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철학학교(교장 양운덕, 철학박사)가 새해 봄학기 강의를 준비합니다. 주제는 <니체와 칸트의 만남 : 진리와 도덕의 새로운 척도를 위하여>입니다.
양운덕 교장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헤겔 연구(<해겔 철학에 나타난 개체와 공동체의 변증법>)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구 근,현대 사회철학에서 전개된 개인과 공동체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면서, 질서와 무질서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복잡성의 패러다임(모랭), 헤르메스적 인식론(세르), 자율성과 창조의 원천인 ‘상상적인 것’(카스토리아디스) 등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구실 ‘필로소피아’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철학과 문학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이 있게 소화하기 위한 모임과 강의를 하고 있다. 웹진 <민연>에 사랑을 주제로 한 <사랑의 문학, 사랑의 철학>, 다양한 문학적 주제들을 다루는 <문학의 1001가지 질문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대학 새내기들의 철학 입문서인 ‘피노키오 철학 시리즈’(<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휴머니스트)외 3권), 보르헤스 해설서인 <보르헤스의 지팡이>(민음사), 철학자들의 문학 읽기를 소개하는 <문학과 철학의 향연>(문학과 지성사) 등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문학과철학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문학과 철학은 우리의 삶과 세계를 비추는 두 거울이다. 문학과 철학이 없는 삶과 세계가 공허할 뿐이라면, 삶과 세계를 제대로 담고 질문하고 형상화하지 못하는 문학과 철학은 맹목적인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철학은 배타적으로 맞서지 않는다. 서로가 삶과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고 풍성하게 하는 (타원의 두 초점처럼) 두 개의 중심을 마련하고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합성을 추구할 수 있다.
문학과 철학의 합성은 서로가 자신의 개별성만을 고수하여 기계적으로 병존하거나 화학적으로 뒤섞여서 서로의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 없다. 양자가 서로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포괄성을 마련하는 유기적 결합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없는 문학은 전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 없이 개별적인 경험과 특수성의 혼란을 벗어나기 어려워서 차이들의 바다에서 길을 잃기 쉽고, 문학이 없는 철학은 고정된 본질로 모든 것을 단조로운 반복의 틀에 집어넣을 것이다. 이런 철학에서 나와 너, 기쁨과 슬픔, 이성과 감성, 삶과 세계의 다양한 차이들은 그저 동일한 것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학의 역사는 앞선 질문과 답에 대해서 다르게 질문하고 새롭게 묻는 과정이다. 질문은 사고의 지향을 세우고 사고할 만한 것을 찾고 사고의 윤곽을 마련한다. 좋거나 나쁜 답들은 질문이 구성하는 공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우리는 세계를 일정한 관점에 따라서 해석한다. 관점에 세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 어떤 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어떤 것이 구체적이고 흥미롭고 풍성한 관점들을 선물할까? 기쁨과 능력을 주는 관점이 있고 슬픔과 무기력을 조장하는 관점이 있다. 삶을 긍정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삶을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도 있다. 값싼 희망과 행복으로 치장하거나 손쉬운 치유를 권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허무를 감당하는 건강한 것도 있다. 어떤 관점이 기쁨을 자아내고 삶의 고통을 껴안으면서 잘 사는 권리와 능력을 얻는 데 도움을 줄까?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면, 먹거리 자체를 누리고 즐길 수 있다. 성공하거나 유식해지기 위해서 철학을 이용하거나 철학 진리를 위해서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능력으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스스로 사고의 수레를 이끈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적하듯이) 삶과 고통을 긍정하는 어린이처럼 철학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영원히 놀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모든 문제의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삶과 세계의 문제들 앞에서 불확실성과 모순, 역설과 우연들을 마주해서 혼란스러운 현상들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질서의 부작용과 위험을 살피고 새로운 사고를 모색한다면 좋은 친구이자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문학은 어떤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가?
문학은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가? 문학은 다른 현실을 창조하고자 한다.
문학은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 문학은 진리와 도덕이 제시한 정해진 길에 만족하는가?
문학은 새로운 길, 길 없는 길, 갈 수 없는 길을 가고자 한다. 문학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언어로 포착하고자 한다. 문학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고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불)가능성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다.
문학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문학은 현명하고 절대적인 답을 앞세워 군림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가? 문학은 질문 앞에 나서고, 거듭 새롭게 질문한다. 문학은 어떤 구체성을 구하는가? 문학은 가장 구체적인 존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문학적 ‘하나’는 하나에 그치지 않고 ‘모두’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단 하나의 사건, 존재의 사소한 고통, 가벼운 슬픔, 작은 질문을 크고 중요하게 여긴다.
문학은 자기를 위한 것인가, 타자 앞에 서는 것인가? 문학은 타자에게 열리고 타자를 중심에 두려고 하고 자기를 내던지는 시도를 우회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다. 타자 없는 자기보다는 자기 없는 타자를 앞세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자기와 타자가 공존하는 체제”이고, “다수자가 소수자들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강한 적뿐만 아니라 약한 적과 공존”하는 역설적인 것이라면, “적과 공존하기convivir el enmigo! 반대파를 포용하는 정치gobernar con la opposiccion!”는 문학적이다.
교장선생님은 봄학기 강의 개요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근대철학의 두 정점에 있는 칸트와 니체. 우리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우리는 진리와 도덕뿐만 아니라 인간, 예술, 종교에 관해서 서로 맞서는 두 철학자의 주장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을 구경하면서 어느 한 쪽을 편들거나 응원하면 충분한가? 예를 들어서 도덕법칙을 앞세우는 칸트를 따르면서 선의 세계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도덕이 약한 자들의 원한 감정에 바탕을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니체를 따라서 ‘도덕 너머’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 두 철학자들의 논의에서 그들의 차이에 주목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고 그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틀을 찾고 싶다. 더 이상 니체파, 칸트파로 나뉘어서 그들의 대리전에 희생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사고를 우리의 문제 상황에 관련지어서 새로운 사고를 짜는 안내자로 삼고자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근대철학의 흐름을 종합하는 칸트는 비판적 이성으로 독단적 진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진리와 도덕의 척도를 세우고자 한다. 그의 비판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보편타당하게 알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환상을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지, 의지를 선하게 이끌 실천이성으로 어떻게 도덕법칙을 제시할 수 있는지 밝힌다. 그는 이런 이성적인 진리와 도덕을 지닌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자 한다.
그런데 니체는 보편적 진리와 도덕이 삶을 병들게 한다고 지적한다.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은 개별적 현상들에 따른 혼란과 생성의 광기를 다스리기 위해서 보편적 본질과 존재의 질서를 찾는다. 만약 그런 본질이 무의미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허구이거나, 역설적으로 현존하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이 허무의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진리와 도덕의 돛단배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모든 것에 스며든 허무 앞에서 삶을 긍정할 길을 찾는다. 그는 바닥없는 세계에서 긍정적으로 살기 위하여, 도덕과 진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선-악 너머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 힘-의지와 영구 회귀로 허무에 맞설 수 있는지를 묻는다.
칸트인가, 니체인가? 아니면 칸트+니체인가? 아니면 칸트적인 니체, 또는 니체적인 칸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문학과철학학교 2015년 봄학기 강의는 3, 4월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8강으로 열립니다. 강의 내용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와 칸트의 만남 : 진리와 도덕의 새로운 척도를 위하여>
제1강[3월12일]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서(칸트의 비판적 진리론)
: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칸트 : <순수이성비판> 1부]
제2강[3월19일] 칸트의 형이상학적 가상 비판
: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없는가? - 물 자체와 순수이성이 낳는 가상들
[칸트: <순수이성비판> 2부]
제3강[3월26일] 니체의 진리 비판, 진리 충동과 힘-의지
: 왜 인간은 진리를 만드는가? 왜 진리는 은유인가?
[니체 : <도덕의 틀 바깥에서 본 진리와 거짓>]
제4강[4월2일] 보편 도덕은 가능한가? 실천이성과 자율-자유의 원리
: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칸트 : <실천이성비판>, 칸트 : <도덕 형이상학의 정초>]
제5강[4월9일] 니체의 도덕 비판, 노예도덕과 주인도덕
: 선/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누구를 위한 누구의 도덕인가?
[니체 : <도덕의 계보> <선악의 저편>]
제6강[4월16일] 미학적 문제 설정 - 아름다움과 숭고에 관한 분석/철학적 지혜에 맞서는 비극적인 것
[칸트 : <판단력 비판> 1부, 니체: <비극의 탄생>]
제7강[4월23일]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인간학과 니체의 넘어서는 인간 Ubermensch
[칸트 :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8강[4월30일] 비판적 종교 철학과 기독교 너머 - 이성적 종교와 근본악의 문제, 그리스도 대 디오니소스
[칸트 : <이성의 한계 안에서 본 종교>, 니체 : <반-크리스트>]
[보충 논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비판적인 계몽과 아도르노, 푸코의 비판적 문제 제기(“계몽은 새로운 야만인가”, 비판적인 존재론)
*진리와 존재로 나타나는 것을 나타나도록 하는 비가시적인 것 : 앙리의 삶의 현상학으로 재조명하는 진리와 도덕
강의는 인문학습원 강북강의실(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아래 약도 참조)에서 열리며 참가비는 22만원입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문학과철학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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