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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불온세력으로 찍힌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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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불온세력으로 찍힌 이유는?

[문학예술 속의 반미] 이승만 정부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II. 이승만 정부 (1948-1960)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3. 1950년대 시 속의 반미

한국전쟁 직후 시인 구상은 일련의 시를 발표했다. <난중시초 15: 휴전협상 때> (1953)에서 그는 비참한 조국을 한탄하면서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다시 분단되어야 하는 휴전협정 과정에 분노를 표출한다. 15편으로 이루어진 <초토의 시> (1956)에서는 "제 먹탕에 깜장칠한" 검둥이 아이와 매춘부 어머니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함으로써 한국 여인들의 삶이 미군들에 의해 파멸되는 것을 암시한다. 그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는 반공의식을 많이 드러냈지만, 이들 시에서는 민족의 비극을 그리며 외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몇몇 시인들이 이념적으로 외세를 비판하는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철범은 <야간 폭격> (1956)에서 한국전쟁이 외세에 의한 분단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민족이 외제 이념에 근거한 내전 중에 외제 폭격기에서 투하된 외제 폭탄에 의해 죽었다고 애도한다. 민재식의 연작시 <속죄양 I> (1956)에서는 외세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강대국들의 위대한 국민들을 빈정거리면서 "조국은 (전쟁의) 개평거리냐 / 우리는 속죄양이냐"고 외치는 것이다.

4. 1950년대 그림 속의 반미: 초등학생의 코쟁이 그림과 피카소의 <조선에서의 학살>

1948년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항쟁이 일어나자 길거리에 반미 포스터들이 넘쳐났다.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포스터도 있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일부 좌익 화가들은 북한을 지지하며 미국을 반대하는 벽보를 그렸다. 예를 들어, "적들을 일층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제목이 붙은 포스터에서는 미국을 쫓아내야 할 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한 초등학교 변소에서 충격적인 내용의 그림이 발견되어 학교 안이 발칵 뒤집혔다. 코가 큰 남자의 코를 유난히 크고 길게 그려놓고 어린 소년이 톱으로 그 코끝을 자르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굵은 못으로 벽에 깊이 새겨 놓은 그림이었다. 그 무렵 코 큰 남자는 '코쟁이'로 불리던 미국인이었으니, 한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미군을 그렇게 불경스럽게 묘사한 것이다. 학교 안에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마침 미술 시간에 그와 똑같은 그림 한 장이 나왔다. 담임선생이 화를 내며 그 학생에게 어떻게 그따위 그림을 그렸냐고 캐물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 밤 총소리가 빗발치다 그친 뒤 한참 지나 식구들이 잠자는 방에 코쟁이가 들어왔다. 어머니와 다투면서 못살게 굴다 밖으로 끌고 나갔는데 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분을 참지 못해 곧 병들어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동생들과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생각할수록 코쟁이가 미워서 그렇게 그렸다"

썰렁한 교실은 대번에 울음바다로 변했고, 눈을 부라리던 담임선생도 그 그림을 움켜쥐고 울고 말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 미군들에 의한 양민 학살은 한 외국인 화가의 그림을 통해서도 고발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 화가 피카소 (Pablo Picasso)가 1951년 그린 <조선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로, 로봇이 임신부를 포함한 벌거벗은 여인들에게 총을 겨누고, 공포에 질린 아이들이 도망가는 모습의 미완성 스케치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그림의 제목을 "한국에서의 학살"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황해남도 신천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 것이기에 '북한'이나 '조선'에서의 학살로 옮기는 게 바람직하다.

북한 당국은 이 학살에 대해, "미제 침략자들이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재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지껄이면서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미술 평론가 윤범모 교수는 1989년 <반핵과 미술>이란 책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며 재미있는 일화를 곁들였다. "1960년대 중반 어린이에게 인기였던 크레파스의 상표가 '피카소'였다 하여 어느 날 갑자기 서리를 맞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2001년 6월 21일 자 <한겨레21>에 실은 "살육의 향연, 미술의 증언"이란 칼럼에서 "1970년대, 물감과 크레파스를 생산하던 중소기업이 물감 상자의 겉면을 이 그림으로 사용했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정보) 기관의 압력을 받아 파산한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위 두 일화가 같은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아직 확인해보지 못하고 있는데, 1960-70년대엔 군사독재와 반공이 맹위를 떨치던 때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94년 귀국해보니 여기저기 '피카소 미술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1995년엔 처음으로 열린 광주비엔날레에 피카소의 작품들도 전시되었다. <조선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은 없었지만. 더디더라도 사회의 발전을 느끼며 남모를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참고로, 나는 1980년대 말 미국에서 세계 각국의 반미주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미군들이 한국전쟁 중 신천에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기사를 처음 접했다. 미군들이 1950년 10월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하다 신천에서 52일 동안 머무르며 400명의 어머니와 102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당시 신천군 인구의 1/4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그러한 '미제의 만행'을 길이길이 잊지 않기 위해 박물관을 세워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 피카소의 그림을 사진으로나마 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1998년 10월 처음으로 방북하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신천박물관이었다.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읍내의 조그만 박물관에서 관장의 안내를 받았다. 하루 평균 3000명 이상이 방문하는데, 북한 당국의 표현대로 6월 25일 '조국 해방 전쟁의 날'부터 7월 27일 '전쟁 승리 기념일'까지 '반미 투쟁 월간'엔 매일 1만 명 이상이 관람한단다. 북한에서 반미의 상징이나 성지처럼 된 곳이다. 관장에게 피카소의 그림에 관해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방북하는 길에 사진 한 장 구해다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약속을 지키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리겠지만.

이를 바탕으로 1998년 12월 한 월간지에 신천박물관에 관한 글을 실었는데, 이 글은 다른 잡지들과 책에도 실렸고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출신의 조동환은 1957년 펴낸 <항공의 불꽃>이란 책에서 공산 집단이 신천에서 반공 의거를 진압하며 양민을 학살해놓고, 이곳에 주둔한 적도 없는 미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2001년 <손님>이란 소설을 통해 "신천 학살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대립의 산물"이라며 당시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었던 개신교도들이 공산당원들을 죽였다고 묘사했다.

<손님>이 출판된 직후 나는 한 잡지사로부터 그 소설에 대한 반론을 부탁 받았지만, 미국 측 자료를 구하지 못한 터에 나서기 곤란했다. 그 대신 2002년 3월 미국 뉴저지에서 <손님>의 실제 주인공 유태영 목사를 만나 자신이 황석영에게 한 증언이 소설에서 크게 왜곡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튼 피카소가 1951년 그린 <조선에서의 학살> 배경인 신천 학살에 대해 북한 당국은 '미제의 만행'이라 하고, 남한 통일부나 <연합뉴스> 등에서는 북한의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조동환을 비롯한 일부 탈북자들은 ‘공산 집단’이 자행했다고 주장한다. 황석영의 소설은 '개신교도들'이 저지른 짓으로 묘사하는데, 소설의 실제 주인공 유태영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현대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통일이 필요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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