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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단단한 기업, 꿈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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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단단한 기업, 꿈이 자란다"

[현장] 사회적기업 육성하는 '서초창의허브'

우리에겐 사고지만, 다른 어떤 이들에겐 일상이다. 예컨대 정전이 그렇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에는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나라가 많다. 아예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지역도 있다. 이런 곳에선 밤에 촛불을 켜고 책을 읽는 게 일상이다. 촛불 한 개만으론 충분한 밝기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여러 개를 켜야 한다. 자칫하면 화재가 날 수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최첨단 스마트폰이 아니다. 고학력 엘리트가 연구하는 첨단 기술도 아니다. 배터리가 없어도, 전력이 공급되지 않아도, 책을 읽기에 충분한 빛을 낼 수 있는, 소박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게 이른바 '적정기술'이다. 총명한 인재들이 대학과 기업에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다. 이들이 개발한 첨단 기술은, 컴퓨터의 효율을 높이고, 난치병 환자의 생명을 연장한다. 모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절박한 문제가 많다. 스마트폰은커녕 전등조차 사치인 이들이 있다. 박사들이나 이해하는 첨단 기술은 이들에게 쓸모가 없다. 가난한 조건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적정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서초창의허브

"촛불 하나로 방 안을 환하게"

박제환 루미르 대표가 이런 생각을 했다. 박 대표는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대기업 취업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창업을 꿈꿨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창업은 아니다. 자신이 공부한 기술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업이 목표였다.

루미르는 빛을 의미하는 루미와 세상을 의미하는 미르의 합성어다. 빛이 없어서 밤에 책을 읽을 수 없는 지역에 빛을 공급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아이템이 LED램프다. 이 장치를 촛불 위에 씌우면 빛이 증폭된다. 촛불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밝기를 낼 수 있다. 촛불의 열에너지를 빛에너지로 전환하는 장치다. 따라서 배터리도, 외부의 전력 공급도 필요 없다.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고, 양초 소비도 줄일 수 있다. 이 제품을 기획하기 전에, 박 대표는 실제로 아시아의 빈곤 지역을 여행했다. 예컨대 리튬이온 전지를 쓰지 않기로 한 건, 빈곤 현장 체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리튬이온 전지를 구할 수 없는 나라가 많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박 대표는 사업가다. 그저 좋은 일만 하는 게 목표는 아니다. 적정한 수익을 내야 좋은 일도 지속가능하다는 걸 잘 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해서 수익을 내고, 그걸로 다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 한다. 실제로 루미르의 제품은 해외 시장에서 반응이 좋다. 국내 전문가들 역시 기술력과 사업성을 인정했다. KDB나눔재단이 주최한 KDB 스타트업 프로그램 최우수상 등 다양한 수상 경력이 입증한다.

ⓒ서초창의허브

기업과 지자체의 협력 모델

박 대표가 꿈을 키운 터전을 찾았다. 서울지하철 4호선 동작역에서 나와 반포천 옆 제방도로를 걷다 보면,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념하는 심산기념문화센터가 나온다. 이 건물 일부 공간에 '서초창의허브'가 있다. 박 대표와 같은 사회적기업가들을 길러내는 곳이다.

현대자동차그룹과 서초구청,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등이 지원하며 사단법인 '씨즈(seeds)'가 운영하는 '서초창의허브'는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서 성과를 내는 좋은 모델이다. 현대자동차는 재정 지원과 함께 시장 개발과 멘토링을 담당한다. 대기업이 보유한 경영 노하우는 갓 창업한 사회적 기업가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서초구청은 공간을 지원한다. '씨즈'는 '한국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적기업'의 정착을 목표로 활동하는 비영리사단법인이다.

ⓒ서초창의허브

"장애인에게 일자리보다 중요한 것, 친구와 공간"

지난 18일, 기자가 찾아간 '서초창의허브'는 복작대는 활기가 넘쳐났다. 이날 만난 노순호 동구밭 대표 역시 대학생이다. 동구밭은 홍익대 사회적기업 창업 동아리 '인액터스' 회원들이 세운 사회적기업이다. 발달장애인과 대학생이 함께 텃밭을 가꾸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서울 강동구, 마포구 등의 텃밭에서 농사를 짓는 경험은 발달장애인과 대학생 모두에게 큰 배움의 기회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통해 대인관계의 기술을 얻는다. 또 흙을 만지고 농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건 인지능력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 장애인들과 일대일 관계를 맺는 대학생들 역시 취업 경쟁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경험을 한다. 노 대표는 "발달장애인을 처음 만났다는 대학생들도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변화를 겪는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돕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오히려 배운 게 더 많다. 또 즐겁다'라고 말하는 대학생들이 많다. 이런 기분을 더 많은 사람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다."

정부 정책은 발달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발달장애인들이 정말 원하는 건 따로 있다는 게 노 대표의 설명이다. 함께 대화를 나눌 공간과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 고등학생 시기까지는 그나마 낫다. 집에서 나와서 갈 곳이 있다. 학교가 있고, 학생 신분으로 복지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학교를 떠나는 순간, 갈 곳이 없어진다. 노 대표가 주목한 게 이 대목이다. 고등학교를 마쳤거나, 졸업을 앞둔 발달장애인들과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기로 한 건 그래서다.

ⓒ서초창의허브

"선정성 없이도 팔리는 콘텐츠 만들겠다"

김기범 케이앤아츠 대표는 앞서 소개한 이들과 달리, 직장 경험이 풍부한 40대 초반이다. 대형 음반 기획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일을 하면서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많았다. 어린 가수들의 신체 노출을 부추기는 풍토, 지나친 선정성 경쟁 등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그래서 회사를 나와 드라마 OST 업체, 국악 콘텐츠 업체 등을 거쳤다. 정도는 덜하지만, 문제는 비슷했다. "귀에 꽂히는" 음악을 만들어야 했고, 선정성 압력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창업을 택했다. 신체 노출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선정성 경쟁을 하지 않고서도, 경쟁력 있는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훈민정음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공연을 기획하고,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을 한다. 실제로 시장 반응도 좋다. 김 대표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편견을 부담스러워 했다. 사회적 기업은 '착한 일'을 하지만, 제품 경쟁력은 약하다는 편견이다. 김 대표는 "(다른 기업과의) 이미지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착해도 경쟁력이 있다, 혹은 착하니까 더 경쟁력이 있다'라는 인식이 확대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서초창의허브

"개인주의 해치지 않는 공동주거 환경 만들자"

김하나 서울소셜스탠다드 대표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상황에 걸맞은 주거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창업했다. 자취를 해본 사람은 안다. 개인주의를 해치지 않는 공동주거 환경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서울소셜스탠다드는 1인 가구를 위한 공동주거상품을 개발한다. 아울러 공동주거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연구도 진행한다. 이를테면, 1인 가구가 모인 공동주거 환경에서 화장실은 어떻게 설계돼야 할까. 이 문제만 잘 풀어도 개인이 느끼는 만족감은 확 달라질 수 있다. 혼자 사는 이들이라면, 서울소셜스탠다드의 성과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게다.

"기술보다 중요한 건 관계"

서초창의허브에는 작은 작업장이 있다. 그곳에서 수제레몬차를 만든다. 학교 밖 청소년, 소년원 퇴소 청소년 등과 함께하는 사회적기업 나눌레몬의 작업장이다. 장수경 나눌레몬 대표의 문제의식도 노순호 동구밭 대표와 통하는 면이 있다. 장 대표의 이야기다.

"흔히 위기 청소년의 자립을 위해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직업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게다. 그런데 실제로 청소년들을 만나 보면, 그들의 자립을 위해서는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기술보다는 관계다. 좋은 관계를 통해 사회성을 기르고, 심리적인 지지대를 형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

좋은 먹을거리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몸을 움직이며 일하는 과정 역시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화학첨가제를 넣지 않은 차를 만드는 나눌레몬은 이익 가운데 일부를 위기청소년들과 나눈다. 소비가 곧 기부로 이어지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민관 거버넌스'의 모범 사례

서초창의허브에서 꿈을 키우는 사회적기업은 이밖에도 많다. 이곳을 운영하는 씨즈가 2011년부터 올해까지 육성한 창업 팀은 총 115개다. 올해는 25개 팀이 육성됐다. 김영석 씨즈 사무국장은 사회적기업 육성을 위한 '민관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앙정부가 할 수 없는 역할을 하는 지방자치단체의 몫이 있다고도 했다. 현대자동차와 서초구청이 지원하는 서초창의허브가 지속가능한 사회적기업 육성센터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서초창의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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