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혁신정객 김철 씨(1926-1994)를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4·19 후 통일사회당의 국제국장을 할 때이며 그 후로도 단속적으로 사귀어 왔으니 30여 년의 세월이다. 정확히 말하면 1950년대 중반 대학 때 그와 만난 일이 있다. 같은 동아리의 학생들이 장건상, 전진한, 고정훈, 김철 씨 등을 순차로 만났던 것이다.
4·19 후 나는 <민국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국회 팀으로 일하는 한편 혁신정당을 담당하였다. 여러 혁신정당 가운데 국회의원(그때는 민의원·참의원 양원제) 5명쯤을 포용하고 있던, 그래도 그럴듯한 통일사회당(통사당)에 더욱 관심을 가졌었다. 소속 국회의원의 수는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어 민의원의 박환생 의원은 소속은 통사당인 것처럼 되어있으나 사실상 독립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혁신계는 사회대중당(사대당) 혁신동지총연맹 등으로 출발했다가 이합집산을 거쳐 5·16 전까지는 통사당, 사회당, 혁신당, 사대당(고수파)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통일사회당의 실무 3국장, 고정훈 김철 박권희
통사당에는 실무 3국장으로 고정훈 선전국장, 김철 국제국장, 박권희(민의원) 조직국장이 있었는데, 기자들과의 빈번한 접촉은 역시 고정훈 씨이고 그다음이 김철 씨였다.
먼저 박권희 씨 이야기를 간단히 해두겠다. 경남 밀양의 부잣집 아들인 박 씨는 일본에 유학하여 의사가 된다. 그러다 4·19가 나자 명망가인 부친의 기반도 활용하여 고향서 민의원에 출마, 당선된다. 일본의 자유로운 정치 환경, 당시는 분위기에 있어서는 보수와 진보가 비슷한 세를 이루어 경쟁하던 그 일본의 정치상황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는 혁신계에 기울어지고, 통사당의 멤버가 된다. 일본에 체류한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론 무장을 한 것도 아니고 투사로서의 면모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거듭 말해둘 것은 그는 집안의 기반으로 당선된 것이지 혁신의 주장으로 당선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출입기자로 그와 친하게 지냈는데, 친형이 서울서 유명한 의사로 활약하고 있고 동생이 교수로 있으며 자형이 햄릿 전공인 유명한 영문학자 여석기 교수다. 성품이 온화한 신사로 혁신정당보다는 보수정당에 어울릴 타입이었다.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그가 국방위에 소속해 있었는데 그때 야당인 신민당 소속 예비역 장성 출신 의원이 통사당 의원은 사상을 믿을 수 없으니 군사기밀을 다룰 때는 제외하여야 한다고 하여 문제가 생겼다. 영어로 security-risk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박 의원이 본회의에서 신상발언을 하여 항의하기도 하였다. 포수가 흰 토끼를 붉은 토끼라고 쫓아오니 흰 토끼는 자기가 흰 토끼임을 어떻게 증명하여야 할까 답답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5·16이 났다. 그는 마침 일본에 여행 중이어서 혁신계 일제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국내에 있었더라면 대개가 그랬듯 5년쯤의 억울한 형무소살이를 하였을 것이다. 그 후 그는 정치에서 아예 손을 떼고, 일본에서 의사로서만 활동했다. 나중에 가끔 귀국할 때는 야당의 김영삼 씨를 만나는 등 그쪽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혁신계와는 완전 담을 쌓은 셈이다.
고정훈 씨는 모든 언행이 화려하다. 일본에서 어학으로는 첫째 손가락을 꼽는 아오야마(靑山)학원을 나왔으며, 해방 후 북에서 러시아군 측 통역을 하다가 월남하여 국군의 정보부대에서 영관급 대우를 받으며 활약했기에 흔히들 그를 '커늘(colonel)·고’라고 불렀다. 그 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국제문제를 다루었으며 'K생'이라는 머리글자로 나오는 해설은 지식인·대학생 사회에 인기가 있었다. 4·19가 나자 정치에 뛰어들어 한때 구국청년당이란 정당을 만들어 독불장군 당수 노릇도 하였다. 고 씨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지식인사회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돈 만드는 재주 또한 대단하여 화려한 사교활동을 하였다. 여성편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비하면 김철 씨는 약간 따분한 느낌이다. 물론 영어를 어지간히 하는 편으로 천천히 하는 영어로 그래도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잘 했었다. 그러나 유창하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런 면에서 고정훈 씨에 처졌다. 또 역할 자체가 고 씨가 언론 담당의 선전국장이고, 김 씨는 국제 담당의 국제국장이니 그렇기도 하였다. 김철 씨는 단구인 셈이다. 아주 작은 키는 아니지만 큰 키는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얼굴이 다부지고, 체격도 튼실하게 생겼다. 젊었을 때 권투선수 지망생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렇게 듣고 보니 권투선수다운 다부지고 확실한 체구가 느껴진다. 나의 대학 동창이고 역시 김철 씨와 가까웠던 <동화통신> 기자 최상징 씨에 의하면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그는 신상옥 영화감독과 경성중학 동기라고 한다. 정치하며 고생할 때 신 감독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고.
이범석 장군의 족청에서 정치활동 시작
김철 씨의 정치경력은 해방 후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서 시작한다. 이범석 장군은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고, 광복군 제2지대장을 역임한 혁혁한 독립투사이다. 부산 정치파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었던(그러니까 '저질렀던') 족청은 그때까지 이승만 대통령 정권의 첫째 가는 담당 정치세력이었다. 백두진 총리, 안호상 박병권 이재형 등등의 장관도 족청계였다. 가히 '족청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족청에서 서영훈 김철 김정례 씨 등은 중견간부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굳건한 동지적 유대를 평생토록 유지한다. 대단하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민정당은 애써 '평생동지' 운운하고 강조했으나 쉽게 와해해 버렸는데 해방 후 바로 조직된 철기의 족청은 그렇지 않으니 새삼 연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일본 학자가 한국 학자에 앞서 족청 연구서를 냈다.
철기 이범석 씨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하다가 부산 정치파동 때는 내무장관이 되고 족청세력도 '땃벌떼' 등 행동대를 조직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압으로 통과시켰다. 나는 그때 부산서 대학을 다녔기에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안다. 개헌 후 철기는 이승만·이범석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되어 앞날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1인 장기집권을 생각한 듯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숙청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정·부통령 선거의 자유당 선거 벽보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범석 부통령 후보의 벽보가 전국에서 일제히 찢겨 나간 것이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등록한 무명의 함태영 목사가 이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재일 거류민단의 사무국장으로
그 후 족청계의 일대 숙청이 진행된다. 김철 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 청강도 하다가 재일거류민단의 사무국장을 지냈다. 어느 기록에는 부산 정치파동 전에 일본으로 간 것으로도 나온다. 그러나 부산 정치파동 당시 김철 씨가 족청의 정책부장을 맡았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때 한국전력의 노조위원장도 했고 박정희 공화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도 했던 최용수 씨는 노동부장이었다 한다.
여기서 김철 씨와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민단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요즘 읽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소개하고 싶다. 일본 만주 침략의 지략가 가운데 핵심인물을 흔히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라 한다. 그는 관동군의 실세로 5족협화(滿·漢·蒙·韓·日)의 그럴듯한 이상을 내걸고 만주 건국을 주도했었는데, 얼마 후 대동아전쟁이라고 일본이 말하는 세계 2차 대전 때 일본의 총리가 되는 도조 히데끼(東條英機)장군과 의견이 맞지 않아 본국의 사단장으로 밀리게 되었다. 그리고 불우한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 이시하라가 나중에 민단의 중앙단장이 되는 조영주(曺寧柱) 씨를 양자로 삼았다는 사실을 일본의 정치서적에서 읽었다. 5족협화를 내걸었던 이시하라이니 한국인인 조 씨를 그 명분에 따라 양자로 삼았을 것이다. 의형제 맺듯 하는 의(義)부자관계 비슷한 게 아닌가 한다. 그 조 씨가 민단 단장으로 서울에 왔을 때 회식자리에서 한번 만나보았는데 무술 고단자인 다부진 몸매의 인물로 여하간 주관이 뚜렷한 거물로 보였다.
귀국 후 혁신정당 운동에 뛰어들어
민단에서 활약하다가 귀국한 김철 씨는 혁신정당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일본에서의 견문의 영향도 분명 있을 것 같다. 박권희 씨를 말하며 분석한 그런 영향 말이다. 요즘은 '진보'라고 호칭하지만 그때는 '혁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농담으로 '가죽신'이라고 말했다. 한자로 가죽 혁(革)이기 때문. 김철 씨의 이름은 서상일 씨가 주도하던 민주혁신당(민혁당) 간부 명단부터 볼 수 있다. 조봉암 씨와 서상일 씨는 처음에는 함께 진보당을 만들려 했으나 의견이 갈려 진보당과 민혁당으로 나뉘게 된다. 분파가 된 민혁당은 진보당에 비해 그 세가 작았다.
그 후 4·19가 나고 김철 씨를 통사당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정치의 봄은 짧았고 5·16의 혹한이 몰아닥쳐 혁신계의 간부들은 거의 모두 감옥살이 신세가 되었다. 4개 중요 혁신정당 가운데 사회당이 가장 혹독하게 당하고 통사당이 비교적 덜 혹독하게 처벌된 것 같다는 판단이다. 나는 그 까닭을 사회당 혁신당 사대당(고수파)은 그때 남북협상을 적극 주장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 소속해 있고, 통사당은 거기서 탈퇴하여 중립화를 내세운 중립화 통일연맹을 조직한 때문인 것으로 본다. 5·16 쿠데타 세력이 볼 때 남북협상파가 두려운 것이지 중립화론자들은 가볍게 보아도 될 존재였을 것이다. 운동의 다이너미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 사회당에는 지난날의 근로인민당계가 많이 남아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5·16후 몇 년 동안은 소식을 몰랐다. 그 후 김철 씨가 1960년대 후반에 통일사회당을 재건하겠다고 나섰다. 재건하겠다는 것은 좋은데, 지난날의 통사당에서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제명한 게 구설에 올랐다. 혁신계의 원로들은 비난을 퍼부었는데 나도 그런 성토를 자주 들었다. 5·16 전 통사당의 형식상 일인자였던 이동화(실질적 지도자는 동암 서상일 씨), 이인자였던 송남헌…. 거의 모든 간부가 배제되었다.
정치학의 고전인 미헬스(Robert Michels)의 <정당론>을 보면 '과두체제의 철의 법칙'(The Iron Law of Oligarchy)이라는 게 있다.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을 연구해 보니 과두화 경향, 1인 체제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에서는 그 법칙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북한도 그렇다. 불행한 일이다. 김철 씨도 완전 1인 체제를 확립해 버리고 말았다. 지나치게 과속인 것 같다. 좀 심했다. 왕년의 이름 있는 인사들은 모두 사라지고 김철 씨만이 남았다. 거기에 그래도 좀 알 만한 사람으로는 안필수 대변인이 있었다. 내가 어디다가 그때를 묘사하는 글을 쓰면서 안필수 씨를 방자 또는 '산초 판사'라 했더니 자손 측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악의는 전혀 아니고 재미있게 묘사하려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먼저 거명한 바 있는 최상징 씨는 이색적인 진보청년이다. 학생 때 서울법대의 유명한 '사회법학회'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매우 크고 의미 있는 동아리로 거기에는 황건, 심재택, 조영래, 장기표 씨 등 이름 있는 운동가 다수가 참여했었다. 그는 김철 씨와 뜻이 맞아 계속 가까이 사귀었다. 그가 동화통신 기자로 있다가 영국 유학을 가서 옥스퍼드대학 부설의 러스킨(Ruskin) 칼리지(대학)에 다니고 있던 1969년 런던 근교의 이스트본(Eastborne)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대회가 열렸다. 김철 씨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 참석 못 한다고 최 씨에 연락을 했다. 최 씨는 영국 노동당의 친한 사람을 통해 한국의 통사당을 SI 옵서버에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 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연설까지 했다. 대단한 능력이다. 자세히 물어보니 영국의 막강한 노조 조직인 TUC(Trade Union Congress;노동조합회의)의 중요 간부가 한국에 왔을 때 사귈 기회가 있어 그 간부를 통해 작용했다는 것이다. TUC는 영국 노동당의 아주 중요한 기둥이다.
김철 씨는 외국에 갈 때마다 거의 매번 여권 때문에 애를 먹었다. 같은 족청 출신으로 둘이 오누이 같이 지낸, 마당발인 김정례 여사가 자주 중앙정보부에 교섭하여 여권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정의 판단기획국장이었던, 그리고 나중에 국회의원도 여러 번 지낸 김영광 씨가 창구였던 것 같다.
나는 임종철 교수의 김철 정당 참여를 주제로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어떤 지식인의 정당 참여'란 제목이다.
"최근 세칭 일류대학의 L교수가 혁신정당 가운데 하나인 사회민주당의 연구기관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선한 감동을 느꼈다. 혁신정당에의 참여는 법률적으로 하등 문제가 없으나 분위기에 있어서는 매우 꺼려지는 일인 데다가 그 교수는 매우 고명하여 속된 말로 그런 데서 '썩을'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L교수를 만났을 때 '그래도 괜찮은 거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하였다. 법률적으로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분위기에 눌리어 살아왔기에 그런 걱정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그런 물음을 했더라면 고집스리우리만큼 소신이 있고 영악스러우리만큼 똑똑한 교수에게 보기 좋게 당했을 것이다…."
<정우> 1985년 8월호 '정우칼럼'(<정우>는 나중에 <헌정>으로 제호가 바뀐다)
종로3가 쪽의 사회민주당사로 김철 씨를 방문하니 근처의 '농원'이란 음식점으로 가잔다. 지하 1층인데 주인인 여성이 농민운동을 한, 말하자면 운동권 출신이다. 용모는 보통이었지만 지능은 높고 의지가 강한 것 같았다. 몇 번 가보았는데 김철 씨를 대단한 우국지사로 떠받든다.
그 시절 당사 근처의 다방에서 모금전이 있었다. 가보니 마침 유명한 신학자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가 오랜 시간 동안 머물고 계셨다. 둘 사이는 각별히 가까웠던 것 같은데 같은 함경도 출신이란 인연도 있을 것이다. 장공은 기독교장로교(기장)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예장 쪽과 비교하여 세는 약하나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활발한 교파다. 장공 다음의 인물은 강원룡 목사이고 박형규 조향록 김경재 목사 등이 거기에 속한다. 장공이 찬조 출품한 세필(細筆) 붓글씨는 욕심이 날 만했다. 그래서 나보다 좀 여유가 있는 김종인 의원에 권유하여 수장하게 하였다. 장공이 타계한 지금 김 의원은 그 세필 붓글씨를 가보처럼 소장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신문사 간부 때 아무래도 김철 씨보다는 주머니 사정이 나아 가끔 술을 샀다. 그리고 드물게는 차로 흑석동 중앙대학 뒤의 높은 지대에 있던 그의 집까지 바래다주기도 하였다. 집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다음 서초동(서래마을)에 있던 집으로 초대하니 일본 여행 때 가져온 청주 작은 병을 들고 온다. 궁핍한 그로서는 그게 성의 표시가 아닌가.
(이 글은 서울강서문인협회가 발행하는 <강서문학> 2014년호에 실렸던 것으로, 3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후 연재는 한 달 간격으로 진행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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