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 씨에 대한 회고담을 쓰는 기회에 혁신정당(요즘 표현으론 진보정당)에 관한 나의 지난날의 관찰을 종합하여 소개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혁신계라고 할 때에 대충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로 일제 때 사회주의(공산주의 포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하는데 그 당시 일본 사회에 마르크시즘의 물결은 대단했다. 당시 일본에 유학했던 한국 학생들이 그 물이 들었다. 학자들 가운데서는 동경제국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한 이동화, 신도성 씨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따랐다. 또한 한반도 지근거리에 소련이 있었기에 그 영향이 컸다. 소련도 손을 뻗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움을 기대하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둘째로, 첫째 항목과 연관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주로 중국에서의 우리 독립운동은 크게 보아 세 가닥이었다고 한다. 첫째 가닥은 김구 선생 등과 같은 요즘 표현으로는 우익적 민족주의 가닥. 둘째 가닥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가닥. 셋째 가닥은 요즘 같아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정부주의 가닥. 당시 아나키즘의 사조는 대단한 것이어서 예를 들어 김좌진 장군도 후기에는 그 가닥이었다 한다. 독립운동의 가문으로서는 최대의 가문인 이회영 씨조차도 아나키스트로 분류된다. 그리고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신채호 선생도 아나키스트였다. 임정 요인으로 귀국 후 독립노농당이란 아나키스트 정당을 만든 유림 씨를 빼놓을 수 없다.
마르크스와 바쿠닌은 혁명이론의 양대 산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칫 경시되기도 하였던 그 바쿠닌이 당시는 대단했던 것 같다(E.H.Carr의 바쿠닌 전기 참고). 한국에도 그 영향은 은연 중 미쳐 아나키스트가 실제로는 많았다고 한다.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일반을 오도하는 결과가 되었다.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을 최소화하고 주민의 자치를 최대화하자는 것이지, 무정부주의는 아니다. 번역어가 마땅치 않아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것이 뒤에 여러 가지로 오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하간 그 아나키스트 세력이 대단하였기에 스탈린이 국제적으로 그 숙청을 명령하여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안의 아나키스트 숙청이 있었고, 우리의 독립운동에서도 예를 들어 김좌진 장군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 세 가닥 세력의 대립은 줄기차게 진행되었는데 임시정부 후반에 가서 조소앙 선생이 내세운 삼균주의(三均主義) 노선에 따라 가까스로 타협을 본 것이다. 그러한 독립운동 세력 가운데서 보수적 민족주의자를 제외한 세력이 귀국 후 점차 혁신계에 합류한 것이다.
셋째로, 별로 의미가 없는 세력이지만 수적으로는 많았던 것이 이승만 정권에서의 소외 세력이다. 통칭 혁신계 안에는 혁신계와 전혀 관계 없는, 이승만 쪽에서 찬밥 먹다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상당수였다. (요즘도 여당에서 한자리 하려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야당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다음 생각할 것이 혁신세력의 운동방식이다. 그 당시의 혁신정당들은 간판을 내걸고 가끔 성명서만 발표했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4.19 후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군중대회나 행진은 예외적이다.) 간행물도 별로 없었다.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이 그래도 가장 컸었는데 그 당도 잡지 형태의 <중앙정치>를 서너 호 낸 것을 본 기억밖에 없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가. 당 간판만 내걸고 가끔 성명만 내면 혁신정당이니…. 그러니 혁신정당이 난립할 수밖에 없다. 혁신정당 만들기가 식은 죽 먹듯 쉽기 때문이다. 1인 1당인 파편정당이 있었고, 유명무실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거명되던 혁신정당들 모두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아주 줄여서는, 해방공간 말고는 진보당과 통일사회당 정도가 그나마 제 모습이었다 할 것이다.
그때는 혁신정당의 외곽단체나 손발이 되는 산하단체가 거의 없었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 당시 시민운동은 형성되니 않았었다. 요즘은 시민운동이 활발하여 때로는 시민운동 단체가 거의 작은 정당에 버금가기도 하지만 그때는 시민운동 탄생의 전야(前夜)였다. 농촌이 아직 큰 몫이었기에 농민운동이 얼마간 의미가 있을 정도였다 할까. 노동운동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어용노조여서 별로 의미가 없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가 탄생하는 것은 훨씬 후이다.
다만 학생운동은 약간 기대를 걸만 했다. 진보당이 학생층 중심으로 여명회(黎明會)를 만들었었는데, 그것도 초보적이라 할 것이었다. 나도 잘 아는 친구 권대복 군이 회장이었는데 그는 영등포학우회(그때만 해도 영등포는 서울과 동떨어진 별개 지역이었다)와 그가 다니던 국학대학 학생 중심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친구들 조직으로 여명회를 만들었었다. 그래도 그 무렵 학생운동이 싹텄던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서울대 문리대의 신진회(新進會)는 50년대 중반에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진보적 학생조직으로 뭉쳐진 것이다.
4.19 공간에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은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조직이었다. 통사당을 제외하고 사회당 혁신당 사대당(고수파) 등 여타 혁신정당이 모두 뭉쳤을 뿐만 아니라,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등 청년학생조직을 산하에 포용하고 있었으며, 특히 피학살유족회라고 아주 열성적인 조직을 끌어안고 있었다. 천도교의 큰 덩어리도 포용했던 것 같다. 3․1운동 때의 대표 서명자인 손병희 선생의 부인 주각경 여사가 그때 민자통의 한 상징적 존재로 거명되었었다. 내가 겪은 경험으로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그나마 천도교 측이 재정적 부담도 했던 것 같다.
그때 신문기자로 관찰했었기에 얼마간 겉핥기식일 것이다. 철저히 연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상에 말한 것들이 그 당시 혁신정당들을 관찰한 대체적인 인상평이다. 문자 그대로 인상평이라는 한계 안에서의 이야기다.
☞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 혁신정객 김철 <상> 보기
☞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 혁신정객 김철 <중>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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