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들과 송년회를 겸한 저녁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 모두 오랫동안 북한을 들여다보고 있는 전문가들이었다. 식사 도중 내년에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런 저런 전제 조건 없이 내년 12월 31일까지 북한이 핵실험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O, X만 묻는 단답형 질문이었다.
필자를 포함 다섯 명의 참석자 중에서 한 사람만 핵실험을 할 것으로 답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김정은 정권이 크고 작은 핵위협은 하겠지만 실제 핵실험이라는 카드를 사용하기에는 정치·경제·외교적 부담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했다. 유일하게 핵실험을 할 것으로 전망한 전문가는 북한이 2015년을 통일대전 완성의 해로 언급한 것에 주목했다.
사실 김정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18일 갑자기 사망한 후 이틀 만에 최고사령관에 추대됐다. 이후 2012년에 들어 제1비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취임했다. 문자 그대로 'LTE'급 속도로 당·정·군의 최고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일까. 북한은 최근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의 '선군 태양의 불멸의 업적을 민족 만대의 재보로 새긴 3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작년 12월 당의 유일적 영도를 거세하려 들던 현대판 종파들이 단호히 적발·분쇄되어 당과 혁명대오의 통일단결이 더욱 순결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노동신문>은 사설에서 "앞으로 우리의 앞길에는 오늘보다 더한 시련이 닥쳐올 수도 있다"며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수령을 배반한 혁명의 배신자들은 무자비하게 짓뭉개 버려야 한다는 멸적의 의지를 새겨야 한다"고 했다. 장성택 처형을 김정은 시대 하나의 성과로 꼽기도 했다. 김정은이 어려서 당내 권력기반이 취약할 것이라는 분석은 결과적으로 틀린 셈이 됐다.
그렇다면 이렇듯 자신감을 얻은 김정은이 내년에 어떤 대외노선을 취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국책연구기관을 비롯해서 북한 관련 연구소들이 내놓은 2015년 북한 정세 평가 보고서들이 그렇다. 통일·외교·안보 관련 공무원들과 기자들의 평가 역시 여러 갈래로 갈렸다. 그럼에도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남북관계 전망이 매우 비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유엔안보리에서 북한인권 상황을 의제로 공식 채택할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향후 김정은 정권은 이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내년 상반기 남북관계는 군사적으로 아슬아슬한 국면이 자주 연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리 의제가 된다는 것은 최소 3년동안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안보리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김정은 암살 영화를 제작한 '소니 픽처스' 해킹의 배후가 북한이라는 결론을 내린 오바마 행정부가 보복 조치로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하는 것과 신규 제재 등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보도됐다. 이럴 경우 북한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북·미 관계 역시 해빙(解氷)될 조짐은 이미 사라진 셈이다. 이는 미국이 53년 만에 쿠바와 역사적인 외교관계 정상화를 선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 저기 지뢰가 많이 생기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남북관계만큼은 더는 젖은 재(灰)처럼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중국, 러시아와도 수교를 맺은 지 오래되고, 하물며 40년 가까이 식민통치했던 일본과도 이미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70년 가까이 이런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대통령이 언급한 '비정상의 정상화'가 남북관계에도 적용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들이 앉기 위해 날아가듯 박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동시에 대통령의 외교·안보 참모들은 미국-소련, 미국-중국, 미국-베트남, 미국-미얀마, 미국-쿠바의 역사적인 관계개선 사례들을 깊이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용병 지식인'들이 내놓는 '찌라시'같은 보고서가 아닌 현란하게 변하고 있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통찰력 있게 간파하고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가야할 지에 대한 긴 호흡과 혼이 담긴 국가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지뢰들을 안전하게 제거하거나 아니면 피해서 가야하는 그야말로 내공이 만만치 않은 전략가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결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2015년은 어쩌면 박근혜 정부가 이른바 '미니 데땅트'(Mini Detente)로도 불릴 수 있는 남북관계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해가 될 것이다. 심상치 않은 주변 여건에 2016년이 20대 국회의원 선거 등으로 남북관계에 발전적 동력을 확보하기가 정치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년에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 위에서 남과 북이 다시 만나야 한다. 주변국 정상들도 과감히 초청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가 화해와 협력의 큰 터가 되도록 해야 한다. 다양하게 펼쳐질 행사들 역시 정권의 시각이 아닌 역사의 시각에서 냉전의 시각을 깨는 쇄빙선 역할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과감하고 대담한 발상이 필요하다. 비무장지대에서 유엔과 남북한이 함께 평화의 축제를 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느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집권 3년차에 접어드는 박근혜 정부는 레토릭이 아닌 밀도 높은 남북관계 개선전략을 갖고 "광복 70주년, 바야흐로 통일이 시작됐다"고 말해야 한다. 환희의 광복이 곧바로 비극적 분단으로 이어져 온 지금, 이제는 통일이 '완전한 광복'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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