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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 차장'과 동남아 '장그래'는 행복하게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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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 차장'과 동남아 '장그래'는 행복하게 만났을까

[프레시안 books] 오명석·전제성·강윤희·엄은희·최서연 <말레이 세계로 간 한국 기업들>

최근 한 케이블 방송의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현실과 완벽하게 조응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위적인 우연의 일치로 점철된 사랑 이야기로 빠지지도 않고, 현실감 없는 재벌 집안의 모습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사를 배경으로 한 기존의 수많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이 드라마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오로지 종합상사의 직원들이 실제로 겪을 법한 에피소드들을 극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기업 활동을 자본과 노동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 기업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자신과 연결된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기업의 활동이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 맺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기업 활동에 대한 질문은 그것이 위치한 사회에서 맺는 관계의 성격이 어떤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그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동남아 지역 전문가들이 모여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그곳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현장 연구라는 경험적 방법을 통해 파악한 결과를 써내려간 <말레이 세계로 간 한국 기업들>(눌민, 2014년 11월 펴냄)이 바로 그 책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지역을 여러 차례 오가며 그곳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그 결과를 한국의 독자들과 소통하던 인류학, 정치학, 지리학 기반의 지역 전문가들이 이번에는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 활동을 연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삼성전자, 미원, 삼익, 코린도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업 활동을 하는지 보여주고, 한국인과 현지인들 사이의 언어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은 어떤 형태인지, 주재원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하여 어떤 선택을 하는지 등을 구체적인 경험적 자료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추구하는 바는 구체적인 사례들에 입각해 "문화에 민감한 경영 전략"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실 문화와 경영, 문화와 기업 활동의 관계를 다룬 책이 그동안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문화를 알면 경영 전략이 선다>라든가, 이 분야에서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호프스테드(Hofstede)의 <세계의 문화와 조직>, 혹은 (과대평가된 점이 없지는 않은) <컬처 코드> 등의 책이 있다. 또한 인류학적 현장 연구를 통해 기업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려 했던 <공동체로서의 회사>, <Ethnography and the Corporate Encounter>와 같은 책들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책들은 개괄적이거나 일반적인 설명에 치중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특정 기업 내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는 책들인 데 반해 <말레이 세계로 간 한국 기업들>은 한국과 말레이 세계라는 두 문화의 조우, 그리고 관리자급 한국 직원과 현지인 노동자의 조우, 외국이라는 타자화된 환경에 어떤 방식으로든 적응하거나 최소한 익숙해져야 하는 또 다른 타자의 조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지구적 표준(global standard)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어디서나 유사한 방식의 정책과 업무 처리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기업 활동의 일관성을 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차원의 맥락과 특성에 맞도록 기업 활동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며 지역사회에 대한 적응을 우선하는 경우도 많다. 후자는 우리에게 '현지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례들을 통해 기업 현지화의 방향과 내용이 어떤지, 무엇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의 삼성전자 사례처럼 다양한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이 공존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함께 모여 일하는 회사에서 기도 시간을 보장해줌으로써 종교 활동과 기업 활동을 절충하려는 것, 구내식당은 이슬람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킨 할랄(halal) 음식만 제공하지만 말레이 음식뿐 아니라 중국 음식과 인도 음식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등은 아주 세세한 현지화의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미원 인도네시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현지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인근 마을 주민들을 아웃소싱 인력으로 활용하는 것 역시 공존을 지향하는 현지화의 방식일 것이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일반적으로 현지화란 주로 마케팅 분야를 중심으로 현지 시장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마케팅 이전의 생산의 과정에서 "조업이 이루어지는 사업장과 지역사회와의 관계에서 가능한 한 갈등의 가능성을 낮추는 것"까지 포함한다. 여기에는 "조업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 현지 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재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노력, 사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적 비용을 줄이고 인근 지역사회와 공존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현지화의 목표는, 그곳 사람들을 대체 가능한 노동자로 만들고 소위 경영 합리화라는 이름을 통해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기업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장기적 전망 속에서 기업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다(196∼197쪽).


문화적 이해에 기초한 관계 맺기

ⓒ눌민
사실 이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의지가 있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지의 여건과 한국의 사회적 특성에 의해 현지화를 위한 시도가 굴절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이 주재원 자녀의 교육 문제는 주재원들이 현지인들과 섞여 살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의 입시 제도가 주재원이 가족과 동반할 것이냐 말 것이냐, 동반해서 간다면 어디에 거주하면서 자녀를 어떤 학교에 보낼 것인가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국 사회의 입시 제도가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잃게 하는 것은 아닐까?)

현지화는 매우 다층적인 문제이다. 이에 관여된 주체들이 다양하고 그들이 서로 만나는 상황과 맥락이 다양하며 거기에 비용과 시간과 이익이라는 경제적 측면들도 개입하기 때문이다. 특히 동남아의 경우 다양한 종교와 에스닉(ethnic) 집단이 존재하는데 이렇게 상이한 성격을 가진 집단들이 공존하는 것은 '단일민족이라는 상상' 속에 살아온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특성이다. 이런 특성들이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텐데 현지화의 과정에서 문화적 차이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되어야 하는 전제라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접근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관련된 주체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이 다양성의 내용에 대한 상호 이해야말로 관계 설정을 위한 편견 없는 출발점일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사례들이 모두 성공적인 정착의 결과도 아니고, 한국 기업이 동남아시아에 정착하는 과정이 모두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례들과 비슷한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책에서 소개한 사례들 역시 성공적인 정착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과제들과 대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린도 파푸아 사업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역사회의 역동적인 변화로 인한 차이와 잠재적 갈등에 대처하기 위해, 회사 안에서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구성원들과 훨씬 복잡한 상호작용을 해야만 할 필요"(205∼206쪽)도 남아 있다. 또한 주재원들의 언어 사용이나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입장과 층위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다양성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다양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사례들은 성공 사례들이 아니라 타 지역에서 기업 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참고가 될 수 있는 사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남아 진출 초창기에는 한국 기업들이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던 것도 아니고,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문화에 민감한' 경영 활동을 시도했던 것도 아니다. 진출 초기 동남아에서 불신의 대상이자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기업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간혹 그런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각자의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사람들이 만나 한순간에 손을 맞잡고 상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프로젝트일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자신에게 작동하는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의 상상보다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려는 시도, 자신의 문화만을 고집하고 상대의 문화는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가 모든 것을 그르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호 이해에 기반을 둔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처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우리의 삶에서도, 다른 사회에 진출한 기업의 경영 활동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은 이해에 바탕을 둔 신뢰와 공존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같이, 계속" 일하는 것을 바라는 <미생>의 장그래와, 그 마음을 읽어내는 오 차장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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