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교수들>(일월서각, 2014년 10월 펴냄)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기업형 대학과 인문학의 운명'이다. 저자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영문학 종신교수인 프랭크 도너휴로 그 자신이 속한 분야인 인문학의 임종 상황을 대학의 몰락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그는 '위기'라는 말을 쓰기를 거부한다. 위기란 말을 쓸 때, 그것은 어떤 '이상 상태'를 의미하고 '정상상태'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데, 오늘날 대학과 인문학의 상황은 사실상 구조적인 파국 상황이기 때문에 단순히 '위기'라고 말한다면, 상황을 과소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서평을 쓰는 것을 오랫동안 망설였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진단하고 있는 미국 대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인문학 전공 교수, 강사, 대학원생에 대한 분석은 한국에서도 이미 대부분 현실이 된 내용이기에 새로운 인식을 줄 수 없는 반면, 긍정적 전망이라고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암울함으로만 가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펼쳐진 '묵시록'을 계속 음미해 본다한들, 대저 희망이란 있겠는가 하는 비관적 심정이 마음속에서 계속 차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각 장별 제목만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제1장은 '셰익스피어와 호머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로 되어 있다. 기업(시장 권력)과 대학의 100년간의 적대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장인데, 위의 발언은 19세기말 철강왕 카네기가 한 말로 소개되고 있다. 경제적 '유용성' 앞에서 인문학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라는 기업가의 공격은 유구한 것이었는데, 한국에서도 유수의 사립대학을 인수한 한 재벌 그룹 회장이 예전에 했던 말을 연상시킨다. 화폐로 교환 가능한 희소성과 유용성의 요구 앞에서, 인문학의 비가시적 비전은 항상 모멸당하고 격하된다.
제2장은 '우수한 학생이 먼저 탈락한다'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여기에서는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처해 있는 곤경을 다루고 있다. 지난 50여 년간 미국현대어문협회를 포함한 각종 기관의 대학원생에 대한 통계조사를 검토해 보면, 인문학 박사과정 진학자의 50퍼센트가량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사과정에 진학한 학생들은 글쓰기, 문학, 토론 지도, 채점 등 다양한 연구조교 활동으로 학비를 얼마간 보충해 왔는데, 2004년도의 박사 학위 취득 현황 보고서를 보면, 933명만이 박사 학위를 받고 5500명은 입학 후 4년차까지 학위 취득을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사 실업자'도 문제지만 '비박 실업자'가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3장은 '떠오르는 비전임 강사 군단'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인문학뿐만 아니라 대학 전체에 정년 트랙 교수가 축소되고, 신규 인력은 대부분 비정년 트랙의 강사 제도를 활용하다 보니, "박사란 사실상 대학 교육과정의 쓰레기 부산물"로 전락했다는 과감한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한국의 비정규 교수들이 '보따리 장사'로 자조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미국의 강사들은 자신들을 '고속도로 인생'이란 자기모멸적 표현으로 규정하고 있다. 광활한 북미의 고속도로를 이동하며 여러 대학에 출강하는 강사들의 풍경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직조차 해고 통보를 받으면 많은 이들이 "울음을 터뜨린다"는 묘사에 이르러서는, 그 끔찍함에 치를 떨게 된다.
제4장에서는 정년 트랙 교수의 몰락과 기업대학의 출현을 다루고 있다. 앞에서도 기업가들의 인문학 교수들에 대한 적대감이 묘사되고 있지만, 이 장에서는 묘사되는 교수들은 하루살이 인생이다. '최후의 교수들'로 묘사되고 있는 정년 트랙 교수들은 오늘의 대학에서도 일종의 "토템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교수 토테미즘의 세계에 입사(入社)하려는 신진 교수들은 일종의 영업사원으로 이미 전락해 있다. 연구 업적을 과장하기 위한 논문 발표와 출판 경쟁에 강박적으로 몰입하고 있지만, 박사 인력의 구조적 공급과잉으로 인한 무한 경쟁은 피할 수 없어 끝없이 도태되고 소진된다. 대학은 어떻게 변했나. 기업형 대학인 피닉스 대학과 같이 대학의 모든 강좌가 시간제 강사로만 운영되는 교육 사업체로 변모되는 극단적 양상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제5장의 제목은 '브랜드 대학과 대량 공급 대학'이다. 이 장에서는 한국의 대학과 마찬가지인 대학 간 서열 경쟁이 주로 조명되고 있다. 1983년에 시작된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의 미국 대학 서열'에서 상위 랭킹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의 각 대학들은 명성을 계량화·상품화하는 경쟁에 뛰어든 지 오래되었다. 언론사에 의한 대학 평가가 한국 대학을 변형시킨 것의 원 모델은 미국이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유용성과 효율성을 계량화할 수 없는 인문학 전공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다.
첫째, "대학 교육을 실용적 직업훈련 위주로 운영하면 취업이 보장되고 학생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실용 교육'의 강화가 "정말로 학생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줘다 주었나"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면서, 기업식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인문학 교수가 미래의 대학에서 사라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의 '내용'뿐만 아니라 고등교육이 '작동하는 방식'까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 교수가 인정하기 꺼리는 "대학 노동의 실상"은 물론이거니와 대학 제도의 성립 과정 자체를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는데, 간략한 요약에서 알 수 있듯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현실이어서 '지적 자극'이기보다는 최후의 대학과 교수들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차원에서 상황을 복기하기에 좋은 책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독자들에게는 '비극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일독을 권유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대학이 구조변형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
그렇다면 나 자신이 생각하는 대학에 대한 관점은 어떠한가. 나는 인문학뿐만 아니라 대학 자체가 거대한 구조변형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원인 분석은 다르다. 오늘과 같은 형태로 대학이 대중화된 것은 큰 틀에서 보면, 1945년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자본주의의 호황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선구적으로 제시한 것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중간계급의 성장을 견인했고, 이 중간계급에 속하거나 엘리트로 편입되려는 계층 상승의 통로로 대중에게는 '고등교육'이 활용되었다. 기업 편에서 보면, 새로운 시장과 상품, 노동력의 창출을 위해서 대학 교육의 실용화와 전문 대학원 체제가 요구되었다. 대학이 양적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전통적인 인문학을 추월하면서 공학과 경영학, 전문 대학원 등이 비약적으로 폭발한 것은 이런 구조적 변화에 입각한 것이었다.
1945년 이후는 동시에 세계사적으로 '냉전'과 '내셔널리즘'이 경쟁적으로 고양되던 때였다. 한국의 국문학과 역사학이 그렇듯, 대학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이 냉전과 내셔널리즘의 고양 과정에서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이전에는 각광을 받지 못했던 문화인류학이랄지 심리학이랄지 하는 학문 분야를 포함하여 지역학 연구가 번성한 것 역시 이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동구 및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일원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자 '세계화' 담론은 국제적인 대학 간 경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구미의 대학들은 이렇게 붕괴된 구 소비에트 블록의 유학생들을, 마치 1945년 이후 식민지 체제에서 해방된 후진국 엘리트를 수용한 것의 재판인 듯 받아들여 상대적인 대학의 풍요를 유지해 나갔다. 고등교육이라는 표면적으로는 가치중립적인 제도를 통해, 구미적 가치 더 정확하게는 미국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확장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미국 대학의 성장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가 종결되어 세계 자본주의가 구조적 저성장 국면으로 이행하고, 미국 중심의 헤게모니 체제가 경향적으로 약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자, 세계 대학의 위상을 점하던 미국 대학의 위기 역시 점차 명백해졌다. 중간계층의 소비에 의해 작동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저성장이 구조화된 국면이라면, 고액의 대학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닌다 한들 '학위'가 보증하는 교환가치는 점차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경향적 침체 국면에서 대학은 이전의 기업형 대학이라는 극단적인 변형조차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으로 축소될 확률이 높다. '학위'를 '취업'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성립되어야만 대학이 그나마 지탱될 수 있는데, 현재는 그 희망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시점이기에 대중들의 '대학 거부' 또는 '회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전환기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대학의 경우 '인구 감소'가 중요한 대학 변형의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구 감소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저성장의 구조화 가능성 역시, 대학의 구조변형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이것은 나를 포함해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위기로 나타날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을 회피할 방법은 사실상 별로 없다고 판단된다. 이런 점에서는 프랭크 도너휴의 주장처럼 현재의 상황은 대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종언으로 가는 문턱이라고 보는 관점에 나는 동의한다.
대학의 위기와 지배 엘리트의 위기, 금이 가는 지배체제의 정당성
그러나 대학의 위기는 단지 대학 자체의 혹은 대학과 연관된 대중의 위기만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지배 엘리트'의 위기로 나타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지배적 체제에 대한 불신과 위기의 형태로도 나타날 것이다. 대학이라는 전통적 중간계층의 수혈 통로나 엘리트로 전환하는 통로가 불신이나 봉쇄를 당하게 된다는 것은, 이와 연동된 지배체제의 물질적·제도적 기반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신나서 기업과 국가가 대학을 부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그것의 지배체제를 지탱했던 암묵적 정당성도 균열된다는 아이러니를 망각하면 안 된다.
가령, 그런 현상을 우리보다 앞서 대학 구조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일본에서 나는 발견하곤 한다. 일본의 대학 역시 우리보다 앞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그러한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구조조정을 진행하다 보니,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은 다음과 같은 역설에 도달했다. 가령 일본의 명문대라 할 수 있는 도쿄대생들마저도 단지 '취업'에만 목매는 이상한 '바보들'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월간지인 <세계>나 <중앙공론> 등에는 매호마다 '대학의 위기'와 관련한 기고문들이 게재되고 있는데, 흥미로운 내용들을 종종 읽어볼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주장이 있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으로 침몰하기 전의 일본 학생들은 '유학'이라는 통로를 통해 세계를 폭넓게 사유하고 그 안에서 일본의 '좌표'를 찾고자 했다. 국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역시 "재팬 이즈 넘버원"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대학 전공을 단순한 '취업'의 수단으로만 인식했던 것이 아니라, 지배 엘리트로서 역할을 준비하는 역량을 키우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 엘리트가 된다는 것은 전공 분야의 기계적 합리성이나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중요한 것이기에 인문학적 토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의 일본 대학생들은 모두 '취업'에만 골몰하고 있다. 도쿄대도 교토대도, 게이오대도 와세다대도 모든 학생들이 취업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에, 도대체가 쓸 만한 인재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지배 엘리트들의 위기의식은 한국보다 오히려 더 급진화된 견해를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이들은 기존의 대학을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형하는 것의 실패를 일단 인정한 후, 다음과 같이 제로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충격적이게도 이들의 대안은 간명하다. 기존의 종합 명문대학 체제조차 이제는 비전이 없다, 그러니 새로운 엘리트 육성 전문 단과대학을 설립해 '일본'을 이끌어 갈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양성하자. 그러면서 내놓는 대안은 이런 것이다. 프랑스의 대학 체제를 모방해 관료가 될 학생들은 '국립 행정대학'으로, 교원이 될 학생은 '국립 고등사범대학'으로, 판검사가 될 학생은 '국립 법률대학' 식의 새로운 대학을 설립해 새 출발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국가에 의한 대학 구조조정의 실패를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위기의식 때문인지 신자유주의 대학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특이한 단과대학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가령 '국제교양대학'이 그런 경우다. 이 대학은 인문학이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기묘한 방식으로 결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대학에 입학한 모든 학생은 졸업 시까지 인류의 고전을 체계적으로 토론하고 학습하고 에세이를 써야 한다. 이 대학의 도서관은 24시간 개방된다. 학생들의 지적 탐구가 제약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대학의 모든 교수는 전원 2년제 계약제로 채용된다. 교수회의 신분권 요구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다. 이 대학의 모든 강의는 4년간 영어로 이루어진다. 이 대학의 모든 학생들은 1년간 해외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파견되어, 자신이 탐구한 주제에 지역에 연구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 대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국제 비즈니스와 지역연구이다. 모든 커리큘럼은 이에 맞춰 편성되는데, 그 결과 취업률은 100퍼센트에 육박한다.
이른바 몇몇 명문대를 제외한 종합대학에서 인문학은 몰락하겠지만, 한국 역시 가령 미국의 경우와 같이 엘리트·중산층 자제들이 입학하는 자유교양대학(liberal arts college)과 같은 단과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설립되면서 오히려 인문학을 강조하게 될 확률도 높다. 이런 유형의 대학의 등록금은 고액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평범한 중간계층의 학생들이나 부모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대개 이름난 전문 대학원에 입학해 엘리트로서 사회적 계층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지만, 오늘의 전문직이라는 것 역시 대량 공급 탓에 그 사회적 교환가치가 하락하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직업 선택의 자유는 현저한 제약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고전을 음미한 후에, 반드시 너의 현실로 돌아오라"
한국에서 대학 인문학의 위기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대학에서 대안적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학부 공통 인문 교육과정의 강화다. 이른바 학부대학을 자유교양대학 수준으로 강화하고 인문주의에 기반을 둔 커리큘럼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의 장점은 흔쾌하게 인정하면서도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령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네오 휴머니즘적 관점이 인문교육의 규범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하나의 맹점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라' 식의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 개인적 판단에 한국 대학 인문학의 가장 큰 위기는 고전으로 돌아가는 연구자와 교육자는 허다한데, 한국 사회라는 현실을 직접적인 연구 대상으로 포착해 연구하고 교육하는, 현실을 향해 열려 있는 인문학자들은 지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현실'이 인문학의 탐구 대상이 안 되니까, 또 그것이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학적 작업'으로 인정되지 않으니까, 막상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 개혁이라는 무지막지한 현실이 도래하면 인문학자들의 저항이 '신분보장' 수준으로 축소되는 것과 동시에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음미한 후에, 반드시 너의 현실로 돌아오라"는 식으로 인문교육이 변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학 인문학의 또 하나의 실패는 미국 대학 인문학의 실패와 동일한,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연구 업적주의'에 학자들 자신이 매몰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수의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자신을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기보다는 유기적 지식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유기적 지식인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접촉면을 확보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이다. 이 말은 인문학자들이 칼럼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교육과 저술 활동에서 대중들과 접촉면을 확장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저 또 하나의 전문 직업인에 불과해 대학에서 인문학의 몰락조차도 대중들에게는 '밥그릇의 상실'이라는 상투적인 이미지로 인식될 확률이 높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한 발언이다.
한국 인문학의 실패의 또 다른 명백한 사례는 학문 후속세대의 양성이라는 과제의 실패에서 온다. 거기에는 한국 대학원 교육의 실패라는 명백한 원인도 제시되어야 한다. 많은 수의 한국 대학원 교육은 학부교육의 '위족' 역할을 한 채, 그것과는 반대로 양적인 확장만을 지속해왔다. 박사 학위 과정의 양적인 확대 과정이 과연 '교수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수들이 고등교육의 본래성을 수호한다는 주장은 존중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대학의 본래성이란 게 과연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은 음미되고 발전적으로 해체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인문학은 그 정체가 '비학제적 학제' 또는 '비제도적인 제도'라는 역설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학문이다. '인문과학'이라는 학문 분류가 우리에게 선호되고 있지만, 인문학은 과학에 '미달'되거나 그것을 '초과'하는 메타적 성격의 담론과 사유 체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필요한 인문학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부서지고 변형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안과 밖에서 인문학 특유의 비판적 사고와 예리한 실천을 제도적·비제도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일까. 현대 대학의 '최후의 교수들'이나 탈현대 대학의 '최초의 교수들'이 될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한 필사적인 고뇌를 통과해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고민들을 더 펼치고 싶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서 펜을 놓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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