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콘서트
지난 해 여름에 한 인터넷 신문에서 <자본론> 관련 논쟁이 있었다. 서로가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라고 극심히 대립하였다. 이런 논쟁을 보면서 필자는 마치 성경(Bible)을 두고 입씨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본론>을 성경을 다루듯 하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고전 경제학으로 철저히 미시경제학(Micro Economics)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류의 논쟁은 마치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ity)을 전제로 한 일반 균형(General Equilibrium)이나 오프곡선(Offer curve)을 두고 논쟁을 하는 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는 명백히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오늘의 관점에서 함부로 적용하면 안된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상품생산에 소요된 노동시간의 합산에 의한 재산 총가치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점, 노동의 질에 대한 평가의 문제, 다원화된 디지털 사회에서 가격을 형성하는 사회적 필수 노동시간의 측정의 불가능성, 과거 노동시간의 축적분인 자본재가치의 전환율 측정의 불가능성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만약에 어떤 얼간이가 있어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그는 경제학보다는 철학쪽으로 전공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에 있어서 그 질과 양을 근원적으로 동질(Homogeneous)로 평가한다는 것은 캐캐묵은 로크식의 환상(Lockean Fantasy)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의 숙련 노동자나 공학도, 고급경영자를 키운다는 것은 어느 한 시대의 혁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 이상의 기초과학의 발전과 풍부한 교육투자 및 사회간접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 사회의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사회적 무차별곡선(Social Indifference Curve)을 배제하고 단순히 기술의 격차를 무역구성의 원리로 보던 리카도류의 비전(Ricardians Vision)도 빛바랜 환상이다.
마르크스의 개념은 제국주의론(Imperialism)은 물론이고 국제무역론으로 확장이 되면 안데르센 동화책이 되고 만다. 이른바 ‘부등가 교환이론’을 제대로 살펴보자.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자처하는 ‘직접적용설’에 따르면, “가치법칙의 적용범위가 확대됨에 따라서 가치 규정적 노동이 국민적 평균노동에서 세계적 평균노동으로 이행하게 되며, 세계시장에서 한 상품의 가치는 세계적 혹은 국제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디지털화(Digitalization)가 극심히 진행되고 있고, 기술격차가 단층적(斷層的)으로 존재하며,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의 이동도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특히 노동의 경우), 세계에는 수 많은 ‘바나나 공화국’이나 북한과 같은 폐쇄적 봉건경제도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 평균 노동의 존재를 상정하는 그 자체가 현대의 국제경제에 대한 무지를 표명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간접적용설’은 리카도( Ricardo)나 헥셔-오린(Heckscher-Ohlin)을 비롯한 근대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의 견해와 대동소이하다. 이에 대해 직접적용설 논자들은 간접적용설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개념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비난한다. 애초부터 이 논쟁을 왜 했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는가?
지금도 이른바 좌파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데, 경제학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혁명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현대의 국제시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주의가 성립하려고 하면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주의 경제는 경제적 잉여(economic surplus)에 의한 구상무역제(求償貿易制)를 바탕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주변 사회주의 국가의 상부상조가 없으면 경제체제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북한이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 이내 ‘고난의 행군’의 늪에 빠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설령 한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경제는 얼마 가지 않아서 ‘바나나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성립하려면 노동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다르다. 세계 노동시장에서 노동의 대립은 자본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측면이 있다.
즉 세계 환율 전쟁에서 보듯이 세계의 자본간에도 극심한 대립이 있지만, 세계의 노동(Labor) 간에도 극심한 대립이 있다. 헥셔오린(Heckscher-Ohlin)의 이론을 역으로 분석한 스톨퍼 사무엘슨 정리(Stolper Samuelson theorem)는 왜 각국의 노동자들이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자동차 산업과 깊이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환율전쟁도 세계 노동자들 간의 극심한 대립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노동은 외국 자본(Foreign Capital)에 대한 적대감은 오히려 없는 반면, 외국 노동(Foreign Labor)에 대해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각국의 노동은 오히려 해외직접투자(FDI)라는 미명으로 외국의 자본에게 온몸으로 추파를 던지는 것이 현실이다.
커피로 휘발유를 대신할 수도 없고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체제에는 중심부 자본에 봉사하는 주변부 자본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G2, G4에 둘러싸인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류의 고민은 사치스러운 것이다. 한국경제를 온전히 이끌어 간다는 것은 마치 이발사가 쉐이빙크림(shaving,cream)을 바른 풍선을 면도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한국에 사는 지식인으로 세계를 고민하고 행동할 것인지 한국을 고민하고 행동할 것인지 하는 점이다. 필자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우리가 세계인의 입장에 설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고민을 한국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남부 및 동남아시아 등이 중심부 자본에 그저 들러리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 이전에 마땅한 대안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들 국가들은 상당수가 ‘바나나 국가’들이기 때문에 설령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을 한다한들 그들의 경제가 나아질 리가 없다. 그들 국가들이 국제 시장으로부터의 단절이 된다해도 커피로 밥해 먹고 자동차 기름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도 유치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동안 주변부 자본주의를 탈피한 가장 전형적인 모델로 한국경제를 여러 차례 거론한 바 있다. 종속이론을 따르기 보다는 한국의 경제 발전 모델을 신봉한 등소평(鄧少平)이 얼마나 지혜로운 지는 G2로 부상한 현대의 중국 경제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주변부 경제를 탈피하는 것은 난제(難題) 중의 난제이다. 여기에는 자본의 축적, 산업기술의 발전, 디지털 기술의 발전, 사회적 인프라(Social Infrastructure), 디지털 인프라(Digital Infrastructure), 생산요소 부존도 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면밀히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현대의 경제는 이자율, 세율, 환율, 자본수지, 경상수지, 화폐의 수요와 공급 등이 매우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자본은 일정한 국체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미 조세 피난처 보도를 통해서 많이 알려졌지만, 마이크로소프트(MS)나 구글(Google) 등을 포함한 미국의 대부분의 공룡기업들은 미국에 법인세를 1% 미만으로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을 단순히 미국 자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2014년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빚보다 자산이 많은 순대외자산국(대외자산>대외부채)이 됐다. 들어오는 외국 자본보다 밖으로 나간 국내 자본이 많다는 것이다. 설령 주사파(주체사상파)가 염원하는 대로 한국을 적화(赤化)한다하더라도 꿈에도 달성하려고 했던 대기업 자산을 접수하기는 어렵다. 단지 일부 국내 자산만 접수하게 될 뿐일 것이다.
필자는 정치는 혁명이 있다고 해도 경제는 혁명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나아가 설령 정치 혁명이 성공한다해도 경제적 토대가 없다면 그것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원래 <자본론>도 이 같은 관점에서 저술된 것이기도 하다.
한때 경제의 문외한들이 이른바 ‘사회구성체’이론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개방경제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른바 주사파 이론으로 무장하고 한국 지식인 사회를 크게 오염시켰다. 그 후유증은 상당히 심각해서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의 트라우마(trauma)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진당의 해산은 새로운 진보의 출발
그람시는 철저히 대중의 동의에 의한 계급적 지배를 강조했다. 북한의 지배체제를 대중에 의한 동의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성(理性)을 가져라. 아니면 목 조를 끈을 가져라”는 디오게네스(Diogenēs)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 북한은 성경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처형을 당하기도 한다. 연좌제(緣坐制)가 살아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지적했듯이, 북한의 정치체제는 강한 봉건적 요소와 극심한 관료주의로 인하여 마르크스가 말하는 생산력의 해방과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북한 경제는 오히려 심화된 저개발 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종속이론에서 말하는 ‘저개발의 개발(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이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경제구조가 북한의 경제다. 상부구조가 하부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발전을 철저히 왜곡시켰기 때문에 역사의 추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 바 한국의 좌파가 진정으로 진보의 길로 나아가려한다면, 북한과 같은 반휴머니즘적(anti-Humanistic)이고 반사회주의적(anti-Socialistic)인 정체(political entity)와는 분명히 단절해야하고 이번 통진당 사태를 그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진보의 개념도 마르크스 레닌주의(변증법적 유물론) 일변도가 아니라 뮈르달(Myrdal), 마이클 포터의 SPI(Social Progress Imperative) 개념 등도 같이 고려할 수 있는 지적 지평을 확대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 만연한 진보라는 말 자체는 이미 대중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지 오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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