리풀·늦싸리·지리산싸리·지리강활·물들메나무·긴잎물들메나무·긴잎쇠물푸레·정향나무·지리오리방풀·둥근오리방풀·어리병풍·지리고들빼기가 있다.
야생동물은 포유류 16과 46종, 조류 111종, 어류 30종, 양서류 2목 5과 11종, 파충류 2목 5과 16종, 곤충 23목 271과 2,697종으로 되어 있다.
동물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동물로는 포유류가 붉은박쥐·하늘다람쥐·여우·곰·대륙목도리담비·수달·삵·늑대·표범·호랑이·사향노루 등 11종, 조류가 고니·말똥가리·붉은배새매·새매·조롱이·황조롱이·재두루미·검은등뻐꾸기·소쩍새·올빼미·큰소쩍새·청호반새·아물쇠딱따구리·큰오색딱따구리·뿔종다리·돼지빠귀 등 16종, 어류가 꼬치동자개 1종 등이다.
또한 파충류는 자라·구렁이·능구렁이·대륙유혈목이·무자치·실뱀·까치살모사·살모사 8종, 양서류는 도룡뇽·꼬리치레도룡농·물두꺼비·북방산개구리·아므르산개구리 6종, 곤충류는 붉은점모시나무·상제나비·바둑돌부전나비·대왕팔랑나비·유리창나비·비단벌레·반날개하늘소·알락수염산꽃하늘소·범하늘소·알락수염하늘소·우산하늘소·큰풍뎅이·장수풍뎅이·사슴풍뎅이·톱사습벌레 15종이 있다.
-역사와 문화유적
구석기·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인간은 무늬없는 토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산악지대에 거주하였던 것 같지는 않고 대체로 주변의 낮은 구릉에서 원시적인 농경을 행하면서 수렵과 어로 활동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등지에서는 앞에 짧은 돌출부가 달린 진주식(晉州式) 장방형 석곽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가야 지방으로부터의 영향을 말해 주고 있다. 산청에는 원삼국 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지리산은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부각이 된다. 신라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을 제사하였다.
삼산은 봉래·방장·영주로 이 중 방장이 지리산에 비견된다. 오악은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서의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의 부악(父嶽)으로, 나라에서 제사하며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 많은 사찰과 산신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은 삼각산(三角山)·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과 함께 사악신(四嶽神)으로 정하여져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대표적인 산신 신앙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마흔 살 되던 해 가을 종도(宗道)와 선공(鮮空)이라는 두 승려의 안내를 받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 올라 제일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가 당시 목격한 이 성모묘의 모습은 당집의 너비가 3칸이고 양쪽 벽에 중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성모상은 석상(石像)으로 분대(粉黛)로 얼굴과 머리, 눈, 눈썹이 칠하여져 있었다.
머리 부분에 칼로 벤 듯한 금이 가 있어 그 연고를 물으니 태조가 등극 전에 이 근처 인월(引月)에서 왜구를 칠 때 크게 패한 왜병이 이 성모의 신조(神助)로 태조가 승첩을 거두었다 하여 보복의 뜻으로 두쪽을 내었던 것을 뒤에 모아 맞춘 것이라 하였다.
성모묘의 동쪽, 바위가 오목하게 꺼진 부분에 돌을 쌓고 그곳에 조그만 불상을 하나 세워 놓았는데 국사(國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의 지리산의 위치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영남과 호남의 양 지방에 걸쳐서 그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위치적 특성과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험하지는 않다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역사상 특이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우선 백제의 망국민 일부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섬진강 유로를 따라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그 도피처로서 지리산을 취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피란·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신앙(鄭鑑錄信仰)이 지리산을 찾게 된다.
<정감록> 감결(鑑訣)과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 <도선비결(道詵祕訣)> <남사고비결 (南師古祕訣)>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 <이토정가장결(李土亭家藏訣)>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등 도참서류(圖讖書類)에는 대부분 피란·보신의 장소로 열 군데(이름하여 ‘十勝地’라고 한다)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운봉두류산(雲峰頭流山), 즉 지리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정감록> 관념은 한말에 이르러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인들이 유민이 되어 흘러 들어오고, 이들 일부가 신흥종교를 개창하였다.
오늘날 계곡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찰과 산신당 이외에 이러한 민족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산간 마을이 일부 흩어져 있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갱정유도(更正儒道) 신자들로 구성된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도인촌일 것이다.
그들은 묵계리를 전설상의 청학동(靑鶴洞)이라 일컬으며 댕기머리와 상투와 바지저고리로 우리의 전통 문화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청학동은 선조 때의 문인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신선에 대한 기록에서 나온 말로,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길지로 구전되어 오던 곳이다.
우리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이며 10대 사찰 가운데 첫째인 화엄사(華嚴寺)를 비롯한 10여 개의 사찰과 국보·보물·천연기념물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어 곳곳마다 유적지이다.
주능선을 기준으로 그 남쪽 면을 겉지리[表智異 또는 外智異]라 하고 북 사면을 속지리[裏智異 또는 內智異]라 하는데, 민간신앙과 관계된 유적은 주로 속지리 쪽에, 그리고 불교 신앙 유적은 겉지리 쪽에 분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때인 544년(진흥왕 5) 연기(緣起)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것을 인조 때 벽암(碧巖)이 재건하였다. 일설에는 화엄종(華嚴宗)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의상(義湘)이 전교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3대 목조건물 중의 으뜸인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화엄사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화엄사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보물 제300호)·화엄사대웅전(보물 제299호) 등이 있다.
또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38호인 수령 300여 년의 올벚나무[彼岸櫻]가 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무기 재료로 쓰기 위하여 심게 한 것이라 한다.
연곡사(鷰谷寺) 역시 연기에 의하여 화엄사와 같은 해에 창건된 사찰로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 남쪽에 위치하여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중건되어 남아 있다.
경내에는 고려 초의 석조 예술을 대표하는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연곡사동부도비(보물 제153호)·연곡사현각선사탑비(鷰谷寺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2호)·연곡사삼층석탑(보물 제151호) 등이 있다.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차일봉(遮日峰) 남쪽에 있는 사찰로, 829년(흥덕왕 4) 덕운(德雲)이 창건하였다.
천은사는 본래 감로사(甘露寺) 또는 천언사(天彦寺)라 불리던 것을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1678년(숙종 4)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방문화재 두 점이 있으며 작설차(雀舌茶)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2)에 삼법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다가 정강왕 때 쌍계사라 이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친필 비문으로 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쌍계사부도(보물 제380호) 등이 있다. 쌍계사 북쪽 8㎞, 화개면 범왕리에는 103년(파사왕 24)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일곱 왕자를 위하여 지었다는 칠불암(七佛庵)이 있다.
이 절에는 신라 효공왕 때 운공(雲空)이 만든 아자방(亞字房)이 유명하다. 아(亞)자형의 온돌방으로 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방 전체가 데워지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천왕봉 동쪽 기슭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는 548년 연기가 창건한 대원사(大源寺)가 있다. 현재의 것은 1948년에 소실된 것을 1963년에 재건한 것이다.
법계사(法界寺)도 544년 연기가 창건한 가람으로 천왕봉 남쪽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다. 경내에는 자연석을 기단으로 이용하여 만든 법계사3층석탑(보물 제473호)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지리산 서북쪽 기슭 만수천(萬壽川) 강변에는 828년(흥덕왕 3) 증각(證覺)이 창건하였다는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경내에는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인근 산내면 대정리 백장암(百丈庵)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실상사에는 풍수사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의 내원사(內院寺), 산청군 신동면 율현리에 보물 제374호인 대웅전이 있는 율곡사(栗谷寺),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정취암(淨趣庵), 함양군 마천면에 보물 제474호인 삼층석탑이 있는 벽송사(碧松寺) 등이 있다.
율곡사 대웅전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특이하여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조립한 것으로 일명 몽침절이라고도 불린다. 몽침이란 베고 자는 목침의 다른 이름인데, 목공(木工)이 목침을 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문화 행사로 지리산약수제(智異山藥水祭)가 있는데 곡우절(穀雨節)을 전후하여 열린다. 이것은 신라 때부터 행하여지던 제천행사의 하나로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라 하였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남악사(南嶽祠)라 하였다.
현재의 약수제라는 명칭은 곡우 무렵에 거자목(距杍木)에 상처를 내서 나오는 물이 만병통치에 유효하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 약수제는 일제 침략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중단되었다가 1962년부터 노고단을 중심으로 다시 열리면서 지역 주민의 공동체의식의 함양에 기여하고 있다.
-문학·예술 속에 나타난 모습
우리나라의 기본 골격이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계가 중추가 된다는 인식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그래서 지리산을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의 지리 사상인 풍수지리설에서도 받아들인 바이거니와,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의 없이 전수되어온 땅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초적인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밝힌 이가 신경준이다. 신경준은 그의 <산수고>에서 산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산맥세의 흐름을 상세하게 파악한 바 있는데, 뒤에 이것을 기초로 <산경표 (山經表)>가 만들어졌다.
백두산을 시작으로 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맥세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리산은 민족의 진원지며 영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의 한반도 남부를 대변하는 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풍수사상에서는 민족적인 주체의식을 상징하는 의미를 띠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실상사의 풍수전설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백두산의 기맥(氣脈)이 이곳을 지나 일본으로 연결되는데 그 지기(地氣)를 끊어 놓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 바로 실상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경내 약사전에 봉안된 4,000근 짜리 무쇠로 제작된 약사여래철불은 높이 2.5m로 좌대 없이 땅바닥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富士山)을 일직선상으로 바라보도록 좌정되어 있는데, 맨 바닥에 철불을 모신 이유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지기를 막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보광전 범종에 그려진 일본 지도 역시 매일 종을 때릴 때 얻어맞는 위치에 일본이 그려져 있어 위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리산 도처에서 들을 수 있는 설화들인데, 남원시 주천면 노치산 갈재의 <숯막이야기>는 고종이 그곳에 숯 수천 가마를 쌓고 불을 놓아 일본으로 가는 지맥을 막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혹은 동학운동 때 또는 의병항쟁 때 왜군을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의 한 맺힌 이야기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지리산에는 지리천왕(智異天王)과 여신(女神)숭배의 설화들이 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보면 그는 천왕봉에 발을 딛고 맨 먼저 그 천왕봉에 있는 성모묘에 제를 올리는데, 당집에 들어가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성모상 앞에서 비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성모상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 마야부인상을 숭배하는 전통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설은 후세의 윤색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고려왕계를 성스러운 혈통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고려 왕실에서 도선선사(道詵禪師)로 하여금 이 성모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설이다.
성모에 대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지금 지리천왕은 곧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고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三國遺事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를 듣고 이를 그들 임금의 핏줄로 삼고자 이를 만들어 받든다고 하였다.
셋째로 도선이 지리산에 선암(仙巖)·운암(雲巖) 등 삼암사(三巖寺)를 세우면서 이 절을 세우면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성모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뒤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계시를 내린 성모상을 세워 받들었다는 설이다.
넷째로 중국의 여신인 마고(麻姑)가 동쪽으로 와 정착한 것으로 믿고, 그 여신 숭배가 이 성모상을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지리산의 산정에 사는 여신의 이름이 마고 또는 마야고(麻耶姑)로 불린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래서 마고성모라는 복합어를 쓰기도 한다. <마고전설>은 지리산의 능선을 형상화하고 있는 면도 있다. 마고는 반야(般若)를 사랑하였다. 어느날 반야는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났으나 오지를 않는다. 마고는 기다림의 초조로 나무를 할퀸다.
이것이 지리산 주능선 부근의 고사목(枯死木)이다. 그 올로 베를 짜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천왕봉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서쪽 하늘을 보면 낭군봉인 반야봉이 마치 달려올 듯한 산세로 눈에 담긴다.
산 주변에서 익히 들을 수 있는 설화·전설들 외에도 음악에 있어서 민요가 주변 산촌에서 불려지고 있을 법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리산을 주대상으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아리랑의 경우, <남원아리랑><하동아리랑> 등이 있으나 지리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혹은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들을 보면 <고려사> 악지나 <증보문헌비고>에 작자나 연대는 알려지지 않은 <지리산가(智異山歌)>라는 백제 때의 가요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지리산에 대한 최초의 문학·예술 작품이 아니었겠는가 여겨진다.
구례의 한 여인이 지리산 밑에 살았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이 그 여자를 데려가고자 하나 죽기를 한하고 듣지 않으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본격적인 지리산 기록은 역시 기행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조선 시대의 기행문으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佔畢齋集 권2), 이륙(李陸)의 <유지리산록 遊智異山錄>(東文選 권21),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秋江文集 권6), 김일손(金馹孫)의 <속두류록(續頭流錄)>(濯纓集 권5), 조식(曺植)의 <유두류록>(南冥文集 권4), 양대박(梁大樸)의 <두류산기행(頭流山紀行)>(淸溪集 坤), 박장원(朴長遠)의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久堂集 권15), 정협(鄭悏)의 <유두류록(遊頭流錄)>(東文選 권21),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頭流山記)>(淵齋文集 권21) 등이 있다.
이 중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문 내용에서 몇 가지 표현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일행은 종자(從者)를 제외하고 정여창(鄭汝昌)·임정숙(林貞淑) 등 세 사람이며, 날짜는 4월 14일이다.
“단성(丹城) 서쪽으로 15리를 지나 또 비탈을 타고 서너마장을 가니 골짜기 입구 바위에 ‘廣濟巖門(광제암문)’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획이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수적이라고 전한다.……나무를 휘어 농기구를 만들고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마을이 있어 감탄하니, 따라온 중이 일러주기를, 이런 외진 땅에 사는 것은 이정(里正)의 박해가 없고 과중한 부역의 고통을 받지 않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라 하였다.……길은 없고 다만 천길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마치 은하수를 거꾸로 쏟는 듯하고, 오가는 나무꾼이 작은 돌멩이를 올려놓아 길을 표시하여 두었는데 나무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않았다.
시내가 그치고 대숲을 헤쳐 나오니 이윽고 땅은 모두 돌인데,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숨가쁘게 10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에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우람한 봉우리 세존암(世尊巖)을 만나 마침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 바라보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되어 보였다.
여기서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닿으니 중은 한 사람밖에 없고, 산꽃이 곱게 펴 저문 봄철을 수놓았다. ……저물녘에 봉우리의 절정에 오르니 바위 위에 한 칸의 판옥(板屋) 한 채가 겨우 서 있었다. 그 안에 여자의 석상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란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었고, ‘김종직·유호인(兪好仁)·조위가 성화 임진(成化壬辰, 1472년)에 함께 오르다’고 쓰여 있었다.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훑어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위의 일부 인용한 글로써 당시 지리산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묘사가 섬세하다. 또 알려진 한시로는 김부의(金富儀)의 <등지리산(登智異山)>, 김돈중(金敦中)의 <지리산차계부운(智異山次季父韻)>, 이색(李穡)의 <두류산>, 이첨(李詹)의 <두류산>, 양성지(梁誠之)의 <지리산>, 최익현(崔益鉉)의 <등두류산(登頭流山)><천왕봉(天王峯)>, 유방선(柳方善)의 <청학동(靑鶴洞)> 등이 있다.
현대작품으로는 이병주(李炳注)의 <지리산>, 문순태(文淳太)의 <달궁>과 <피아골>, 서정인(徐廷仁)의 <철쭉제> 등의 소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가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좌우 대립에 따른 민족의 뼈아픈 과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이 현대사에서 차지하였던 첨예한 이념 대립의 공간적 현장성의 반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 산을 둘러싸고 있는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의 작가들로부터도 시·소설·수필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나, 대부분이 서정성을 짙게 풍기는 것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직접 몸으로 그 뼈저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쓰라린 상처를 덮어두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혹은 묵중하고 푸근한 지리산의 웅자가 그 섬세한 정기로 모든 인간의 아픔을 감싸 안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지리십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옛 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 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자락에서 내려 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단정한 휴게소와 식당이 있다. 일반 등산객들은 종석대를 거치지 않고 코재로 직접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맞춘 돌포장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팔량치
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달구경이 그만인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져 있다고 한다.
-달궁 이야기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달궁이라는 이름은 계곡 들머리의 마한 왕궁터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어렴풋이 전해진다. 달궁계곡이 마한 왕조의 피신처였음을 밝힌 이는 김경렬씨다. 김씨는 저서 <다큐멘타리 지리산2>에서 지금의 달궁계곡에서 지리산 개산의 비밀을 풀었다. 마한왕조와 관련한 지리산 자락의 기록은 지리산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서산대사가 황령 아래 있던 절 황령암에 대해 적은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 가운데 한 산이 있으니 지리산이다. 이 산 북쪽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부른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과 정령이다. 옛날 한나라 소제 3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서 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공사케 했다. 도성이 완성된 후 고갯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 가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 험준한 산세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 팔량치라 했다. 서쪽은 정장군을 배치하고 정령(현재 정령치)이라 칭했다. 동쪽은 황장군을 배치시켜 황령으로 불렀다. 남쪽은 특히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 방어토록 하고 성삼(姓三)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오늘날 지리산 자락을 동강내고 도로가 연결된 해발 1090m의 성삼재다.
기원전 78년의 일이었다. 그때 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달궁계곡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남아 억새를 키우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 대홍수가 휩쓸면서 달궁은 전설에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에서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달궁터를 감추고 있던 흙이 씻겨 나갔다. 그때 드러난 것은 지금의 주춧돌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름 1.5m에 이르는 질그릇 시루와 청동제 수저 수십벌, 구리거울, 활촉 등도 출토됐다. 그러나 그 유물들은 일본 순사들이 어디론가 가져가버린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마한 왕조의 유적은 새걸산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곳곳에서도 찾아진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멀쩡하게 남아 있다. 마한의 정 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설명문에는 조각양식이 고려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인근에서는 마한 장군상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12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고 보물 1123호라고 적은 설명문에는 9분의 부처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찾아봐도 3분의 부처 이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풍화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나 탁본을 떠갈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 더 커보였다. 포수들도 마한 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동물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말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1400여m에 이르는 고봉의 능선이면서도 마한 장군상 앞은 유난히 평탄하다. 지금은 빽빽한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마한의 군대가 주둔했던 터일지도 모른다. 1960년 이곳을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때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그 유물들도 달궁의 유물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고단 일대는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기도 했고 고려조에는 몽고군과의 항전이, 임진왜란에는 왜적의 침입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다.

[고리봉] 1,248m.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대추, 밤, 곶감)과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묘봉(墓峰)치]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의 허리를 낮춘 부분인데,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앉아 있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서쪽에 산동면 위안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묘소가 있는 봉우리다.

[만복대(萬福臺)] 1,438.4m.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령치] 1,172m. 정령치는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달궁 부락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개로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전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큰고리봉] 1,305m. 남원시 산내면과 운봉읍 경계에 있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출발점인 성삼재에서 만복대 구간에 있는 고리봉(작은고리봉)과 구분하여 큰고리봉이라 불리운다. 정령치휴게소를 떠나 큰고리봉까지 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큰고리봉에서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 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큰고리봉에서 대간은 우측 고기리 마을 방향으로 뚝 떨어진다. 고리봉은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고기리] 남원시 주천면 소재하며 내기, 고촌 등이 있다.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앞으로는 원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고촌, 안터, 내건너 등이 있다. 고촌은 고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대가 높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터는 고촌 서쪽에 있으며 골짜기 안에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1914년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안내(內)자와 터기(基)자로 고쳐 내기(內基)로 바뀌었다. 내건너는 고촌 남쪽에 있으며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자료출처 : 국립공원관리공단, 네이버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 백두대간의 역사 등)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학교를 열며> 얘기합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이어진 분수령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에서 1정간 13정맥이 갈래치고 또 기맥, 지맥으로 뻗어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에서 모든 강들이 시원하고 그 강줄기에 기대어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일구어졌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그 산줄기와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대어 사는 이 땅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대간입니다. 낙동정맥, 호남정맥, 땅끝기맥 등 정맥과 지맥, 기맥을 모두 아우른 백두대간입니다.

지난 3년에 이어 앞으로의 백두대간학교는 이 땅 곳곳으로 갈래친 백두대간을 찾아갑니다. 앞으로 백두대간학교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하나, 백두대간학교의 원래 취지대로 백두대간 걸작 구간 산행을 계속합니다.
둘, 백두대간에서 갈래친 정맥, 기맥의 걸작 구간도 찾아갑니다.
셋, 월별, 계절별로 특별히 아름다운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넷, 산행과 문화유적 탐방을 아울러서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도록 합니다.
다섯, 참가자들이 희망하시는 산줄기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합니다(전체 일정은 유지하지만, 꼭 고수하지는 않습니다).
여섯, 산행 후 계절별, 지역별 특색 있는 먹거리로 뒤풀이 자리를 마련합니다.
일곱, 멤버십 강화를 위해 정기 산행 이외에 비정기 산행(번개산행, 종주산행, 번개모임 등)도 추진합니다.
여덟,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중심이 되는 산행을 이어갑니다.
아홉, 백두대간학교가 지향하는 산행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땅 여러 갈래로 백두대간의 아름답고 소중한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그 아름다운 산줄기를 늘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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