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보건복지부가 한 달 전에 발표한 자료 ‘2013년 한국 아동종합실태’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동과 청소년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꼴찌라고 한다. 우리나라 아동의 ‘삶의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0.3점으로 나타났고 모든 조사 항목에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했다. 한 단계 위인 루마니아의 76.6점에 비해 16점이나 낮은 것이다. 회원국 가운데 아동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네덜란드(94.2)에 비하면 34점이 뒤진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조사에 처음 포함된 아동결핍지수가 매우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동결핍지수는 아동 스스로가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정도를 나타내는데 54.8 퍼센트를 기록해 이 또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주었다. 바로 다음 순위인 헝가리의 31.9 퍼센트와 큰 차이를 나타냈다. ‘경쟁력’ 제고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한국이 경쟁력의 기본 바탕이 되는 학생들의 자신감을 갉아 먹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끝없는 경쟁과 비교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학습량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동과 청소년들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이유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왔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없이 노력하고 자기계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러한 경쟁을 가로막는 것 자체가 국민 개개인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 하락을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과연 그럴까? 경쟁만을 강조하는 사회풍조 자체가 문제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하나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와 협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대와 협동은 공감능력과 소통능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 중요한 것은 연대와 협동, 공감과 소통 이전에 구성원들이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사회의 미래 그 자체인 아동과 청소년들의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무한경쟁의 논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파괴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벌점과 상점으로 평가하는 ‘감옥 같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과 학원을 옮겨 다닌다. 밤늦게 집에 돌아가면 방안에 유폐된다. 학생들에게 그곳이 그나마 자유로운 공간이지만 그곳은 컴퓨터 게임과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곳이다.
우리 아이들은 서로 싸우고 화내고 화해하고 친교를 맺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표정 속에서 즐거움, 슬픔, 아픔, 노여움을 읽어내고 그것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들 스스로가 삶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골목과 공터에서 놀이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만들어갈 역량은 아동기과 청소년기의 놀이와 자유로운 상상에서 생겨나는 창조적 잠재성의 거대한 호수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획일적으로 주어진 정답이 아닌 기발하고, 때로는 어른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호수를 바닥이 드러나도록 방치하면서 ‘창의’와 ‘경쟁’을 외친다.
이야기 둘
얼마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을 과보호하기 때문에 심각해지고 있다는 희한한 이야기를 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위 공직자, 학자들, 그리고 언론은 국가 경쟁력을 맨 우선순위에 놓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규제 철폐가 그것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대학가에 나붙은 대자보의 주장처럼 노동시장의 문제는 정규직의 과보호가 아니라 비정규직이 보호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11월 21일 LGU플러스 전주 고객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던 청년노동자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역시 OECD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에서 자살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지만, 그가 남긴 유서는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회사가 제시한 판매량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회사는 상담원들이 서로를 고발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실적압박이 강제하는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직무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이윤의 극대화라는 회사의 목표 달성을 위해 노동자들은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기계보다도 못한, 아니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경쟁력일까?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고도로 분업화된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상호의존도가 높아지고 그만큼 개인의 자율성과 함께 타자를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가 보았던 자본주의의 모습은 이기적(egoistic) 이익 추구가 극대화되면서 생겨나는 사회적 병리현상에 몸살을 앓고 있는 사회였다. 그는 근대사회에 걸맞은 도덕적 원리와 시민적 덕성(virtue)을 열망했다. 자본주의의 재생산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에 기초한다는 맑스의 주장을 따르면 뒤르켐의 열망은 헛된 꿈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사회통합을 갈망했던 뒤르켐은 규범과 규제가 없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의 자유주의 시대를 모범으로 간주했던 보수주의자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조차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제도와 정치적 제도뿐만 문화적 자원과 규범을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시장원리를 맹신하는 한국의 지배엘리트들은 이러한 보수적인 안목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지배엘리트들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회를 유지하는 근저를 형성하는 공동체적 원리와 규범을 허물고 있다. 뒤르켐이 지적했던 것처럼 노골적인 사적 이익의 추구가 판치는 세상은 그들이 말하는 경쟁력 제고는커녕 서로를 적대시하고 의심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경제가 되었든 정치가 되었든 사람살이의 목적은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다움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이윤과 경쟁의 논리가 목적이 되어 버리면 인간다움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사람은 수단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당장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절대선으로 보면서 이윤과 경쟁력의 토대조차 허물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 셋
요즘 대학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구조조정과 특성화다. 여기서도 역시 맨 앞에 놓인 목표는 경쟁력 강화다. 모든 학문의 가치는 경제적 효용성으로 측정되고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학정책이 맞추어진다. 대학정책 뿐만 아니라 연구와 교과과정마저도 화폐적 기준으로 측정된다. 그래서 인문학에서도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트라는 ‘문화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온간 편법이 동원되고 대학평가에서 쉽게 점수를 높일 수 있는 부분에 집중 투자한다. 학문발전의 장기적인 전망은 바라지도 않는다. 대학의 중장기적 발전전망조차 없다. 그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지표값을 높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학문적 연구 결과가 효용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초학문에서부터 학문적 역량의 저변이 튼튼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철학, 역사학, 문학, 물리학, 수학 등 순수학문 분야가 거대한 지식의 호수를 만들었을 때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들이 효용성 있는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으면서 경쟁력 강화를 이야기하는 것만큼, 인간을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락시키면서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만큼 지식의 호수를 메마르게 하면서 지식을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도 비논리적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아마도 대학의 경쟁력은 지식의 호수에 물을 채우는 것과 더불어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에 달려 있다. 지식은 현실에 대한 진단이며 현실에 대한 진단은 필연적으로 비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비판이 ‘창의’의 밑거름이 된다. 비판 없이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우리의 아동과 청소년들이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최소한 승자독식의 교육제도에 짓눌려 창의적 잠재성이 손상된 학생들을 치유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학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자기 파괴적 교육정책에 편승하고 있다. 나아가 대학은 인간을 수단으로 간주하며 인간다움의 근본을 파괴하는 국가 정책에 쓴 소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은 그들 스스로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기초학문에 조차 이윤의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학교 구성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돈이 되지 않는’ 과들을 대학에서 축출하고 있다. 이것은 대학의 존립 자체를 허물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도대체 대학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사람다운 대접을 원하는 것이 반체제적인 것이 된 세상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은 한 방송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신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다. 그러니 오늘 잘 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그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의 달콤한 열매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미친 듯이 일하고 쉼 없이 달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뛰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무한경쟁의 열매를 얻어가는 사람은 따로 있다. 사람들은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하지만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의 거대한 변혁 이전에 상식을 원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기본적인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넘어 여가를 즐길 수 있고 자기를 계발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는 것. 이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상식조차 지키지 못한다. 한마디로 본말이 전도된 사회이며 기본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상식과 당연함에 근거한 ‘불온한’ 비판, 인간다움의 실현이라는 ‘반체제적’인 주장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이유를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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