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이런 반성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용어의 사용이나 개념화는 엄밀하고 정확하여 대상을 잘 드러내면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순진한 것인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양극화', '비정규직 차별'과 같은 용어들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게 된 데는 필자도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드러내고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도출한 이런 개념들이 노동자들을 옥죄고 비정규직을 오히려 확산시키는 데 악용되고 있으니 답답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며칠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이중구조화 되어 있고 비정규직은 차별적인 보상을 받고 있다. 현실을 이렇게 인식한다면 이에 대한 대처는 당연히 비정규직을 줄여나가고 이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노동시장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은 비정규직을 늘리고 정규직을 흔들어대는 내용들이다. 진보적인 아젠다를 취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신묘한 재주를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에서 네덜란드나 덴마크처럼 사회적 대타협을 해달라고 주문하였다. 그것도 오는 3월로 시한까지 못 박아서. 전체 노동자의 5% 내외를 대표하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또 그 비슷한 정도의 비중으로 자본을 대표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 합의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부르기 차마 민망하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든 이들이 노사를 대표해서 협상을 한다고 치자. 그런데 이 협상테이블에 정부가 가지고 온 가이드라인을 보면 이것은 도무지 타협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다.
고용노동부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노사정위원회에 제출하고 논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소위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좋은 말과 몇 가지 사소한 개선사항이 포함되어 있지만, 언론이 가장 주목한 것은 기업이 기간제 근로자를 2년 이상 고용할 수 없도록 한 것을 고쳐서 4년으로 연장하는 안이었다. 그러면서 이것을 '장그래법'이니,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니 뭐니 해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기간제 4년'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파장이 클 수 있는 내용이 있었으니, 근로계약 해지의 기준과 절차를 명확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직무 수행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해고를 용이하게 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지금은 법률적으로 '부당 해고'가 될까봐 기업 측에서 조심하는 측면이 있지만, 해고 기준을 '명확화(?)'하고나면 형식적인 요건만 갖추면 해고가 지금보다 훨씬 손쉬워지게 될 것이다. 대기업 근로자와 정규직의 고용 안정성이 크게 훼손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기간제 4년으로 비정규직은 늘리고, 해고 기준 완화로 정규직의 고용 안정성은 흔드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이것이 근로자간 격차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사용자 단체가 내놓은 안이 아니라 정부 안이라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4년 후를 바라보면서 불평 한마디 못하고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고, 정규직 노동자도 상급자의 평가에 목을 매고 더욱 치열한 생존 경쟁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업은 상시적으로 필요한 인력임에도 불구하고 기간제 근로자를 채용할 것이고, 모든 노동자들의 충성 경쟁을 즐기게 될 것이다.
자본가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이려면 정규직에 대한 보호를 완화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다. 기업이 정규직을 쉽게 해고할 수 있다면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고용하지 않고 정규직으로 고용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논리인데, 이것이 현 정부의 인식이고 대통령의 생각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겠는가? 기업이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기 어렵고, 고용한다고 해도 인건비 쥐어짜기로 비용을 절감하는 길이 용이하지 않다면 비정규직을 많이 쓰지 않고 정규직을 쓸 것이라는 논리도 똑같이 성립함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격차를 줄이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번 정책의 목적이 전적으로 자본가의 편에서 기업 활동을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사정 삼자협의체라는 판에 정부가 전적으로 사측 편을 드는 안을 내놓고 노사간에 타협을 하라고 족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부러워해 마지않는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타협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이 나라들은 노동조합 조직률이 70% 내외이고 노조 활동의 결과가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까지 적용되어 노사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가 전체의 80%를 넘어서는 나라이다. 노동조합은 비교적 대등한 위치에서 자본과 협상할 수 있으며, 협상은 가치가 비슷한 물건을 내놓고 서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떤가? 질문은 이렇게 던져진다. 정규직이 죽을래, 비정규직이 죽을래? 사측은 뒷짐 지고 표정 관리 하고 있는 중이다.
나누어 먹을 밥그릇에서 기업이 얼마를 가져가는지는 문제 삼지 않고, 노동자들의 몫만 공평하게 나누면 되는 것인가? 전체 국가의 기업 활동을 통해서 창출한 이익 중에서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을 가리키는 '노동 소득 분배율'이라는 개념이 있다.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모든 국민들은 뼛속까지 깊이 체험하고 있다. 먹고 살기는 점점 더 힘들어 지고 불평등은 심해지고 각 분야에서 경쟁이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이 와중에 정부는 정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정규직 때문에 당신이 취업을 못한다고. 저 사람이 임금을 많이 받아가서 당신에게 줄 것은 쥐꼬리만큼 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종합대책'과 노동시장 구조 개혁 플랜에는 노동자가 감당해야할 부담만 가득 들어있지 기업이 추가적으로 어떤 부담을 할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이런 걸 들고 와서 노사정협의를 하자고 하는 게 도무지 경우 없는 일이다. 노노갈등을 부추기기 전에 먼저, 기업은 무엇을 내놓을 것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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