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이승만 정부 (1948-1960)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1. 남한 정부 수립 및 한국전쟁과 문학예술
1947년 9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 통일과 독립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전술'을 비난하며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그게 바로 미국의 전술이었다. 미국은 1947년 초 그리스와 터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원조 프로그램이 다급해지자 "될수록 빨리 명예롭게 (gracefully) 한반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헨더슨이 1968년 묘사했듯, 한반도 문제를 "인상적이지도 않고 부적절하며 돌발적인 방법으로" (in an unimpressive, inadequate, and sporadic fashion) 유엔에 떠넘긴 것이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기권한 상태에서 한반도 총선을 관리할 유엔한반도임시위원회 (UNTCOK)를 설립하자는 미국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위원회는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반대하자 이남에서만 미 군정이 계획한 대로 1948년 5월 총선을 실시할 것을 승인했다.
다수의 한인들은 이 총선 계획을 반대했다. 미국이 소련과 합의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다, 남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우익 지도자 김구는 한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외국 군대가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이 지원한 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낸 중도파 지도자 김규식은 단독 선거는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불러올 것이라 믿으며 외국 군대가 철수하고 남북 지도자들이 협상을 시작할 때까지는 선거를 실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좌익 지도자들은 유엔한반도임시위원회가 미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며 총선 반대 투쟁을 이끌었다. 이승만을 비롯한 극우 지도자들만 38선 이남에서 총선을 즉각 실시해 단독정부를 세우고, 군대가 들어설 때까지 미군 점령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위원회와 총선 계획을 지지했다.
유엔한반도임시위원회 의장인 인도의 메논 (Menon) 박사는 한인들의 강력한 총선 반대에 직면하여, 38선 이남에서만 총선을 실시하자고 제안한 미국의 계획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한반도는 폭발할지 모른다. 이는 아시아와 세계에서 일어날 '거대한 격변' (vaster cataclysm)의 시작일 수 있다 (...) 유엔한반도임시위원회는 38선 이남에서 총선을 실시하는 것이 유엔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한반도의 독립과 미·소 점령군들의 철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만 총선이 실시되었고, "미 군정은 한인들이 선거에 참여하도록 대규모 선전 활동을 펼쳤다". 압도적으로 많은 우익 인사들이 국회의원으로 뽑혔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또는 '국부'가 되었다. 그는 분명히 미군정 초기부터 '미국이 선택한 인물' (America’s man)로, 1945년 10월 매카써 장군의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왔고, 하지 장군의 주선으로 한인들 앞에 등장했던 것이다.
결국 1948년 5월 총선거는 38선 이남에서 '반공 경찰국가' 수립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이북에서 '공산주의 경찰국가'가 들어서도록 이끌었다. 1948년 8월 미 군정이 공식적으로 종식되면서 이승만 정부로의 권력 이양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능숙한 조종자'(adroit manipulator)이긴 했어도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미국의 군인들과 돈 그리고 남한의 경찰"을 동원하지 않고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38선 이남에서의 단독 선거에 대한 반대 운동은 1948년 8월 이승만의 제1 공화국 출범 이후 반정부 및 반미 항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좌익 인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10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제주항쟁 또는 제주반란' 및 '여순 (여수·순천) 항쟁 또는 반란' 등을 이끌었다. 이에 남한의 문학예술은 미국에 반대하는 민족해방 투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1949년 10월, 북한은 유엔총회 의장 및 사무총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 한인 대표들의 참석 없이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것은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나아가 유엔이 소수 반역자와 배신자들의 이기적 이익만을 고려하고 한민족의 의사를 무시한다면, 한민족은 유엔한반도임시위원회를 즉각 제거하고 자신의 힘으로 통일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주력군은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했다. 소련군대가 북한을 떠난 지 6개월만이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만은 중국 영토이며 미국은 대만을 침탈할 의도가 없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애치슨 (Dean Acheson) 국무부 장관은 대만에 대해 어떠한 방법으로든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월 12일,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 (the Aleutians)에서 일본과 류큐 열도 (the Ryukyus)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지며, 대만과 한반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시 일주일이 지난 1월 19일 미국 하원은 남한에 대한 경제 원조를 부결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다음 달 바뀌었다. 이와 관련하여, 1월 20일 장면 주미대사는 미국이 남한을 포기한 게 아닌지 국무부에 우려를 표명하며, 남한이 미국에 의해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이승만의 기대도 전했다.
참고로, 앞에 얘기한 '애치슨 선언'은 나중에 한국전쟁에 관해 연구해온 학자들 사이에서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술책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이는 중국공산당을 유혹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1949년 7월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1949년 10월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떼놓기 위해 중국공산당에 적극적으로 우호의 손짓을 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애치슨은 공개적으로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을 지원한다고 하면서도, 은밀하게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마오가 소련을 방문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공개적으로 장제스의 대만을 버리고 마오의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했다. 마오를 끌어들임으로써 중·소 동맹이 체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950년 1월 트루먼은 미국이 중국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대만에 관심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경제 지원은 지속할지라도 군사 지원은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으로 물러간 국민당 군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이 역사적으로 서로 반목해온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을 자극하기보다는 소련 제국주의에 반대함으로써 더 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세워졌어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부가 소련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걷는 것처럼, 소련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면 마오 군대가 대만을 공격하고 점령해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이 무렵 수립된 미국의 대외정책이 'NSC 48' (The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Respect to Asia)로, 아시아에서 일본을 축으로 소련을 봉쇄하는 동맹을 추진하되, 사회주의 중국을 승인하고 대만을 포기한다는 구상이었다. 1949년 12월 23일과 30일 자로 작성된 국가안보위원회 (NSC)의 아시아전략에 따르면 '애치슨 선언'은 중국과 소련의 동맹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6개월 뒤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남한에 대해 전면전을 개시했다. 미국은 남한을 포기하지 않기로 신속하게 결정했다. 유엔 깃발을 들고 전쟁에 참여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결국 북한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은 많은 남한 사람들에게 '반공과 친미'를 각인시켰다. 북한의 침공과 전쟁 중 남한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행위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참전과 전후 남한 재건을 위한 원조는 미국에 대한 우호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북한은 '가장 나쁜 적'으로 간주되고 미국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된 것이다. 미국의 공식적인 한자 표기가 '美國'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다. 해방 전엔 일본식으로 '쌀이 많이 나는 나라'라는 뜻의 '米國'으로 표기되다가, 미 군정 시기엔 두 가지 표기법이 혼용되던 터였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부터 휴전협정 반대 및 남한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사업가들에 대한 조세 문제 등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국무부 극동아시아 담당 부차관보는 1955년 9월 한국대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남한 언론에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공식적으로 고취되고 의도되는 듯하다. 아마 몇몇 대통령 보좌관들은 이게 무슨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얘기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극도로 불쾌하다. 미국에 대해 이렇게 지속적으로 비판하면 한미관계에 독이 될 것이며 확실히 역효과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극단적 반공정책 때문에 미국에 대한 비판은 용공이적 행위로 간주되었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남한의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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