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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020년까지 세계 일류대학 따라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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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020년까지 세계 일류대학 따라잡기?

[차이나 프리즘] 중국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과 변화

오늘날 대학은 학문의 독립과 자주성을 주장하는 지식인의 전당이라든지 사회적 변화의 선도자로서의 지식인 양성을 하는 곳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대학은 높은 취업률로 평가 서열이 매겨지고 대학을 구성하는 전공학과도 이에 따라 암묵적 서열이 매겨지다 보니 대학의 기능적 역할이 점점 더 중시되는 실정이다.

대학의 생존과도 연결되는 이러한 대학평가는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1990년대 신자유화 정책의 세계화에 따른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정보화 사회를 넘어 지식기반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식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활성화됐고, 이에 각 국가는 의도적으로 지식생산구조와 체계를 적극적으로 재조정·재구성하게 되었는데 대학의 변화는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과거 중세시대 종교와 국가로부터 거리를 둔 자유로운 학문의 추구를 배경으로 탄생한 대학이 21세기의 급속한 시대변화에서 위와 같은 변화가 요구된 것은 근대화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중국 최초의 대학이자 가장 유명한 대학은 베이징(北京)대학이다. 현재도 중국 최고 엘리트를 배출하는 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1898년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 그 전신이다. 내외적 근대화 요구의 압박을 받던 청(淸)정부는 틀에 박힌 시험문제로 무능한 관료를 뽑는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교육내용과 체제로 국가의 부강을 다시 도모해야 했고 그것이 변법자강운동 당시 캉유웨이(康有爲)가 설립한 경사대학당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당시 대학의 설립은 국가의 인재양성 계획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고, 밀려오는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부강한 국가에 대한 꿈을 태생부터 꾸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와 권력으로부터 학문자유를 추구하던 서구의 초기 대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초기 베이징 대학생들이 '승관발재'(升官發財), 즉 관료가 되고 부유해지는 통로로서 대학을 간주하였는데 당시 대학생들에게 전통서원이나 국자감과 대학의 차이는 교육의 내용 정도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차이위안페이 (蔡元培)가 베이징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통해 선출된 관료였는데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의 기능과 역할을 재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15년 차이위안페이는 대학은 관리가 되고 부유해지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자유로운 학문연구가 추구되어야 하는 곳이라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어떠한 사상이나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학자라면 교수로 충원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고전과 전통학문에 능통한 장빙린(章炳麟, 1869~1936)과 그의 제자들을 비롯해 신문화운동을 이끌던 천듀수(陳獨秀, 1879~1942), 맑스주의를 처음 중국에 소개한 리다자오(李大钊, 1888~1927),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스(胡適, 1891~1961), <아큐정전>을 쓴 루신(魯迅, 1881~1936) 등이 베이징 대학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 대표적인 학자들만 보더라도 당시 베이징 대학에서 다양한 사상과 유파의 학자들이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연구 풍토는 이후 근현대 역사에서 베이징 대학생들이 중요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을 다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베이징대학이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대학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그들의 사회적 책임과 자부심의 전통을 이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대학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피폐함을 떨쳐버리고 다시 세계 일류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대대적 지원과 대학 자체의 자립과 발전 모색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1994년 세계를 주도하는 100개의 중점학문분야를 만들겠다는 '211프로젝트'가 수립돼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1998년 장쩌민(江澤民) 총리가 베이징 대학의 연설에서 세계 일류 대학의 건설을 주장한 '985프로젝트'가 막대한 예산투입으로 진행 중이다.

중국은 자체적으로 2020년까지는 중국의 일류 대학들이 세계 일류 대학을 따라잡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짧은 기간 안에 정부의 주도로 대학의 양적·질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대학들은 중점대학, 비중점대학으로 나뉘어져 중점대학에만 연구자원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면서 일류대학과 비일류대학, 도시의 대학과 지방의 대학 간의 격차가 나날이 커져갔다.

한편 대학의 외형이 성장하는 것과 함께 나타난 지식생산의 구조변화가 대학에 영향을 끼쳤다. 중국은 1990년대의 교육목표를 '과교흥국'(科敎興國) 으로 하였는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지식과 과학엘리트가 국가의 부강을 이끄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인문계 중심이던 대학이 이공계 학생이 중심이 되었고, 이러한 이공계 전문지식인들의 지식이 더 실용적이고 전문적 지식으로 가치 있는 지식으로 여겨지게 된다. 학생 수도 이공계 학생이 인문계보다 5배가 넘었고 1980년대 계몽의 시대를 이끌던 인문지식의 가치와 영향력 및 이를 확산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축소되고 주변화됐다.

또한 과학의 강조는 사회과학분야의 분과학문 정립으로도 나타나서 시장경제의 확산에 필요한 행정학, 사회학, 법학, 경제학 등 사회주의 시기 학과의 체계에서 명확하지 않았던 학문이 출현하고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이래 나타난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1980년대 부상했던 대학의 지식인들이 행사했던 인문학적 가치와 지식인들의 영향력 약화였다.

여기에 기존에 미약했던 매스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매체지식인'이 등장했는데, 이 역시 지식생산구조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각종 미디어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전문편집인, 직업평론가, 기자, 자유기고가의 활동공간이 대학 지식인의 활동공간보다 확장되었고 인터넷이라는 신매체가 가세하면서 대학에서 생산하는 전문지식과는 다른 종류의 즉각적이고 시류적이며 유동적인 '상식'적 지식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국 대학의 학과 분화나 인문지식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된 현상은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학의 변화를 주도한 정부의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결정적 작용을 했는지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대학의 학문생산시스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와 달리 1990년대 대학은 연구비 배분 시스템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중국교육부는 1995년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평가하기 위한 양적 지표를 형식화하고 핵심간행물제도를 제정하였는데 이것을 소위 '학술규범화'라고 한다. 이공계통의 평가방식을 학문 전체분야에 적용시켜 연구를 더욱 세분화하고 전문화하도록 이끌고 이러한 기준에 따라 연구비의 지원과 프로젝트의 수주가 결정되도록 한 성격이 짙다. 당연히 상당한 연구가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연구환경도 이에 맞추어 형성되었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중국의 지식인들이 1980년대 부족했던 전문적 학문연구를 위해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표방하였는데 묘하게도 이러한 학술규범화가 구축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이후 대학은 전문적 연구로 세밀하게 분화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이러한 분할과 단절은 1980년대 잠깐 실현되었던 지식인들과 사회의 직접적 소통방식이 이제는 국가의 지식생산시스템을 거쳐서만 사회와 소통이 가능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상 중국 대학의 성립에서 현재까지의 흐름을 바라봤을 때 대학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회의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시기, 사회주의 시기와 또 다른 지점에서 오늘날 국가권력과 자본의 무한한 영향력 속에서 과연 대학이 어떠한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고 확산할 것인가, 어떻게 개입하고 작용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중국 지식인에게 살아있는 고민이다.

2004년 중국에서 회자된 공공지식인은 매체를 통해 자신의 공적 역할을 하려는 지식인으로 이들은 대학에서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대학 지식인들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인식과 웨이보나 블로그가 중국 사회 내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만들어진 학문적인 성과들을 학술규범화의 틀 내에 두지 않으려는 중국 지식인들의 노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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