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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로 변신한 평론가, 청년시절 "무산 계급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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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뉴라이트로 변신한 평론가, 청년시절 "무산 계급 단결"

[문학예술 속의 반미] 이승만 정부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II. 이승만 정부 (1948-1960)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2. 평론에 나타난 이승만 정부와 미국

1948년 제주와 여수·순천 등의 이른바 '반란'에 관한 '보고 문학' 또는 '르포'(reportage) 작품 몇 편이 발표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이러한 문학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조덕송은 제주에서의 학살을 보고하며 한국인들이 미군 장비로 무장한 한국의 진압군에게 살해당한 것을 한탄했다. '폭도'들은 유엔한반도임시위원회와 외국군대 철수를 주장하며,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 한반도 정부 수립을 원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미군사령관은 '폭동'의 원인엔 관심이 없고 '폭동'을 막는 임무에만 충실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폭동'을 진압한 뒤에도 다시 일어난다면 그건 남한 정부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홍한표는 '제주반란'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세계 제1의 미국 해군이 제주도 해안과 항공을 지키고 있는 터에 외부로부터 물자 지원과 지휘 통솔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는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일시적 안정만 불러올 뿐이라며, '반란'을 가라앉힐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말부터 공식적으로 '제주 4·3사건'이라 불리는 이 항쟁에 대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2014년 현재에도 적지 않다는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실제로 제주에서 반미 소요가 일어난 데는 깊은 역사가 있다.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 선임분석관으로 근무해온 존 메릴이 1980년 밝히고 있듯, 1946년 2월 제주의 다양한 단체들은 남로당의 지도에 따라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1947년 3월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력시위를 두어 번 펼쳤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폭도'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매국적 단독선거에 결사반대하며, 인민을 해방시키고 조국을 통일하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섰다. 우리는 미국 식인자들과 그들의 주구들을 제거하고 그들을 파괴하며 그들이 인민을 살상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존 메릴의 1983년 보고에 따르면, 1년 이상 유혈의 대격전으로 흐른 제주항쟁에서 인구의 15%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항쟁은 미군 점령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가장 폭력적으로 분출된 것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통치 구조를 다시 구축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맞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민족해방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한표는 '제주 반란'에 이어 '여·순 반란'에 관해서도 보고문을 발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공식적으로 '여수·순천 사건'이라 불리는 이 투쟁은 제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반대한 군부대가 1948년 10월 19일부터 여수에서 제주로의 파병을 반대하며 봉기하기 시작한 사건이다. 이는 한인들 사이의 교전이었지만, 홍한표는 소련과 미국 사이의 전투로 간주했다.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지만, 진압군은 미국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았으며 자문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공산주의보다 훨씬 나은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처음 만들어지고 폭력적으로 통과되자 한 국회의원이 이에 반대하며 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 항쟁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군부대 안의 공산주의 세포"에 의해 주도되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 남한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하는 폭동"에 관한 보도를 금지했다. 미군은 항쟁에 관해 언론에 공표하기를 꺼리긴 했지만 직접 검열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1948년 11월 작성된 미군 정보 보고는 다음과 같다.

"반란 지도자들은 투쟁 목표가 외세 제국주의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국무총리가 단독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이 지도자들에 의하면, 제주도 주민들은 1948년 4월 제국주의 정책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고 그들의 조국을 지키는 데 목숨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수의 군인들이 제주도 주민들을 살해하기를 거부하며 제주로 파병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반란 지도자들은 미 군정에 반대한 3년간의 투쟁을 언급하며 모든 미국인들은 즉각 조선을 떠날 것을 촉구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1990년 지적했듯이, 당시 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매우 강한 반미감정이 군중 속으로 널리 퍼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남한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은 "미 군정 하에서 무분별하게 경찰을 채용한 것"이 반란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건혁과 이동훈은 각각 1948년 미국과 남한 사이에 처음 맺어진 두 가지 협정에 관해 비판했다. 첫째, 두 사람 모두 1948년 8월 서명된 군사협정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군사협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밀"이라는 이유로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지도 않고 국회에서 논의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의혹을 제기한 정도다. 이건혁은 미 군정 3년 동안 약소국 민족의 비애를 통절하게 느꼈다며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자주 속아왔기 때문에 협정에 관한 근심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국내에선 언론 발표도 없고 국회 논의도 없었지만, <뉴욕타임스>는 1948년 8월 25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미 군사협정은 주한미군사령관이 남한 보안대와 해안경비대를 지속적으로 훈련시키고 설비를 제공하며, 미군사령관이 국회 결의에 따라 미군 철수와 함께 협정이 종식될 때까지 경찰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비대에 대한 ‘전반적 지휘권 (over-all command)’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동훈 역시 그 협정에 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미군들이 3년 동안의 점령을 끝낸 뒤에도 남한의 모든 필요한 시설과 지역을 무료로 이용하면서 계속 주둔해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미군 부대가 주둔하도록 요청한 남한 대통령과 내각을 한탄했다. 실제로, 그 무렵 인기 있던 대중 문예지 <신천지> 1948년 5~6월호에 따르면, 10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한 24명의 각계 지도자들에게 미군 철수에 관해 물었더니 모두 미군 철수가 적절하며 환영한다고 대답했다.

둘째, 두 사람 모두 1948년 9월 체결된 한미 간의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에 크게 분개했다. <뉴욕타임스> 1948년 9월 26일 보도에 의하면, 남한은 1945년 해방될 때부터 1948년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미 군정 3년 동안 도움을 받은 대가로 미국에 3억 달러 이상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이 액수는 "미 군정 기간 남한의 기아와 빈곤을 막아준 식량, 의약품, 공구, 연료, 의복, 비료, 기계류 등을 정산한 것"이었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남한 정부는 미국이 사용하기 원하는 시설과 지역 등의 재산 소유권을 이전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재산들의 유지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게다가 남한 정부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 없이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재산을 처분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건혁은 이 협정이 일본에게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던 1905년의 '보호조약' 또는 '을사늑약'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국회에서 논의되었던 것을 인용하면서 "미국에 의한 조선의 필리핀화" 또는 "매국" 행위라고도 했다. 이동훈은 남한 정부 수립이 완전한 독립을 불러오지 않았다면서 남한의 주권이 언제 성취될 수 있을지 회의를 품었다.

이석과 정진석은 각각 1948년 민족을 구하고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적 또는 민족적 문화운동을 주창했다. 이석은 문화 전선을 형성하는 다양한 문화운동 단체들이 미군들에 반대하며 민족해방 및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소개했다. 당시 문화운동을 정치의 도구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는 문화운동이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미 군정의 언론 탄압 등을 비롯한 비민주적 문화정책을 비난하며, 한국 문화가 황폐해진 것을 한탄했다. 미 군정은 몇 가지 신문 및 문예잡지를 정간하거나 폐간했으며 편집자들을 구금했던 것이다.

정진석은 문학의 정치적 또는 이념적 특성을 부인하며 참된 민주주의 문학에 맞서왔던 '순수 문학'을 비판했다. 그에게 순수 문학이나 예술은 자본주의의 타락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가장 진보적인 과학적 세계관은 소련에서 발전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를 배격했다. 아울러 인민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혁명적 낭만주의를 포함한 진보적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 예술을 고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0-60년대 널리 알려진 문학평론가였던 백철은 1959년 남한에 끼친 미국의 문화적 영향에 대해 비판했다. 미국 문화엔 장점이 조금 있긴 하지만, 퇴폐, 타락, 범죄 등을 포함한 더 많은 단점이 1945년 이래 남한에 침투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남한에 확산시킨 세 가지 저질 기관이나 매체를 지적했다.

첫째, 미 군정 기간 미국인 행정 관료들은 식민통치 시대 일본인 관리들보다 성실성이 부족한 데다 더 부패했다. 그는 남한 정치가 부패한 기원을 미 군정 기간에 재산을 축적했던 미국인들에게서 찾았다. 둘째, 한국에 왔던 많은 미군들이 어리고 교육을 덜 받았으며 그들의 취미와 취향이 저속했다. 그들이 과도기 남한 사회에 경망과 무질서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의 춘화(포르노)와 서부영화가 한국에 악마 같은 영향을 미쳤다. 남한 사회에서 청소년 범죄를 비롯해 폭력이 만연되는 것은 서양 영화 탓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춘화와 미군들의 성행위는 궁극적으로 남한의 일부 문학예술 작품에 비속함을 고취시켰다고 주장했다.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보에 실린 류근일의 글은 '필화 사건'을 부른 1950년대 가장 충격적 평론이었을 것이다. 당시 정치학과 2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둘 다 한국인을 만족시킬 수 없다며 조국의 새로운 형태로 민주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새로운 조국을 갈구한다"거나 "무산대중은 단결하자"는 등의 주장도 곁들였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거부함으로써 반미주의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매카시즘과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동료 학생들과 교수들까지 충격에 빠뜨린 이 평론 때문에 그는 퇴학을 당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엔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 사건으로 다시 감옥 생활을 하고, 1970년대엔 '전국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세 번째 투옥되었다. 이러한 그가 1981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고 2000년대엔 '뉴라이트' 운동 지도자가 되어 극우적 평론을 발표해온 것은 매우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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