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지난 11월 10일 한·중 양국 정상은 FTA 타결을 선언했다. 한중FTA는 2012년 5월 첫 번째 협상을 개시한 후, 14차례 협상을 거쳐 30개월 만에 사실상 타결이 이루어졌다.
한미FTA는 협상 개시부터 발효까지 73개월 동안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지만, 발효 이후에는 오히려 잠잠한 편이었다. 반면 한중FTA는 타결 선언까지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향후 정부 간 서명과 국회비준 등의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큰 고비는 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중FTA는 한미FTA에 비해 훨씬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한중FTA
그 이유는 첫째로, 한중FTA는 기존과는 다른 FTA 모델을 보여준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타결된 한중FTA는 ‘낮은 수준’ 또는 ‘중간 수준’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이 체결한 FTA 중에서 최초로 제조업보다 농업 부문을 배려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농업 부문과 함께 섬유·의류, 신발 등은 피해 품목에 해당한다. 석유화학, 전기전자, 자동차, 철강 등은 이익을 얻는 품목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농수산물과 자동차 등 쟁점이 되는 품목은 상당수가 양허 대상에서 제외했다. 자동차가 양허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이익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자동차의 중국 현지생산이 진전되어 있고 외국차의 우회수입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자동차업계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타결 발표 시에도 농업에 초점을 두어 농업을 배려한 모양새를 취했다. 농산물 관련 양허표를 좀 더 살펴보자. 양허 대상은 1611개로, 정부가 발표하는 주요 품목은 85개인데 그중에서 78개가 관세철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정부는 농수산물 양허 제외 비율이 수입액의 30%에 이른다고 밝혔다(한미FTA 0.9%, 한·EU FTA 0.2%). 국내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만 중국산 수입 비중이 높은 민감 품목은 20년에 걸쳐 관세철폐가 이루어진다. 큰 쟁점이 될 수 있는 위생검역 문제도 현행 WTO협정을 재확인하는 수준으로 타결되었다. 대부분의 신선 농산물은 현행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가공품 관세의 일부 감축으로 가공품 수입이 늘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채소나 가공품 위주의 기존 한중 농업무역 구조에 기초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번 한중FTA 타결은 국제정치적으로는 상당히 ‘과감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타결 선언이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이루어진 점을 주목할 만하다. 실무협상에서는 양국 모두 한 번씩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는 등 협상결렬 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타결을 보지 못했으면, 협상은 동력을 잃고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타결을 선언한 한중 정상회의는 일정에 쫓기는 가운데 순차통역이 아닌 동시통역을 통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중국 시진핑 주석은 21개국 정상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한중FTA 타결이라는 성과를 과시할 수 있었다.
한중FTA 타결은, 역설적이지만 진보성향의 정부가 먼저 한미FTA를 추진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한미동맹과 남북대치라는 조건하에서, 한미FTA에 앞서 한중FTA가 추진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한미FTA가 체결되어 한중FTA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해도, 한중관계의 진전을 방해하는 요인은 많다. 국제정치적 부담이 큰 사안이다 보니 국내적 충격을 조절하는 데에도 신경을 좀 더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타결 선언, 과감했나 무모했나
그런데 정부의 추진 방식이 과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11일 APEC 정상회의 제1세션에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실현을 위한 로드맵 채택을 적극 지지한다”고 발언했다. FTAAP는 APEC 21개국이 참여하는 구상으로, 중국이 이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한중FTA를 타결한 마당에 굳이 FTAAP에 대한 언급이 필요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한중FTA 타결 선언이 있었던 11월 10일 APEC 정상 갈라 만찬에서 박 대통령에게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추진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11일 오후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오바마 대통령의 20분간 짧은 정상회담이 있었다. 한미정상회담 일정이 당일에야 확정되었다는 후문이 있는 것을 보면, 한미 간에 한중FTA, TPP, FTAAP 등에 관해 충분히 조율되지는 않은 것 같다. 경제·외교·안보를 일관하는 정교한 계산으로 움직이고 발언한 것이 아니라면, 후일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셋째로, 장기적·경제적 시야에서 보면, 한중FTA는 필연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좀 과감하게 말한다면 한중FTA는 1990년대 이후 각국의 경계를 넘어 형성되고 있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한 구성요소다.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는 198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급속히 발전했다. 그간 동아시아의 생산 네트워크를 추동한 것은 중국과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었다. 제도적 차원에서 아세안 중심의 FTA 네트워크는 조밀하게 구축되었으나 한·중·일 간에는 FTA가 결여되어 있었다. 한중FTA는 생산·무역 네트워크의 진전을 제도적 차원에서 따라간 측면이 있다(졸고 <한중 FTA와 동아시아 자본주의>, 경향신문 2014.11.13.).
이제 ‘한반도경제’로의 도약을 기획하자
그런데 ‘동아시아 자본주의’에는 네트워크의 편중과 공백이 교차하고 있다. 시장적 네트워크는 빠르게 조밀화하고 있으나 비시장적·시민적 협력의 네트워크는 성긴 편이다. 중국으로의 네트워크 집중이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고, 북한이라는 네트워크상의 구멍이 존재하고 있다. 한중FTA 이후의 과제는 이러한 네트워크의 비대칭성을 교정·보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기획이 지향하는 경제모델을 ‘한반도경제’라 부르고 싶다.
빈 구멍을 메꾸고 차지하면 새로운 공간과 기회가 생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행할 것인가이다. 시인 진은영은 주어진 ‘토포스’(topos)라는 장소성을 부정하고 불평등하게 배치된 감각의 ‘토포스’를 재배치하는 ‘아토포스’(atopos)야말로 문학의 본령이라고 한 바 있다(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이에 비추어보면, ‘한반도경제’ 역시 ‘아토포스’의 경제라 부를 만하다. ‘한반도경제’는 일국 자본주의와 동아시아 자본주의라는 현존하는 처소를 넘어, 낯설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네트워크 공간을 만들고 확산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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